(일해라 티스토리, 들여쓰기 기능은 왜 없앤 건데?!)

 

그동안 강녕하옵신지요. 저는 다시 뮤지컬 천국/지옥에 빠지고 뜻을 같이하는 새 동지들과 같이 자캐지옥에 빠져있었읍니다. 고증덕후+싸이코 너드를 작전참모로 들이면 매일같이 환상적인 연성을 맛보실 수 있사옵니다

 

I'll Be Here는 오디너리 데이즈 Ordinary Days 라는 뮤지컬의 수록곡으로, 뮤지컬 공식(언젠가 정리해 볼까요)중 하나인 '마지막에서 두번째 곡은 앨범 최고최악의 최루탄'을 훌륭하게 만족시키는 명곡입니다. 

 

저는 (그놈의) 해밀턴 애니매틱으로 이 곡을 접했고, 하루종일 눈물을 쏟은 다음, 바로 연성에 들어갔죠. 

고증덕후라는 것은 9.11 테러 관련 영상을 시청하고 2000년대 초반에 처음 상영한 뮤지컬(몇몇 분들은 눈치채실수도..ㅎㅎ)을 조사한다는걸 의미합니다.

다만 한국에서도 공연 했다는데 가사 봇을 뒤져도 극히 일부분밖에 찾지 못한거하고 뉴욕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된건 2011년 6월 15일. 따지자면 작중 배경과 충돌하는게 유이한 한입니다... 깐깐한 고증덕후라 죄송합니다

 

유튜브에 있는 원본은 Lisa Brescia가 부른 버전인데, 애니매틱에서 쓰인 버전은 Rebecca Brierley가 부른 커버 버젼입니다. 가사가 살짝 달라요

더보기

커버 버젼 가사는 파란색으로 처리했습니다!

 

We met, of all places, in front of Gristedes 우리는, 많고 많은 곳 중에서, 그리스테디스[각주:1] 앞에서 만났지

Some freakishly cold winter's day 기막히게 추운 어느 겨울날에

I had on several unflattering layers of wool 나는 어울리지 않는 털옷을 몇겹 껴입었고

He slipped on the ice with his grocery bags full 그는 장바구니가 가득 찬 채 얼음에 미끄러졌어

So I rescued some Fruit Loops he dropped by the curb 그래서 도로 경계석에 떨어뜨린 후루트 룹스[각주:2]를 구출해줬어 

And he made some remark that my smile was superb 그러자 내 미소가 정말이지 최고라는 말을 했고

And I thought that was sweet and I started to go 나는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가려고 했는데

And he said, "Hey, whatcha doing tomorrow? 그가 물었어, "저기, 혹시 내일 뭐하세요?

 

Because I'll be here 왜냐면 저는 여기 있을게요

At the corner of Bleaker and Mercer, tomorrow at 7 블리커가와 머서가의 모퉁이에서 내일 7시에

If you want to meet up, I'll be waiting right here 만약 만나고 싶다면, 바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And in case there are two fellas waiting for you 그리고 만약 두 사람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면

My name's John." 제 이름은 존이에요."

He waved, and then he was gone 손을 흔드더니 그는 사라졌어

 

Needless to say, I went back there to meet him 말할 필요도 없이, 그를 만나러 다시 거기에 갔지

Mostly to see if he'd show, and there he was 혹시나 나타날까 확인하고픈 맘이 대부분이었는데, 거기 있었어

Out in the cold with his jacket pulled tight 추위 한가운데 재킷을 단단히 입고서 말야

He took me to dinner and kissed me goodnight 내게 저녁을 사주고 잘자라는 키스를 해줬지

The next week we went to this terrible play 다음 주에는 정말이지 끔찍한 연극을 보러갔고

And the week after that drank hot chocolate all day 그 다음주에는 하루종일 핫초코를 마셨어

And suddenly, eight or nine months had flown by 그러더니 갑자기, 8이나 9개월이 순식간에 날아갔지

When he said, "Hey, whatcha doing the rest of your life? 그가 이렇게 물었을때, "저기, 남은 인생동안 뭐해?

 

Because I'll be here right beside you 왜냐면 내가 너의 곁에 있을게

As long as you want me to be, there's no question 너가 바라는 만큼 오랬동안, 의심의 여지가 없어

There is nothing I've wanted so much in my life 내가 이 정도로 인생에서 간절히 바랐던게 없었어

This might sound immature 유치하게 들릴지 몰라도

But I'm totally sure you're the one." 너가 바로 내가 원하던 사람이란걸 전적으로 확신해

And we had just begun 그렇게 우리는 막 시작했지

 

We got hitched in September, our favorite month 우리는 9월에 결혼했어,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달에

With a rock band that played in this old synagogue 오래된 시나고그[각주:3]에서 록밴드가 연주했지

And we bought an apartment on West 17th Street 그리고 우리는 웨스트 17번가에 아파트를 샀고

And talked about children and getting a dog 아이들과 개를 키울까 하는 얘기를 나눴지

 

Our first anniversary came in a flash 눈 깜짝할 새에 우리의 1주년이 다가왔어

And we promised to take the day off 우리 둘다 그날은 쉬기로 했지

He had to stop into his office that morning, and so 그 날 아침 그가 오피스에 들려야 해서

I went walking uptown to this bakery I know 나는 업타운에 있는 베이커리까지 걸어갔지

When I heard on the street what I thought was a joke 길가에서 들었을때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는데

'Til I noticed the sirens and saw all the smoke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연기를 보고 말았어 

So I'm running back home with this feeling of dread 그래서 두려움에 휩싸여 집까지 달려오면

To the voicemail he left with the last words he said 음성사서함에 그의 마지막 말이 남겨져 있었어 

 

I'm sorry; I don't mean to ruin your evening 미안, 네 저녁을 이런 얘기를 꺼내서

By bringing up all of this stuff 망치려더건 아니였어

You're probably wondering why I even called you tonight 내가 왜 오늘 밤 불렀는지 궁금해하겠지

Well, today something happened that spooked me alright 그게, 오늘 나를 겁먹게한 일이 있었거든

I saw this storm cloud of papers fall down from the sky, 하늘에서 내려오는 종이 한 무더기를 봤더니

And I thought of that day and I started to cry. 그 날이 생각나서 울기 시작했어

I discovered his Fruit Loops still there on the shelf, 아직도 선반에 있던 그의 후루트 룹스를 발견하고

And I cried, and I couldn’t get hold of myself 울기 시작했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말야

When as sure as I breathe I heard John clear as day 그러다 숨소리 너머로 틀림없이 존이

Saying, "Hey, you're allowed to move on. It's okay 말하는걸 들었어, "저기, 너는 이제 나아가도 돼, 괜찮아

 

Because I'll be here 왜냐면 나는 여기 있을께

Even if you decide to get rid of my favorite sweater 너가 내가 제일 좋아하던 스웨터를 치우겠다고 결심하더라도

Even if you go out on my birthday this year 너가 올해 내 생일때 데이트를 가더라도

Instead of staying at home 집에만 있으면서

Letting all of life's moments pass by 네 인생의 순간들이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대신에 말야

You don't have to cry 울 필요 없어

 

Because I'll be here 왜냐면 나는 여기 있을께

When you start going back to the places we went to together 너가 우리가 같이 갔던 장소들을 다시 방문하기 시작할 때도

When you take off my ring and you let yourself smile 너가 내 반지를 빼고 스스로에게 웃어도 괜찮다고 할 때도

When you meet some handsome and patient and true 너가 잘생기고 참을성 있고 진실된 사람을 만날 때도

When he says that he wants to be married to you 그 사람이 너와 결혼하고 싶다고 할 때도

When you call him one night, and he meets you downtown 너가 어느날 밤 불러서, 그 사람이 다운타운에서 너를 만날 때도 

And you finally answer him 'Yes.' 너가 드디어 "좋아." 라고 대답할 때도

 

Yes, Jason, I will marry you 응, 제이슨, 너와 결혼할게

I will give you my heart 너에게 내 마음을 줄게

It has taken so long, but I'm ready to start 너무 오래 걸렸지만, 이제 시작할 준비가 됐어

 

Right now, John's whispering "Congrats" in my ear 지금 존이 내 귓가에 "축하해"라고 속삭이고 있어

Cause I finally let myself tell you that I will be here 왜냐면 드디어 내가 너에게 여기 있겠다고 말했으니까

 

 

가사를 숙지하시고 읽어도, 들으면서 읽으셔도 좋습니다! Songfic 종류는 별로 써본적도 번역해본적도 없는거 같은데, 뮤지컬 장르 입문했으니까 앞으로 그럴 기회가 늘어날까요 제가 잘 쓴게 아니라 곡이 명곡인 겁니다ㅏㅏ

 

만에 하나라도 이걸 읽고 자캐들에게 관심이 생겼다면... 언제든지 썰을 풀 준비가 되어있답니다!


그 날도 이렇게 가랑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이었어.

 

마트 앞 거리가 꽁꽁 얼어있었지. 한눈팔면 순식간에 미끄러질 정도로. 오리털 파카에 깊숙히 파묻힌 나는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얼음에 미끄러지는걸 봤어. 그 사람이 떨어뜨린 식료품을 주워줬지. 내 근처까지 날아온 알록달록한 후루트링 시리얼 상자가 눈에 뛰더라고. 너도 알지? 나는 아침식사로 시리얼보다 토스트 파인거.

 

쨌든, 상자를 주워서 건네주는데 그 사람의 손가락이 내 손등을 스쳤어. 추운 날씨에 장갑도 쓰지 않은 손은 차가워야 할텐데 신기하게도 온기가 느껴졌어. 크림을 잔뜩 넣은 핫초코의 색깔이었던 그의 머리에서 전해진 온기였을까. 

 

상자를 건네받으면서 내 미소가 정말 예쁘다면서 다정하게 말 건 그의 눈은 안경 너머에서 빛나고 있었어. 마치 초코칩 같았지만 쿠키에 잔뜩 박혀 있는 초코칩을 발견했을때의 신남으로 가득 차 있던건 오히려 그의 눈이었어. 사람 참 좋다고 생각하고 다시 내 갈 길을 가려고 했는데 내게 말을 걸었어.

 

"저기요, 혹시 내일 뭐하세요?"

 

내일 7시에 머서 스트리트와 블리커 스트리트의 모퉁이에 있겠다고, 만나고 싶다면 거기서 기다리겠다고, 그리고 만약 두명 이상이 기다리고 있다면, 자신의 이름은 앤드루, 앤디라고 불러달라고 했어. 그리고 손을 한번 흔들자 사라졌지.

 

계속 얘기해도 돼? 아, 길가에 사람 별로 없으니까 상관 없다고? 그래, 고마워.

 

말할 필요가 있을까, 다음날 나는 그 모퉁이로 제시간에 맞춰서 갔어. 다른 이유는 없었고 그냥 그 사람이 다시 와있을까 확인하러 같지. 모퉁이를 돌자 앤디가 거기 있었어. 처음 만났을 때보단 따뜻했지만 여전히 쌀쌀한 날씨에 가죽 재킷을 단단히 껴입고 있었지. 우리는 지중해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저녁을 즐겼어.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달콤했던건 헤어지기 전에 나눈 키스였어.

 

그 다음 주에는 정말 끔찍한 뮤지컬을 보러 갔어.  글쎄,  남주인공이 극 중간에 죽더라니까?! 로미오와 줄리엣에 레 미제라블을 섞은 듯한 이야기는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화장실이란 주제로 자본주의를 풍자하는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어. 아니 애초에 제목부터가 꺼림칙했지만. 시간 되면 우리도 보러갈까?

 

그리고 그 다음 다음 주에는 하루종일 핫초코를 홀짝였어. 앤디의 머리색을 꼭 닮은 핫초코 말야. 나는 쓴맛 취향인데 앤디는 혀가 아릴 정도의 단맛을 좋아하더라. 전에는 핫초코에 마시멜로를 넣어본 적이 없었는데 앤디가 가르쳐 줬어. 마시멜로를 잘 구워서 초콜릿 조각과 크래커로 샌드위치를 만드는 스모어도 앤디가 처음 만들어줬어. 잘 녹은 초콜릿만큼이나 달달한 시간이었지. 그렇게 8-9개월이 쏜살같이 지나갔어.

 

어느 날 앤디가 물었어.

 

“저기, 앞으로 평생 동안 뭐할거야?

 

내가 언제나 네 옆에 항상, 꼭 있을게. 몇달, 몇년, 몇십년동안이라도 네가 바라는 만큼. 살면서 이렇게 간절하게 바랐던 순간은 없었던 것 같아. 유치하게 들릴지 몰라도 내가 평생동안 찾은, 영원히 함께하고픈 사람이 너란걸 확신해.”

 

그렇게 내 인생은 새로운 장을 맞이했지-

 

우리는 9월에 결혼식을 올렸어.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달이었거든. 그대로 라울 ‘롤리’ 거트리여도 라울 레베르가 되어도 상관 없었어. 그냥 맺어졌다는 사실이 한없이 기뻤던 것 같아. 웨스트 17번가에 있는 아파트를 구해서 아이는 몇 명, 개는 몇 마리 키울까, 하루하루를 그런 얘기로 보내다가 시간 가는줄도 몰랐어. 그저 앤디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좋기만 했어. 꿈만 같은 시간이었지. 

 

어느새 1주년이 눈 깜짝할 새에 다가왔어. 그날은 우리 둘다 일을 쉬기로 했지. 앤디가 오피스에 두고온 걸 챙기려 갈 동안 나는 업타운의 베이커리에 갔어. 집 근처에 초코 크루아상을 기가 막히게 굽는 곳이 있거든. 지난번에 가져온 에클레어도 그 집 꺼야! 어쨌든, 그날도 빵을 한가득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지.

 

…응? 아니, 괜찮아. 우는거 아냐. 계속 얘기할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분위기가 이상해졌어. 갑자기 조용한 길거리를 뒤덮은, 맨해튼에서는 듣기 힘든, 그것도 지나치게 큰 비행기 소리.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 도시를, 아니 전 세계를 뒤흔든 폭발음. 저 멀리서 피어오르는 붉고 검은 불길과 연기. 이내 물밀듯이 달려오는 사이렌 소리. 혼란에 빠진 사람들이 오열하며 주저안고, 비통에 서로를 껴안고, 수군대는 소리. 

 

갑자기 세상이 멈춘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어. 시청각적 충격에 압도당해 무너져 내릴것만 같았어. 천년같은 10초가 흐른 뒤에야 미친듯이 달리기 시작했어. 거짓말이었으면, 잔인한 장난이었으면, 악몽이었으면. 그래, 이건 꿈이야. 내 인생을 질투한 악마가 악몽을 꾸게 만든거야. 꿈에서 깨면 우리의 1주년 아침일거고, 포근한 이불에 파묻힌 채 앤디의 품에서 깨어날 거고, 내 기척에 일어난 앤디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거고, 너가 죽는 악몽을 꿨다고 하면 웃는 얼굴로 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면서 나는 절대 너를 두고 사라지지 않겠다고 말하겠지. 

 

그런데도 끔찍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어.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수 없어서 계단으로 달려갔어. 몇번이고 미끄러지고 구를뻔했는지 몰라. 그래도 상관 없었어.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우 열쇠를 꽂고 현관문을 열었을때 신발 한 켤레의 부재를 발견하자마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어. 봉투를 떨어뜨리자 빵이 바닥에 나뒹구는걸 무시하고 음성사서함을 확인해 봤더니

 

 

 

앤디의 마지막 말이 남겨져 있었어.

 

 

 

……아, 미안해. 우울한 얘기로 저녁을 망치려던건 아니였는데. 그럼 내가 왜 불렀냐고?

 

그게, 오늘 있는줄도 몰랐던걸 발견했어.

 

천장에 후루트링이 아직도 있더라고. 그걸 보자마자 무릎부터 무너져 그대로 주저 않았어. 그때 울다 울다 지쳐서 나오지 못한 눈물까지 쏟아서, 미친 사람처럼 오열했는데, 어느 순간 앤디가 속삭이는 소리가 처음 만난 날의 하늘보다 맑게 들렸어.

 

지금부터 너의 인생을 살아도 된다고. 

 

이젠 괜찮다고. 자신은 언제나 옆에 항상, 꼭 있을테니까. 자신이 제일 좋아하던 스웨터를 치우겠다고 결심해도, 올해 자기 생일때 데이트를 가도, 집에 있으면서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이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대신 계속 인생을 살아가도, 울 필요 없다고. 

 

우리가 같이 갔던 장소들을 다시 방문할 때도, 손에서 반지를 빼고 그날 이후 처음으로 웃어도, 자신만큼이나 다정하고 끈기 있고 진실된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이 너와 결혼하고 싶다고 할 때도, 너가 어느날 밤 그 사람을 불러서 다운타운에서 만나자고 할 때도, 그래서 그 사람이 오고 너가 마침내 좋다고 할 때도-

 

잠시 통화를 멈추고 거리를 바라보면 저 멀리서 달려오는 그녀가 보여.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은은하면서도 환하게 빛나는 금발은 앤디의 미소만큼이나 밝아. 그런데 평소엔 햇빛을 받으면 그 무엇보다도 찬란하게 반짝이는 페리도트빛 눈은 축축하게 젖어있어. 마지막 몇분동안은 울면서 온 걸까, 아니면 눈물에 눈발이 섞인 걸까. 한껏 상기된 뺨도 추위 때문일까, 아니면 감정이 북받쳐 오른 걸까. 그렇다면 그 감정은 생각조차 못 한 슬픔일까, 아니면 숨길 수 없는 감격일까.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를동안 나는 그녀의 붉어진 눈가를 닦아줘. 마치 앤디가 그랬던 것처럼. 어느정도 시간이 흐르고 공기가 진정되면 두 사람의 눈이 서로 마주쳐. 지금까지 나눈적이 없는 감정이 타오르고 있어. 쌀쌀한 날씨를 이 새로운 느낌이 따뜻하게 데우고 있어. 

 

그때는 내가 받는 입장이었지만, 이번엔 내가 주는 입장으로. 양손으로 차갑게 식은 그녀의 두 손을 데우다가, 왼손을 가볍게 감싸고, 며칠동안 코트 주머니를 차지하던 그것을 쥐고서- 

 

“우리, 결혼하자.

 

내 맘을 줄게. 오래 걸렸지만 다시 시작할래. 이제 마음의 준비가 된 거 같아. 그동안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앞으로 남은 내 삶을 너와 함께하고 싶은 것 같, 아니, 함께하고 싶다는걸 확신해. 그러니까

 

레이, 레이첼 녹스. 레이첼 거트리가 되어줄 수 있어?”

 

며칠동안, 어쩌면 몇달 아니 몇년동안 꺼내길 망설인 그 질문을 마침내 던지고서, 상자를 열면 녹색 보석으로 장식된 금반지가 반짝여. 마치 지금 울음과 웃음을 동시에 터뜨린 레이의 얼굴처럼. 그 미소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해. 말은 필요 없어. 우리는 서로를 와락 껴안고선 더욱 뜨거워진, 앞으로 평생을 함께하게 될 온기를 나눠. 

 

지금 앤디가 “축하해!” 라고 귓가에 속삭이는게 들려. 내가 드디어 너에게

 

이제는 걱정하지 말라고,

 

내가 언제나

 

네 옆에 항상, 꼭 있겠다고 말했으니까.

 

 

  1. 뉴욕의 슈퍼마켓 체인. [본문으로]
  2. 켈로그의 시리얼. 한국에서는 후루츠링이라 부르지만 80년대에는 원어판처럼 후루트 룹스라고 불렀다네요. [본문으로]
  3. 유대교의 사원. [본문으로]

원문: https://archiveofourown.org/works/16354460/chapters/38268896

Happy birthday, Karoru!! Hope you have the best day ever!! Will this be an acceptable B-day gift?

Also credits to Shao; your magnificent pieces of art couldn't do better job to capture the atmosphere!

원제는 Wisteria-Loss. 


위스테리아-등나무의 꽃말은 '사랑에 취하다'! 크으으

등나무 등藤자는 일본 성씨에서 자주 볼수 있는 한자인데, 예를 들면 사이토斉藤라던가......정답입니다. 겐타로 성우분 사이토 소마斉藤壮馬님의 성과 똑같아요. 혹시 여기서 영감을 얻으신 건가요 작가님!!! 

작가님 왈, 불신의 기색을, 특히 어느 특정...한 장면에서, 놓치지 말고 읽어주세요. 무슨 의미인진 직접 확인해보세요! ^^ 


반점남발 만연체 꼭 써보고 싶었어요! 가독성은 희생당한 겁니다 유메노 작가님의 평소 문체가 궁금한 사람 1호. 물론 작가님은 챕터마다 문체를 바꿔써도 가독성에 전혀 문제가 없는 금손님이시겠죠......

이번에는 기나긴 수식어+반점+(수식어 곱빼기+주어+동사) 형태, 현재:과거=7:3 비율로 섞인 시제 정도...라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만약 브금을 깔고 읽으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중간에 걸린 링크를 클릭하 우타프리 미카제 아이의 Winter Blossom 피아노 버젼이 나옵니다.

자연스럽게 기사를 찾아 봤는데... 그런 짓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전 그걸 몰랐지... 호기심으로 죽인 고양이만 몇마리일까......

작가님?????작가니이이이이임?!??!!???!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선사하신 거죠?!!??!!!??

히 가사를 여기 실어서 맴찟을 공유한건 정말 유감스럽게 생각하지만 전혀 죄송하지 않지 않지 않습니다

저는 작업 도중 나카무라 유이치中村悠一의 벚꽃을 들었고...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앵슷 분위기를 연성해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독제독以毒制毒!


보통 ‘아이’라는 이름은 여성형 이름이지만,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청년군 이미지에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하셨어요

'아이'가 이름 アイ, 사랑 愛, 슬픔 哀, 희미함 曖, 어린아이 할때의 아이, 인공지능 AI 등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어서 언어덕후는 신나게 고통받았습니다

‘아이’시테루와 ‘다이스’키와의 말장난도 노렸다고… ((막간 치명타


용한 방 안, 하얀 커튼에 스며드는 노을은 회색 벽을 밝힌다.

안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져 있다: 두꺼운 커튼으로 나눠진, 형형색색의 기계들. 반대편에는, 모두 한 화가가 그려낸, 거의 십년된 작품 모음. 그리고 한구석에는, 익숙한 이름이 표지에 새겨진, 두께가 제각각인 책 한무더기.

리고 모든 것의 한가운데, 작가가 홀로 있다. 창문 틈새로 비집고 들어온 부드러운 바람에 머리카락이 살랑거린다. 하지만 칠흑같이 어둡고 흐리멍텅한 눈을 한 작가 본인은 조각상마냥 움직이지 않는다. 그 옆에서 빈 침대에 햇살이 스며든다.

차갑고, 꾸물거리는 공기 중에서, 고장난 축음기처럼, 마치 이미 오래전에 시간선에 아로새겨진 것을 간절히 바꾸려는 듯이, 기억들이 반복된다.

청명한 하늘의 아침이었다. 익숙한 카페에서, 멍하니 앞에 놓여진 종이를 가로지르는 펜에서 겐타로는 안식을 찾는다. 직원들이 자신을 알아볼 정도로 자주 방문했던지라, 아기자기 꾸며진 한 구석에서 프라이버시를 만끽할 수 있는 친절을 받곤 했다. 인정하건데, 여기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걸 즐겼다-이곳의 공기는 자주 부드러운 산들바람처럼 느껴져서, 평소와는 다른 날숨을 내쉴수 있고, 마치 새로운 이야기의 씨를 뿌리는 것마냥 춤추며 주변을 맴돈다. 겐타로에게는 평소와 별다를것 없는 날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을 거란걸 확신해서, 그 생각에 입가에서 피어나는 미소를 손가락 뒤에 숨긴다.

그순간 핸드폰의 진동을 느꼈다. 화면에 뜬 번호는 처음 보는 번호여서 처음에는 무시했다. 하지만 발신자는 고집스럽게도, 연속으로 화면에 불이 들어오게 해서, 결국엔 전화를 받았다.

“유메노 겐타로 선생님이십니까?”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전문직의 저음과 흡사해서, 차분하게 말을 계속하는데도, 겐타로는 발신자의 목소리에서 새어나오는…또다른 무언가를 어렴풋이 느낀다.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불길한 예감을 애써 떨쳐 내면서, 답변 몇마디를 내뱉는다.

“…테이카 종합병원 입니다.”

벌써부터 반쯤 아득해지는 의식 너머로, 겐타로는 의사의 첫 마디를 놓쳤지만, 곧바로 이어진 다음 몇마디는 고통스러울만큼 똑똑히 들렸다. “지금 당장…병원에 오시는 편이 좋을것 같습니다. 아이 군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 문장의 의미를 겐타로가 이해할동안 숨막히게 기나긴 시간이 흘렀지만, 비로소 깨달은 순간, 세계가 멈춘다. 머릿속에서 그 단어들이 반복될 동안, 주변이 흐리멍텅하게 흐려져서, 쓰라린 고통과 잇따른 공포의 파도만이 남는다.

이제 손이 덜덜 떨려서, 핸드폰을 쥐는데 애를 먹었지만, 강제로 호흡을 안정시키고, 의사선생님께 침착함과 유사하기만을 바랄수밖에 없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통화가 끝나기도 전에, 두 발은 이미 걸음을 옮겨서 카페를 떠났다. 흩어진 원고를 두고 떠나자 여직원이 부르는 소리가 아득히 들렸지만, 이내 곧 머릿속에서 째깍이는 시계 소리에 묵살당한다.

수없이 방문했던 방의 문을 드디어 열었을땐 전혀 숨을 쉴 수 없었다. 친구의 침대를 에워싼 의사들과 간호사들은 겐타로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침대 곁에 다가가자 순식간에 흩어진다. 남아있던 의사중 한명이 방을 나서기 전에.겐타로에게 다가갔는데, 입술의 움직임을 똑똑히 읽고, 통화 도중 들은것과 똑같은 목소리라는걸 눈치챌수 있었는데도, 겐타로는 귀를 먹먹하게 하는 침묵밖에 인식할 수 없었다.

겐…

뼈에 사무치게 익숙한 목소리가 이름을 불러서 침묵을 깨뜨린다. 그 순간에야 비로소, 주체할 수 없었던 눈물에, 두 뺨이 더럽혀진걸 깨닫는다.

“난 정말 최악의 친구야…오늘은 정말…최악의 날이네, 너한테 이런 짓을-” 아이는 입을 열었지만, 그순간 터져나온 기침은, 너무나도 부자연스러웠다-

즉시 곁으로 달려가서, 떨림에 몸이 무너져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거의 울부짖다시피, 말들을 내뱉는다. “ㄱ…곧 있으면 나아질 거라고 했잖…!”

“미안해…” 그렇게 말하는 아이의 얼굴은, 그동안 봐왔던것보다 훨씬 창백했고, 작은 웃음에 섞여 나오는 목소리는, 겐타로가 익숙해진, 지나치게 익숙해진 활기가 더이상 담겨져 있지 않다. “그러니까…그건 거짓말 이었어, 하하. 나쁜 버릇도 옮았나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을 이겨 내고, 겐타로에게 희미하게 웃어보이자, 답변 대신 떨림을 억누를 수 밖에 없다.

“저기, 겐? 이기적인 부탁,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해도 될까?"

가냘픈 손을 꼬옥 쥐자, 무언가가 손바닥을 누르는 감촉이 희미하게 느껴지지만, 한데 엮인 손가락의 틈새로 한기가 기어들어 올것을 두려워해서, 절대 손을 놓을 수 없다.

그 순간 수만개의 바늘이 심장을 찌르지만, 그래도 미소로 맞이하자, 나오는 목소리는 놀랄만큼 침착했다. “…물론이죠. 무슨 일이라도 해줄수 있어요.”

안도의 한숨이, 행복과 섞여서, 아이의 입을 떠나자, 겐타로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전에 시작한 이야기 마저 말해줘. 그 패션 디자이너 하고… 이상한 갬블러가 나오는 이야기 말야.”

틀림없이, 틀림없이, 그것 말고도 더 있을 텐데-

“지금은 이야기해줄 시간이-”

입술에 손가락이 약하게 맞닿자 말은 끊긴다. “겐. 나는 아무리 짧은 이야기라도…해피엔딩으로 끝났으면 좋겠어. 그리고 최고의 친구가 침대맡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보다…완벽한 해피엔딩이 있을리 없잖아?”

타로는 답변 대신 픽 웃을수 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도, 늘 그랬듯이 시적인 건가요…?”

겐타로가 망설일 동안, 찰나의 순간 다시 생명력을 되찾은 것처럼, 아이는 겐타로가 차마 거절할 수 없는 힘을 실어서 덧붙인다. “제발.”

둘의 눈이 마주친 그순간, 할 수 있는건 단 한가지 뿐이라는걸 알았다. 미소가 피어나서, 손가락이 움직여 머리카락을 걷어내자 드러나는 눈은, 그 무엇보다도 매혹적이어서, 시간이 흐를동안 더욱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알겠어요.”

그러자 아이가 지은 미소는, 신체의 병약함에도 불구하고, 기억하는 그 어떤것보다 찬란해서, 그 순간동안 중요한 유일무이한 것이 되었다.

그래서 즉석에서, 밤하늘의 수많은 별보다도 훨씬 많은 비밀을 품은 분홍 머리의 명랑 쾌활한 패션 디자이너와, 스릴을 위해서 자기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들을 훨씬 중요히 여기는 무모한 갬블러의-이번에는 진실된-이야기를 자아낸다.

언제부터 시야가 완전히 흐려지기 시작했는지, 언제부터 눈물에 옷과 두 뺨이 젖기 시작했는지, 언제부터 숨막히는 울음을 삼키려 했지만 실패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목이 메어오고, 가슴이 옥죄여 오더라도, 절대 멈출수 없어서, 주변 기계가 연주하는 불안정하지만 율동적인 선율과, 매초가 지날수록 점점 부자연스러워지는 호흡과, 겐타로의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진다.

말해줄 이야기가 떨어질 때까지 이야기를 계속하고, 끝에 다다르면 처음부터 다시 말하다가, 몇시간이 흘렀는지, 몇번을 반복했는지, 시간의 흐름을 망각했지만, 감긴 눈꺼풀 너머로 빛이 사라지는걸 바라보면서, 무거운 마지막 숨결이 허파를 떠나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순간 겐타로는 단 하나만을, 입가에서 절대 바래지 않은 희미하면서도 찬란한 미소를 기억했다.

희미한 생명의 선율이 하나의 음색으로 흐려지더니, 침묵만이 남는다.


텅 빈 침대 곁에서 몇시간을 떠나보냈는지 겐타로는 모르지만, 결국엔 조용한 목소리로 애틋하게 위로하던, 무시하려 했지만 이내 실패한 동정이 서린 눈길의 간호사가 병실 밖까지 데려다 주었다.

한걸음 한걸음마다 무겁게 가슴을 짓눌러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이미 과거에도 수십번은 드나든 길이지만, 보도에 발이 닿을 때마다, 만약 생각을 정처없이 떠돌도록 내버려둔다면, 어떤일이 일어날지 두려워서, 걸음에 집중한다. 가로등이 흐릿하게 거리를 비추고, 시나브로 기온이 오르자 생명의 마지막 가닥을 꼬옥 붙든 벚꽃의 분홍빛 바다가 깔린 길이 눈에 들어온다.

일년에 단 한번 피어나는, 기적적인 생명의 흔적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세계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수록, 점차 잊혀지게 될 덧없는 영혼들의 유품을 품은, 죽음의 정원이라고도 충분히 부를 수 있으리라.

마치 하나의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그리고 이미 겐타로는 자신이 어느 면에 위치해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두 발이 스스로 걸음을 옮겨서, 의식은 두서없이 방황하는데도, 어느덧 현관 문 앞에 다다랐다. 문의 나뭇결을 관찰하느라 뜸을 오래 들였지만, 결국 두 손은 작은 문고리를 잡고 돌린다-열쇠를 넣지 않았는데도 이미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는 사실도, 문의 반대편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아 젠장”도, 둘다 눈치채지 못한채, 겐타로는 문을 밀어 연다-

밝은 빛에 갑자기 시각이 압도당한다. 거기에 덮쳐오는 불꽃놀이 같은 소리가, 즉시 폭죽이라는걸 알아차린다. 알록달록한 종이조각의 비에 파묻힌다.

“생일 축하해!”

몇 초가 지난 후에야 겐타로의 두 눈은 깜박여서 초점을 되찾는다-하지만 시야를 조정하기 전에도 익숙한 파란색과 분홍색 머리가 언뜻 보인다. 이제 싱글벙글 웃는 다이스와 라무다가 눈에 들어온다. 그순간 다이스가 더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주인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강아지마냥 가상의 꼬리를 신나게 흔드는걸 누구라도 똑똑히 목격했으리라.

그제서야, 오늘이 며칠인지 기억해낸다.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감사합니다.’

‘소생은 행복해요.'

그러나 유메노 겐타로는 수려한 말쏨씨를 타고 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에서 말할 수 있는, 말해야 하는 예문들이 넘쳐 흐르는데도 불구하고…

그순간, 단 한마디의 거짓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대신, 진실과 거짓의 진퇴양난에 사로잡혀서, 겐타로는 단순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침묵은 금이라 했던가, 그렇지만, 대답의 부재가 단순히 충격이나 놀람의 부작용이 아니라는걸 동료들이 눈치채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방의 공기가 즉시 바뀌어서, 마치 모든게 환상이었던 것처럼, 축하하는 분위기가 팀 동료들의 미소와 함께 녹아 사라져서, 또다른 죄책감의 압박으로 일그러진다.

“야, -겐타로?”

먼저 다이스가 입을 연다. 평소에는 활기차던 목소리가 걱정에 휩싸인건,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을 증폭시킬 뿐이다. 밝은 민트빛 눈이 곁에서 겐타로를 지켜본다. 비슷하지만,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이 서린 표정을 지은 라무다와 눈이 마주친다.

다이스가 계속해서 부르고 있다는걸, 겐타로가 마침내 눈치채기까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다. 마침내 대답을 내뱉을 목소리를 가까스로 되찾았을 때에는, 기껏 입에서 떠나자마자 떨리지 않도록, 모든 집중력을 한데 모아야 했다.

“...네?”

둘의 머릿속을 온통 한 질문이 차지한게 너무나도 명백해서, 기력없는 반응을 바라보는 두 쌍의 눈은, 딱히 입을 열지 않더라도 생생히 의문점을 전달하지만, 개의치 않고 다이스가 직접 물을 기회를, 기다렸다는듯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입 밖에 내기를 허락한다.

“무슨 일 있었어?”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에게서 충분히 예상하고도 남는 질문이지만, 가장 직설적인 돌직구를 날리곤 하는 다이스의 경향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빈틈을 논파하는데 성공한다. 안식을 울부짖고, 어깨의 무거운 짐을 이제 그만 내려놓기를 갈구하는 유치한 면과, 여전히 고집스럽게, 그것밖에 할 줄 아는게 없으니까, 자신이 지어온 견고한 벽을 사수하려는 면 사이에서 갈등이 피어난다.

두 면이 충돌한다.

…그러자 두려움의 구름이 몰려와서, 어느 한쪽도 이기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다는 공포에 압도당해서, 겐타로는 갈등이 자연스럽게 풀릴 시간을 주지 않는다: 대신, 그러도록 늘 예행연습 한것처럼 밀쳐낼 뿐이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소생은 괜찮은데요.”

여전히 목소리는 침착하고, 평소의 자신에 대한 모든 ‘평범한’ 건-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래야만 하지만-그럴싸해도, 그걸 인증하는 순간에도, 실은, 입 밖에 낸 순간에도, 여전히 걱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다이스와 라무다에게선, 눈 씻고 찾아봐도, 일말의 반응조차 찾을 수 없다.

그러자 안에서 무언가가 무너져 내리겠다고 위협한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진실성을, 마지막 한톨뿐만이라도 좋으니까, 처절하리만큼 필사적으로 사수한다.

...불행히도 그리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ㅈ…죄송해요, 둘다.” 떨림이 기어오른다. 멈춤과 망설임 사이로 단어들이 흘러나온다. 무력하고, 노출되고, 평소에 쓰던 가면이 떨어져서, 산산조각 난걸 필사적으로 다시 붙이는 것만 같지만, 기적적으로 계속 기능하는 자신의 현 상태의 위태로움을 잘 알기에, 여의치 않고 계속한다. “소생은…마음은 고맙지만, 오늘을 혼자 있었으면 하네요.”

현 상황에선 걱정될 수 밖에 없는 부탁이란걸, 누구라도 부정할 수 없어서, 라무다는 눈썹을 찌뿌린다-

“겐타로~?”

마치 라무다가 입을 여는게 신호였던 것처럼, 다이스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겐타로에게 다가간다. 찰나의 순간 동안, 겐타로는 신체적 접촉을 환영해서, 최소한 누군가의 온기 안에서 일시적인 안식을, 위로를 받기를 거의 갈구했지만-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의 짐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 수 있을 가능성을 고려한 것만으로도 자책한다.

다시 입을 연 다이스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진정되고, 위험할 만큼 위안이 된다. “우리가 해줄 수 있-“

“지금 둘이 해줄 수 있는건 없어요. 아무것도요. 그냥… 소생을 내버려 두세요.”

둘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또다른 죄책감의 파도에 휩쓸려서, 친절함에 분노와 불만감으로 대응한걸, 심장이 대신 벌을 내린다. 이제 눈가가 따끔거리는게 느껴지지만, 겐타로는 입술을-피맛이 느껴질 정도로 세게-잘근잘근 씹어서, 쏟아지겠다고 위협하는 감정의 파도를 다시 억누른다.

공기가 잔잔해진다.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이미 무너져가는 벽에 파도가 부딪혀 부서질 때마다 영겁의 시간이 흘러가는 것만 같다.

이제 입 안에서 쇠맛이 느껴진다-무딘 고통이 배어나오더니, 그 순간, 이제 그만 놓아주려는 것처럼, 드디어 다이스와 라무다가 이해한다는 듯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걸 곁눈질로 슬쩍 보았다. 어깨에 가볍게 손이 닿자, 온몸으로 억눌린 전율이 퍼지지만, 겐타로는-누가 보면 죽었다고 착각할 정도로-가만히, 뒤에서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도 그대로 있었다.

후퇴하는 발소리가 어렴풋이 들리지만, 이내 귀를 멀게 하는 침묵이, 본인의 위태롭게 떨리는 숨결에 깨지는 소리만이 귓가에 맴돈다.

의식이 다시 연결되고 몸이 작동하기까지 몇 초가 더 지난다. 머리 위에 자리잡은 잔머리카락을 집는 동안, 겐타로는 손가락 사이에 꼬옥 쥐어진 종이의 존재를 비로소 자각한다. 이제 기억이 다시 돌아온다: 마지막 대화를 나눌 동안 아이가 조용히 손에 쥐어준, 그동안 내내 잊고 있었던 편지다.

떨리는 손가락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나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갑작스런 움직임에 즉시 구겨지고 재가 되어 사라질걸 두려워하면서, 편지를 연다.

다소 느리게 진행된 작업이지만, 마침내 펼쳤을 때엔, 스케치의 첫 선이 눈에 들어온다-아이는 자주 겐타로가 말해준 수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낸 수많은 캐릭터들을 종이에다 그려내곤 했지만, 이 낙서는 생각보다 단순했다-그저 아이와 겐타로, 그리고 둘 사이에 딸기 쇼트케이크-특별한 날에 같이 먹으러 가자고 약속했었지-가 있는 그림. 화가가 한창 그리던 도중 생각을 바꾸기라도 한것처럼, 연필선이 갑자기 흐려져서, 뻗어나가는 선을 눈으로 쫓다가, 왼쪽 아래 한구석에 작게 휘갈긴 글씨를, 너무나도 익숙한 글씨체를 눈치챈다:

한 이야기가 끝나면, 또다른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말이 있잖아.

우리한테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

우리가 함께 보낸 모든 순간을 사랑했고, 나눈 모든 대화를 소중히 여겼어.

그리고 마음속에 너가 나를 위해 지어준 모든 멋진 이야기들을 간직했어.

더 긴 이야기를 나눴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둘다 해피엔딩을 맞이하게 될거야.

내 해피엔딩은 너 덕분에 찾았어.

그러니까, 여기서 멈추지 말아줘. 네 이야기의 다음 페이지를 넘겨서, 너만의 해피엔딩을 찾아줘.


너는 항상 내가 어둠을 밝혀준 등불이라고 했지.

하지만 너도 나의 등불이었어.

너가 없었더라면 칙칙하고 고통스러웠을 나날에 색깔과 기쁨을 가져다 주었어. 너의 미소는 두번 다시 느끼지 못할거라고 생각한 온기를 가져다 주었어.

너를 만나서 정말 기뻐. 이건 평생 후회하지 않을거야.

다음에 만날 때도 좋은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어.

고마워, 겐. 전부 고마워.

이미 편지의 끝에 다다르기 한참 전에 시선이 다시 흐려진다.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피어나고, 이런 것마저도 시적인걸 비웃고 싶어져서, 그러자 마지막 한가닥이 끊어진다: 안에서 자신을 가까스로 붙들고 있던 무언가가, 그순간 무너져 내린다-미쳐 눈치채기도 전에, 두 다리가 힘없이 풀린다.

단단한 마룻바닥에, 부서진 인형처럼 가만히 주저앉은, 겐타로의 피부 속으로 한기가 파고든다. 연결이 거의 끊어진 것처럼, 심장을 날카롭게 후벼 파는 고통이 머릿속을 온통 차지해서, 주변에서 다가오는 진동은 전부 거부한다.

찬란하고 아름다운 빛, 알록달록한 종잇조각, 맛있는 음식의 군침도는 냄새, 전부 한데 어우러져서, 따뜻한 친절을 보여준 동료-어쩌면 친구, 라고 생각할 정도로 소중한-두 사람을 생각나게 했지만…이제는 깊어져가는 공허함밖에 남지 않아서, 눈빛이 어둠에 물들어, 단 한점의 빛도 허락하지 않는 색으로 흐려진다.

그래서, 흑백의 세계에 홀로 남겨진 채, 울고, 계속해서 울고, 어느새 우는것마저 잊어버린다.


시계가 째깍인다. 하늘은 계속해서 수만가지의 빛깔로 번진다. 구름은 드넓은 파랑에 자리를 잡다가 때가 되면 흩어진다. 해가 뜨고, 지고, 모든 것이 반복된다.

굳게 닫힌 문 너머에서 그 순환을 몇번이나 계속했는지 겐타로는 회상하지 않는다.

월초에 마지막으로 만난 후, 한동안은 다이스나 라무다에게서 온 연락이 없어서-아니면 그저 깜빡이는 핸드폰 불빛을 무시하기로 한건지, 확실하지 않지만-무시는 한없이 자연스러웠다. 과분할 정도로 친절한 호의를, 매정하게 거절해서, 둘이 보여준 우애를 망쳐버리자-처음 있는 일도 아니잖아, 라고 조용히 생각하면서-아이러니한 미소를 짓고, 나같은 걸 상대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절대로 미친 사람밖에 없을거라면서, 사색에 잠긴다.

그래도, 자신을 키워준 노부부에게서 온 전화는, 받지 않는다면 더욱 걱정하실 테니까, 받았다: 위안되고 기운을 북돋아 주는 말들을 건네셔서, 제한없는 환영을 갈망하는 이기심에, 겐타로는 집에 돌아와서 잠시동안 있으라는 제안을 거의 받아들인다-하지만 가면을 벗지도 떨어지게 내버려두지도 않아서, 너무나도 많이 연습한 미소를 곁들인채, 안심되는 답변만 남겼다. 지금까지 갚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은혜를 입었으니까, 이미 무거운 어깨에 또다른 짐을 얹을 필요는 없겠지.

나중에서야, 화면이 검은빛으로 흐려지는걸 바라보면서, 놀랄만큼 간단한 일이었다는걸 깨닫는다-물론,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한 사람들이란걸 고려해야 하지만서도.

하지만 그 말은 가장 많은 거짓말을 한 사람들이란 뜻이란것도 곧바로 기억해낸다.

이제 시선은 벽에 걸린 작은 달력으로 옮겨져서, 빨간 동그라미가 거칠게 그어진 날짜에 집중한다. 기한은 마치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무자비한 시간의 흐름을, 모든 것은 언젠가 끝에 다다른다는 진실을 일깨워준다-

부딪혀 무너지는 공포의 파도를 밀어내고선, 다시 기어오른 잡생각들을 파묻는다. 거의 본능적으로, 손은 근처에 있는 펜을 찾아 움직여서, 손가락에 묻은 빨간색과 하얀색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마치 써내린 모든 단어가, 더이상 느껴지지 않는 모든 고통 한방울이, 무너져내려가는 벽을 붙들고 있을거라고 믿는것처럼, 펜을 꼬옥 움켜쥘 뿐이다.

조금만 더 오래 이 동화속에 빠져 있어도 괜찮을까.

시계는 째깍이고, 손을 거의 리듬에 맞춰서 까닥거리자, 펜은 종이 위에서 미끄러지며, 생각은 눈앞에 보이는 글자에만 집중한채, ‘그들’을 위한 마지막 동화를, 피곤한 것도 잊고 자아내다가, 현실의 마감 시간을 맞춘다.

기한이 다가오기 전에 최소한 해피 엔딩에 다다를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몇번이고 그렇게 빌었건만, 그 날은 기어이 오고야 말았다.

해는 지평선을 깨고 올라와서, 햇빛은 어두컴컴한 방안으로 스며들고, 목숨줄을 쥐고 있던것처럼 꽈악 져서, 욱신거리는 주먹을 드디어 피고, 떨어지는 펜과 함께 책상에 쓰러지는 작가를 비춘다.

겐타로가 기절했다는걸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어서, 즉시 잠이 싹 달아나서 벌떡 일어나, 필수품을 챙기고, 엉망진창인 꼬락서니를 충분히 격식있을 정도로 다듬으면서, 무서울 정도의 속도로 방안을 뛰어다닌다-하마터면 본능적으로 자신의 평상복을 꺼내 입을 뻔했다가, 달력 위 선명한 빨간색이 눈에 들어오자, 검은 옷을 꺼내 차려입는다.

머릿속은 온통 기진맥진 해서, 왜 서둘러야 하는지 잊어버릴 정도로 흐려지지만, 책상 위 원고를 가지런히 정리할 동안, 거의 읽을 수 없는 글씨체가 눈에 들어와서, 공포가 돌아오는걸 자각하면서도, 고통스러운 미소를 애써 억누를 뿐이다.

종이에서 단어를 짜내면 그 말이 그대로 이뤄질거라고 믿어서, 겐타로는 온힘을 다해서 종이를 쥐다가 서둘러서 발걸음을 옮긴다. 수작업을 하느라 방치해뒀던 두 다리는 격렬히 저항하지만서도.

두렵지만,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은 날.

살짝 숨이 찼지만, 그래도 제시간에 장소에 도착했을 때 겐타로는,  소생은 괜찮다면서 자기 자신을 거의 납득시켰다. 자동적으로 환영의 인사-몇개는 다른것보다 좀더 길었다-를 건네면서, 침착하고도 부드러운 미소의 가면을 쓴채, 안심과 격려를 단어 사이사이에 엮는다-

하지만 답변으로 비슷한 말들 대신, 감사의 말들을 받는다.

여러 ‘고맙다’는 계속해서 다가오고, 그러다가 마침내, 아이의 어머니와 얘기할 때, 몸이 덜덜 떨리는데도 밝은 미소로 맞아 주시는 친절한 분이셔서, 별 생각 없이 혀끝에서 걱정의 질문이 굴러 떨어진다.

“감사받을 만한 일은 하지 않은거 같은데요…”

문장이라기 보단 질문에 가까운 형태로 흘러나왔지만, 그래도 의도를 이해하신것 같아서, 고개를 저으시더니 곧바로, 미소가 살짝 바랬지만서도, 아까 전보다 훨씬 진심 어린 대답을 하신다:

“아니야, 겐타로… 아이를 웃게 해줘서, 고맙구나.”

왜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그 무엇보다도 세게 치고 지나간 한마디.

머리 한구석은 단순히 허울뿐인 말일거라고 말하지만, 그래도 그 한마디는 자신을 붙잡더니,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깊숙히 파고든다. 잠시동안 할 말을 잃어서, 숨이 막혀서 목이 메어 온다-

하지만 놀랍게도 두 뺨은 젖지 않는다.

어쩌면 이제 더 이상 흘릴 눈물도 남지 않은 걸까.

나눌 말이 더이상 없을 때에야, 주변의 공기가 침묵의 안락에 잠겨서, 홀의 한가운데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익숙한 얼굴이 들어올때까지 무겁고, 불안정한 걸음을 옮기기 까지 마지막으로 남은 용기 한방울까지 짜내야 했다. 아이의 두 눈은 감겼고, 그 어떤 기억보다 평화로운 표정을 지었다-그리고 어쩌면 피곤의 부작용일지도 모르지만, 입가에서 작은 미소가 피어나는게 언뜻 보인다.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자신을 깨워서 데려갈 운명의 기사님을 기다리는 동안 잠든 것처럼.

하지만 수많은 말들을 지어내고 비틀어서, 현실에 엮어낼 수 있기만을 간절히 바래도…진정한 사랑의 키스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수만가지의 ‘만약’과 ‘이랬더라면’과 ‘절대 일어날 수 없던 것’들 뿐. 그래도 약속은 영원한 법이고, 자신의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켜져야 하니까, 찾는걸 그만둘 수 없다.

겐타로는 종이를 가지런히 접어서, 주변을 건드리지 않을려고 조심스럽게, 주머니 안에 집어넣는다. 그러고선 그 순간이 허락한 만큼, 가능한 한 가까이 기대어, 정적에 숨을 참고선, 거의 들리지 않는 속삭임으로, 마치 친구에게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십몇년 된 둘의 이야기에 이별을 고한다.

“그 곳에선 더이상 고통받지 말고, 아프지 말고, 편히 잠들기를 빌게요, 소생의…친구.”

그 말이 혀끝에서 굴러떨어져서, 하마터면 이런 순간에 마지막 거짓말이 흐트러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다시 삼킨다-적어도 친구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을 뿐, 딱히 다른 미련이 남은건…

겐타로는 작은 기침을 내뱉어서, 기침 소리에 생각의 고리를 끊고, 마지못해서 시선을 돌린다.

나머지 문상이 진행되고, 이어서 장례식이 거행될 동안, 차마 아이의 얼굴을 다시 마주볼 수 없었다. 기억에 활기 넘치던… 순간들만 남아 있기를 바라는건, 유치하고 불가능한 바람이란걸 알고 있었지만, 꼭 이뤄지길 간절히 바랬다-이런 상황이라면, 자신을 둘러싼 검은 바다의 미세기에 휩쓸릴 동안엔, 이기적으로 굴어도 괜찮지 않을까.

이 상태로 얼마나 긴 시간을 흘러보냈는지 인식조차 하지 못했지만, 묘지의 침묵 한가운데, 해가 서서히 회색 벽 너머로 사라질 동안, 산들바람이 불어올때에야, 수만번을 연습해왔던 미소를 드디어 벗어 던진다.

어느새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것도 눈치채지 못한채, 하카마의 주름을 더럽히는 진흙은 무시하면서, 익숙한 이름 옆에 웅크린다.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고, 묘석 옆에서 춤추는 작은 촛불을 건드리지 않을려고 조심하면서, 얇은 종이를 펼치는동안 떨리던 손이 안정된다. 손에 쥔 것은 다름아닌, 두 친구 사이의 약속이 자아낸 동화의 해피 엔딩이 담긴, 이야기의 마지막 페이지.

통제할 수 없는 힘에 가로막혔지만, 몇번이고 계속해서, 단 한번의 실패도 없이, 다시 만날 수 있었던 왕자님과 공주님의 이야기.

흔해빠진 이야기지만, 그래도 약속했으니까.

촛불에 종이를 가져다 대니, 종이는 불길에 휩싸여 검은 재로 변해서, 화마가 자신에 단어를 집어삼키는걸 바라볼 동안, 열기는 예리하면서도 기묘할만큼 안심이 되는 온기를 발산한다. 행복해야 하는데, 만족과 안도의 파도가 몰려와 자신의 생각을 비춰서, 씁쓸한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안에 담긴 말들은 마음과 영혼간의 정교한 균형을 이뤄서, 그 어떤것도 대신할 수 없는 힘을 가져온다.

틀림없이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무기리라.

하지만 수백 수천 가지의 만약의 마지막 페이지를 바라보자, 전생의, 현생의, 내세의 해피엔딩의 마지막 글자가…마음과 영혼을 쏟아부은 글자가, 그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소비될 동안, 불현듯 깨닫는다:

말에는 힘이 있다고 하지만, 아무리 강한 힘이라 하더라도, 절대 현실을 바꿀 수는 없다.

왜 그말이 옳다고 믿었는지 이젠 모르겠다.


“……”


“…어째서?”




어째서 이 일이 일어나야만 하는 거지?


어째서 이 세상은 이렇게 잔인한 거지?


어째서 그렇게나 밝고 찬란하던 존재가 세상에서 뜯겨나가야만 하는 거지?


어째서 이 마음의 공허함을, 애초에 처음부터 아무 상관 없었다는듯이 사그라들거였으면, 채워야만 하는 거지?



“보고 싶어…” 떨리는 숨결 사이로 새어나가는 한 마디. 온 몸에 퍼져나가는 모든 떨림은, 그동안 필사적으로 무시하려 했던, 깊어져만 가는 외로움을 강조할 뿐이다.

바로 그 순간, 마치 겐타로의 현 상태를 비추듯이, 어쩌면 비웃듯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옷이 비에 푹 젖어,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가 더해져서, 이미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더욱 떨게 한다. 하지만 움직이려는 기색조차 내지 않고, 빗방울이 뺨의 습기와 섞이도록, 고개를 살짝 기울이기만 했다-만에 하나, 이 상태로 가능한 한 오래 있는다면, 고통도 비에 씻겨나갈 수 있는걸까.

하지만 비는 갑자기 멈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주변에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는다.

흐릿한 시야 너머, 무언가가 거무튀튀한 회색을 막아서, 초점이 점차 돌아오자, 다시 한번 익숙한 파란색과 분홍색이 눈에 들어온다-

“…여긴 어떻게…?”

질문을 내뱉으면서도 소매에 다시 얼굴을 파묻는다. 둘다 질문을 들었다고 확신할 수 있지만, 둘 중 한명도 대답하지 않는다-대신, 억센 손과 가는 손이 어깨를 잡고, 품안으로 잡아당기더니 꼬옥 껴안아서, 그리워하던것도 잊어버렸던 온기에 둘러쌓인다.

그러자 말없이 인정하는 콧노래만이, 마치 겐타로에게 우리가 있음을 상냥하게 일깨워주려는 것처럼, 공백 내에 감돌아서, 어느덧 이미 오래 전에 부서졌어야 했을 둑에 마지막 금이 간다.

파도가 부서진다.

한참 동안 그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으면서, 이 임시적인 은신처 내의 둘의 존재에, 오직 고른 숨소리와, 떨어지는 빗방울과, 거의 하나되는 심장 박동만이 한데 어우러질동안, 겐타로의 흐느낌은 시나브로 소리없는 딸꾹질이 되고, 드디어 떨림이 멈춘다.

그리고 현실이 존재한다는게 여전히 고통스러울지라도, 이제 자그마한 온기가 퍼져서 공백을 채워나가기에, 본능적으로 안식을 찾아서 품 안으로 깊이 파고들동안, 영겁같던 시간동안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가 피어나고, 겐타로는 혼자가 아니라는걸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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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https://archiveofourown.org/works/15763491

Thank you so much for beautiful masterpiece and permission to translate it, Maina!

원제는 'Reflected in Our Eyes'


이젠 세는거도 슬슬 지치지만, 40페이지, 7000단어, 공백포함 30435자, 공백미포함 23774자라는 신기록을 또 세웠네요. 하핫!

제발 당분간은 깨지지 않을 기록이면 좋겠습니다


액자식 구성+대구對句+동화풍 압운법이라는 말이 안되는데 되는 삼신기 크로스. 번역러 인생에서 신세계를 보았습니다

여전히 망한 캐해석. 영어로는 겐타로 특유의 말투를 살릴수 없으니까...는 그냥 핑계

후반부 절반을 차지하는 난해한 문체는, 동사의 사용을 최대한 배제하고 주어를 수식하는 형용사/분사 위주의 문체는, 나름의 개성이랄까, 상황을 한장 한장 사진처럼 찍어 앨범을 만드는 것처럼 서술한다는 거창한 해설...도 그냥 핑계(죄송하지 않지 않지 않습니다)


긴말은 안할게요. 다이겐은 참사랑을 하고 있다 이것만 기억해 주세요!


첫번째 영상은 겐타로가 아주 어렸을 때 찾아왔다.  


항상 최고의 웃음과 미소를 선사했던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사랑했다. 그래서 스스로 이야기를 짓고 싶었다. 바로 그 순간, 머릿속에서 한 편의 동화가 너무나도 빨리 펼쳐졌다, 마치 꿈의 한 장면처럼:


(제 1장. 공주님과 무사님)


옛날 옛적에, 공주님과 무사님이 있었습니다.


공주님은 왕국에서 가장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변 귀족들로부터 잔혹한 솔직함으로 존경받았고 백성들로부터 순수한 진실됨으로 찬양받았죠. 그리고 공주님은 진실을 말하는걸 좋아했습니다. 사실인 걸 부정할 이유를 찾지 못했거든요. 어쩌면 진실을 말하는건 공주님의 일종의 재능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마치 그들의 삶을 다룬 소설을 한장한장 넘기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쉽게 읽을 수 있었던 것처럼요.


무사님은 왕국에서 가장 주의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동료 무사들로부터 신중한 전략으로 존경받았고 서민들로부터 무사도 정신으로 찬양받았죠. 그리고 무사님은 안전책을 따르는걸 좋아했습니다. 불필요한 위험을 무릎쓰는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거든요. 어쩌면 안전책을 따르는건 무사님의 일종의 능력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마치 카드 게임을 하는 것처럼 위험과 확률을 쉽게 계산할 수 있었던 것처럼요.  


그래서 운명의 붉은 실은 둘을 한데 묶었습니다. 왕국 최고의 무사에게 사랑스러운 공주님을 지키게 하는건 지극히 당연했으니까요. 유능하고 믿음직스럽고, 완벽한 무사님에게 왕국의 가장 소중한 보물인 공주님과 미래를 맡기는건 지극히 당연했으니까요.


하지만 겐타로가 새로 찾은 작문의 뮤즈에게 이야기를 계속해달라고 몇번이고 간청해도, 동화는 끝나가는 노래처럼 단호하게 끊겼다. 자신이 직접 쓴 이야기를 하길 기대했다가, 머릿속에서 이야기를 끝맺지 못하자 실망에 볼을 부풀리고, 결국엔 포기하고 다른 이야기를 쓰겠다고 마음먹은걸 기억했다. 아예 새로운 이야기를 처음부터 지어내는건 훨씬 어려웠지만, 그래도 최소한 끝맺을 수는 있었다.


첫번째 이야기는 머릿속에서 더욱 생생했던걸 기억했다. 멈춰서 자신을 우울하게 한건 화났지만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야기를 써내리고선 어린 나이에는 최고라고 생각했던 “공주님과 무사님”이란 유치한 제목을 붙였다. 꿈이 다시 되풀이되지 않을 때를 대비해서, 제목을 잊지 않도록 연필을 꾹꾹 눌러 적었다.   


만의 하나 다시 반복되지 않았다 해도, 절대 잊어버리지 않았다는걸 깨닫는건 한참, 한참 후의 이야기.


두번째 영상은 겐타로가 평범한 날에 집에 있었을 때 찾아왔다.


자신을 입양한 노부부는 방 건너편의 소파에 앉아있었다. 그대로 깜빡 잠들 것처럼 서로 껴안은채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잠들었다고 말하기엔 너무 활짝 웃고 있었다. 그리고 겐타로는 그들의 웃음에서, 그들이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는지를,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강한지를 읽어내었다. 바로 그순간 그리고 그곳에서 영감의 폭발이 -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 해일처럼 덮쳐왔다.


(제 2장. 마음의 즐거움)


무사님은 공주님의 근심 걱정 없는 태평함이 걱정되었습니다.


마치 전쟁 중인 두 나라 중 한 나라의 공주님이 항상 무사해야 한다는걸 알지 못하는것 같았거든요.


마치 처음부터 호위무사가 따로 임명되었다는게 얼마나 막중한 상황인지 깨닫지 못하는것 같았거든요.  


마치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공주님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는걸 유념하지 못하는것 같았거든요.


그리고 마치 공주님이 중요하다는걸, 정말로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는걸 이해하지 못하는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공주님이 그렇게 행동할 때마다 체념한듯 한숨을 내쉬고선 다시 설명하려는 헛수고를 들였습니다.


공주님은 무사님의 극도의 헌신이 우스꽝스러웠습니다.  


당연하다는 듯이 정원에서 산책할 때마다 손을 잡고 호위할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당연하다는 듯이 계단을 내려올 때마다 안겨서 내려올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당연하다는 듯이 침실로 돌아갈 때마다 좋은 꿈 꾸라고 말할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호위무사라고 해서, 문자 그대로 목숨을 바쳐서 지키고 싶어하는 것처럼, 열정으로 불타는 눈을 할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무사님이 그렇게 행동할 때마다 태평한듯 웃고선 그 걱정을 가볍게 떨쳐냈습니다.


재밌어서, 맘에 들었다고 말할 수 없을 때까지 공주님은 웃고 또 웃었습니다.


머릿속에서 영상이 끝나자, 겐타로는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걸 드디어 눈치채자 팔을 벌려서 안기기를 재촉하는 부모님을 보았다. 그러자 재빨리 달려들어서 품안에서 녹아내렸다. 그대로 그곳에서 잠들어버린걸 기억했다.


그날 오후 할머니의 이부자리에서 깨어났다. 이불에서 기어나와서, 크레파스와 종이를 찾아서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을 그려보려고 했다. 공주님의 머리를 자신과 똑같은 갈색으로 칠한걸 기억했다. 무사님의 어두운 머리를 칠하려고 검은색 크레파스를 찾아서 온 집안을 이 잡듯 구석구석 뒤진걸 기억했다. 이미 공주님의 머리를 크레파스로 칠했으니까 잉크를 쓰는건 결사 반대한걸 기억했다.


마지못해서 검은색 대신 파란색 크레파스를 집었던 걸 기었했다.


세번째 영상은 겐타로가 학교 첫날을 맞이했을 떄 찾아왔다.


별로 현실에 머무르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현실의 사람들이 밀쳐낼때 환상의 나라로 빠지는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영감의 파도에 휩쓸리도록, 원하는 대로 정처없이 떠돌도록, 그저 흐름에 몸을 맡겼다.


(제 3장. 우리의 눈에 비친 것)


어느 날, 공주님은 서로의 눈에 무언가가 비친걸 눈치챘습니다.


만약 거울에 비친 자신을 조금만 더 오래 바라만 봤어도 눈치챘겠지만, 그런 유형의 사람은 아니어서, 대신 가족들의 초상화가 걸린 복도를 걸을때 비로소 눈치챘습니다. 캔버스를 가로지르는 붓놀림의 질감에 감탄하다가 그림속의 자신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공주님의 눈은, 무사님의 눈에 비친 색으로 빛났습니다.


완전히 동일한 색조는 아니었지만, 틀림없이 똑같은 색상이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빙그르르 돌아서 재빨리 왔던 길을 다시 걸어 내려오면서 치맛단을 살짝 들어올렸습니다. 무사님은 곁에 바싹 따라붙어서 박자를 놓지지 않고 걸음을 맞췄습니다. 공주님은 처음엔 전광일뿐, 아무것도 아닐 거라고 가설을 세웠지만, 기억을 되살리자 이 빛깔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눈에 선명히 서려 있었고, 자랄수록 더욱 밝아진걸 눈치챘습니다.


잔뜩 걱정되어서, 무사님은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공주님은 미소지으면서 발견한 걸 무사님에게 말해줬습니다. 하지만, 무사님은 조금 전 공주님이 그랬던 것보다 극구 부인했습니다. 확인해보려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아도, 단순히 서로의 눈 색이 반사된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도, 공주님의 초상화는 정반대의 것을 말하고 있다는 걸 보면서도 계속 그렇게 말한다는건…


불현듯 공주님은 무사님이 좀 바보같다는걸 깨달았습니다.


둘의 시선이 우연히 다시한번 마주치던 나날, 둘의 거리가 가까웠던 나날, 너무 오래 서로를 바라보던 나날이 지나고 나서야 무사님은 비로소 전광이나 반사광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어느 날, 드디어 무사님은 공주님 말이 맞다고 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일지 속으로 궁금해하면서요.


바로 그 날, 공주님은 서로가 천생연분일지도 모른다고 농담했습니다.


어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그 생각에 정말 행복하게 들릴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는데 말이에요.


그리고 무사님이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는데 말이에요.


펜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머릿속에서 영상이 끝나자 비로소 현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눈치챌수 있었다. 쨌든 본인이 시작한 이 흥미로운 이야기는 본인이 원할 때마다 끝났으니까. 펜을 집어올리면서 궁금해할 수 밖에 없었다. 혹시 나도 천생연분이 어딘가에 있는걸까?


씁쓸한 웃음과 함께 그 생각을 즉시 떨쳐냈던걸 기억했다. 만약 그렇다면 뭘 하려고? 자신의 색을 찾아서 학우들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려고?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 사람을 찾아서 시부야 길거리를 방황하려고? 애초에 허황된 이론이었으니까 그 망상을 포기한걸 기억했다. 물론 눈 색이 겹치는 경우는 이 세상에 차고 넘쳤으니까, 이런 천생연분 이야기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은… 바보나 다름없을테니까.


네번째 영상은 겐타로가 교실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때 찾아왔다.


지금처럼 평화로운, 일이 없는 방과후였다. 이런 시간을 글을 쓰는데 전념해서, 지금쯤은 취미가 되어있었다. 저녁놀을 바라본땐 곁에 있는게 영감의 파도뿐이어도 충분했다.


(제 4장. 진실의 순간)


호위무사가 필요없을 때마다, 무사님을 찾았습니다.


홀로 남겨졌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무사님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저 누군가가 옆에 있기를 바랄 때마다, 무사님을 떠올렸습니다.


주변에 호위무사가 있는게 익숙해진걸까요?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무사님이 위험천만한 임무를 완수하러 떠날 때마다, 무사님이 끝없이 걱정되었습니다.


다른 무사들이 시중들 때마다, 무사님이 격하게 그리워졌습니다.


만약 자신이 교체된다면 어떨까요, 라며 무사님이 농담할 때마다, 무사님을 위해 맞서 싸우고 싶다며 소원하였습니다.


깨달았습니다. 주변에 호위무사가 있는게 익숙해진게 아니라는걸요.


무사님이 있는게 익숙해진거였어요.


아니,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난데없이 서로의 눈이 마주칠 때마다, 천생연분 일지도 모른다면서 농담한걸 떠올리면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었습니다.


우연히 서로의 손이 스칠 때마다, 손가락을 엮고 싶다고 생각하면 뺨에 온기가 퍼졌습니다.


무사님에게 수호되어 팔에 안기고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심장이 콩닥거리다가 터져 버려도 좋으니까 이 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이라는 소원을 품었습니다.


아니, 그건 옳은 답이 아니었습니다.


깨달았습니다. 무사님이 있는게 익숙해진게 아니라는걸요.


왜냐면 지금, 익숙하지 않은 것마저 찾고 있으니까요.


겐타로가 혼자 있을때마다 이야기가 함께했다. 이렇게 방과후 뿐만이 아니라, 점심시간, 일터까지 걸어갈 때, 다른 사람이라면 친구들과 함께할 주말까지 – 다시 말하지만, 혼자 있을 때마다 이야기가 함께했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보냈다.


공주님과 무사님은 자신을 미소짓게 만드는 최고의 이야기였다. “망설임과 정직함의 설화”가 더 나은 제목일거라고 생각하면서 미소지었던걸 기억했다. 완벽한 제목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웃었던걸 기억했다. 맞다, 그 이야기 덕분에 때때로 웃을 수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외로웠다.


섯번째 영상은 겐타로가 친구따윈 필요없다면서 내민 손을 쳐낸 지 오래 지나지 않았을때 찾아왔다.  


자신의 행동의 여파에 홀로 남겨지자 수만가지 생각과 감정이 눈보라처럼 정신없이 몰아쳤다. 답변에 대한 타당한 해명. 그 소년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자신을 납득시키려 했던 시도. 두번째 거짓말을 내뱉었다는 참담한 자각. 그리고 자신이 쓴 이야기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들과 정직한 사람들과 천생연분-


(제 5장. 기구한 운명)


공주님과 무사님이 사랑에 빠지는 건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둘의 사랑은 덧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아니, 그렇게만 보였습니다.


왜냐면 사람들이 공주님을 봤을때, 사랑에 빠진 모습에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진실이 담긴걸 눈치챘거든요. 공주님이 천개의 태양을 품은 미소로 무사님을 바라볼 때 그 사랑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악역이 될 수 는 없었습니다. 절대로, 그 광채를 파괴하는 악이 될 수 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신, 말할 수 없는걸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무사님을 봤을때, 무사님이 호위하는 모습에 오직 진심에서만 우러나올수 있는 정성이 담긴걸 눈치챘거든요. 무사님이 천개의 불꽃을 품은 열정으로 공주님을 바라볼 때 그 사랑을 갈라버리는 악역이 될 수 는 없었습니다. 절대로, 그 불꽃을 눈물짓게 하는 악이 될 수 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신, 서로 사랑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하지만 이것 말고도 공주님과 무사님에 대한 이야기는 많았습니다.


어쩌면 둘은 찰나의 순간 만나고 결국에는 다시 헤어지게 될 견우별과 직녀별 이었을까요.


-자신이 창작한 수많은 인물들, 선량하고 자신이 방금 한건 절대 하지 않을 인물들을 떠올렸다.

곧바로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뒤돌아보았던걸 기억했다. 그 소년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어떻게 말할수 있었을까? 그 소년에 대해서 뭘 알고 있긴 했었나? 친구가 되겠냐고, 정말 친절하게, 물어본것 말고 또 뭘 알았지? 몇마디만으로 세계에 빛을 가져다 준것 말고 또 뭘 알았지? 그리고 호의를 거절하자 미소가 사라지더니 고개를 푹 숙인채 떠난것 말고 또 뭘 알았지?


어쩌면 자신처럼, 쓸쓸하고 외로운 걸지도 모른다는 것만 알았다.


그 소년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게 전혀 아니란걸 깨달았다.


머리카락 몇 가닥을 만지작거리다가 이야기 속의 공주님을 떠올린걸 기억했다. 그렇게 진실된 사람하고 자신은 머리색을 공유할 자격조차 없다며 씁쓸하게 자책한걸 기억했다.


“사려깊고 진실된”이라고 제목을 새로 지었다. 그 자체로 빛이었던 소년을 떠올리게 되는 제목이었다.


여섯번째 영상은 겐타로가 병원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갈때 찾아왔다.


어째서 세상이 그렇게나 밝은 사람을 가둬두려고 하는지 절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단념하며, 삶의 불공평한 사실을 규탄하고선 정의와 해피엔딩이 나오는 이야기를 짓고 또 지었다. 친구를 울게 한 진실과 친구를 웃게 한 거짓말 사이에서, 어느 세계가 옳고 어느 세계가 그른지를 정의내리는 싸움이 아니였다. 머릿속에서 지어낸 이야기와 멋대로 떠오르는 이야기 둘다 파도처럼 몰려와서, 현실의 기슭에서 떠내려가게 휩쓸었으니까, 그 사이에서 떠돌도록 흐름에 몸을 맡겼다.


(제 6장. 거짓말의 시간)


만약 공주님을 한 마디로 정의해야 한다면, 단연 정직하다는게 아닐까요.


공주님은 자신의 감정에 정직했습니다. 물론 마음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의 감정에도 정직했죠. 정말, 정말로 정직해서, 눈먼듯이 마음가는대로 발걸음을 옮기다가, 무사님에게 완전히 맡길려고 결심할 정도로 마음을 키웠습니다.


무사님을 향한 감정에 정직해서, 넘처흐르는 마음을, 어느날 전부 쏟아부었습니다.


만약 무사님을 한 마디로 정의해야 한다면, 단연 신중하다는게 아닐까요.


무사님은 공주님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할려고 신중했습니다. 물론 공주님의 감정에 반응할때도 신중했죠. 정말, 정말로 신중해서, 공주님의 심장을 조심스럽게 손에 품었다가, 자신의 심장과 함께 뛰게 할 정도로 박동을 외웠습니다.


공주님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신중해서, 잠시동안 사실은, 똑같은 감정을 품었습니다.


사랑의 날의 밤, 공주님은 여태까지 그랬던 것중 가장 정직했습니다. 자신의 사랑은, 무사님을 위해서, 꼭 구현하고 싶은 진실이라고 결정내렸습니다. 그래서 손을 잡고, 눈을 바라보고-밤동안 곁에 있어달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사랑의 날의 밤, 무사님은 여태까지 그랬던 것중 가장 신중했습니다. 자신의 사랑은, 공주님을 위해서, 감당할 수 없는 도박이라고 결정내렸습니다. 그래서 손을 빼내고, 눈을 피하고-공주님을 방에 홀로 두고 떠났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주님은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었습니다. 둘 사이에서 감정이 피어났다고 확신한게 진실이었을까요? 아니면 무사님이 방금 말한, 공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게 진실이었을까요?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사님은 최선의 선택을 한건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공주님을 지키기 위해 상처입히는 위험을 무릎써야 했을까요? 아니면 그 무엇보다도 공주님을 사랑하니까, 공주님을 지켜야 한다는 임무와 타협하는 위험을 무릎써야 했을까요?


만약 공주님과 무사님을 한 마디로 정의해야 한다면, 단연 오늘밤 두사람의 별이 드디어 만났다는게 아닐까요.


첫번째 이야기가 전개하기로 결정한 비극에 겐타로는 눈만 깜박거렸다. 친구도 공주님과 무사님이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어할까 생각하다가, 해피 엔딩으로 끝나면 말해주기로 다짐했다.


친구를 위해서–그리고 나중엔, 업으로 삼아서-이야기를 지으면서, 머릿속에서 훨씬 많은, 수천수만 가지의 영상을 겐타로는 보았다. 마치 전생의 기억같던 공주님과 무사님의 영상과 순수하게 만들어냈다고 확신한 다른 이야기들에서 나온 영상이 한데 어우러져 섞이던걸 기억했다. 작문 실력이 어떤 착상이라도 능숙하게 머릿속에서 그림으로 그려낼 정도로 발전한건지 궁금해한걸 기억했다.


틀림없이 이야기가 너무나도 엉터리였기 때문이였겠지만, 친구에게 누려야 마땅할 행복을 가져다주는 이야기를 작성할 수 있는 재능의 축복을 내려준 신님께 감사해한걸 기억했다. 마치 전생의 기억처럼 느껴질 정도로 생생한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는 재능에 감사해한걸 기억했다.


다음으로 찾아온 영상은, 첫번째 이야기를 들려준 뮤즈가 마치 마법과도 같아서, 다른 것과 착각하면 안된다는걸, 착각할수 없다는걸 겐타로에게 일깨워 주었다.


일곱번째 영상은 겐타로가 플링 포세에 가입했을때 찾아왔다.


다른 멤버들을 만난 바로 다음 순간, 혼자 남겨진 바로 그 순간에 찾아왔다. 지난 영상에서는 느끼지 못한 강렬함과 함께 닥쳐왔다: 마치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마치 잊어버린 시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마치 그 기억이 사그라들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제 7장. 치명적인 결점)

적국은 이 순간만을, 왕국 최고의 무사가 공주님을 구하기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불가능한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마침내, 비열하고 음흉한 계략이 성공했습니다. 한밤중에 공주님은 납치당했습니다.


무사들이 눈치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있었죠.


공주님을 잃는건 희망했던 것보다 훨씬 더 쉬웠습니다. 너무 신중하다는건 알았지만, 어느날 그게 위험을 초래할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공주님께 다가가고 싶었는데, 노력했는데, 몇번이고 노력했는데, 정말 노력했는데, 둘 사이의 거리 때문에 전혀 그럴수 없었습니다.


무사님은 위험을 무릎쓰는 법을 절대 배우지 않았습니다.


이제 온 나라가 값을 치르게 되었으니, 틀림없이 무사님의 잘못이었죠.


공주님을 심문하는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덜 어려웠습니다. 너무 정직하다는건 알았지만, 어느날 그게 재난을 초래할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왕국의 비밀을 지키고 싶었는데, 노력했는데, 몇번이고 노력했는데, 정말 노력했는데, 솔직한 반응 때문에 전혀 그럴수 없었습니다.


공주님은 거짓말하는 법을 절대 배우지 않았습니다.


이제 온 나라가 고통받게 되었으니, 틀림없이 공주님의 잘못이었죠.


처음에는 둘을 한데 묶었던 두사람의 최고의 특징이, 분명한 특징이, 타고난 특징이 이젠 둘을 갈랐습니다.


하지만 후회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있었죠.


새로운 동료들과 함께 있으면서, 익숙함이… 들었다. 영문을 몰라했던걸 기억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랬다. 단순히 시부야의 거리에서 자신의 이야기속 등장인물들을 이미 보았기 때문일까? 새로 찾은것 같아 보이는 이 불변성에서 더욱 나아간 기억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야기가 그랬듯 마법처럼 찾아와서 정말로 익숙하기 때문일까?


그만큼 별난 성격은 옷깃만 스쳐도 틀림없이 기억할거란걸 확신했으니까, 두 사람에 관한 기억을 더듬었던걸 기억했다. The Dirty Dawg의 전 멤버라고 들은걸 제외하면 아메무라 라무다에 관한 정보를 아무것도, 단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아리스가와 다이스에 관한 정보를 아무것도, 단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계속해서 공주님과 무사님의 영상이 회상을 방해했다.


여덟번째 영상은 겐타로가 새로운 동료들과 오후를 보낼때 찾아왔다.


다이스가 같이 도박하자고 라무다와 자신을 꼬드겼다가 환상적으로 패배한 다음 날이었다. 새 방에 누운채 머릿속에서 두 얼굴을 계속 재생하면서, 과거의 기억에 빠졌다. 변덕스러운 이야기를 떠올리면 늘 그랬듯이.


(제 8장. 첫번째 도박)


기밀 정보를 가져간 적군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였지만, 연인을 구하기 위한 각오로 불타는 무사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였습니다.


자신들이 불리한 점을 깨닫자마자, 무사님들은 작전을 바꿨습니다. 적군이 새로 찾은 이점을 약점으로, 이득이 되는 정보를 위험천만한 추측으로 바꿨습니다.


공주님을 어떻게 구했는지 무사님은 평생 잊지 못했습니다.


마치 세상이 단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원하는 것처럼, 둘의 사랑을 가로막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고 결정하기 전까지, 전쟁터의 폐허에서 둘의 눈이 마주친 걸, 서로를 향해 간절히 달려간걸, 입술이 느낀 재회의 맛은 완벽했던걸 무사님은 평생 잊지 못했습니다.


지금의 경우엔,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복수심에 불타는 칼을 든 적군이었습니다.


그순간 무사님에겐 시간이 한없이 느리게 느껴졌습니다. 선택지는 흑 아니면 백, 동전의 양면, 미느냐 아니면 당기느냐 뿐이었죠.


공주님을 가까이 끌어안은 다음 돌아서서 적군을 상대할 수 있었지만, 만의 하나 적군이 더 재빨리 움직여서 공주님을 다치게 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아, 그렇다면, 더이상 조심할 필요 없겠네요.


만약 공주님을 밀쳐낸다면, 공주님은 다치지 않겠지요. 그래서 무사님은 그것 외의 다른 사실은 신경쓰지 않으면서 그대로 했습니다. 설령 그러다가 칼끝에 가까워지게 된다 하더라더요.


옆구리를 찌른 칼은 무모함을 꾸짓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것이 순식간에 스쳐지나가서 고통스럽게 흐리멍텅해지는것 같았지만, 여섯가지 기억은 평생 또렷하게 기억에 남았습니다.


하나, 원수를 갚으려고 칼을 꺼내든 공주님을 기억했습니다.


둘, 재빨리 곁으로 달려와서 울부짖고, 사과하고, 간청하고, 제발 곁에 있어달라고 빌던 공주님을 기억했습니다–


셋, 이 감정을 기억했습니다. 공주님을 사랑한다는걸, 정말 많이 사랑한다는걸요.


넷, 이렇게 생각한 것을 기억했습니다. 아, 그날밤은 공주님의 곁에 있었어야 하는건데, 그랬더라면 공주님을 지킬 수 있었을 텐데.


다섯, 이렇게 생각한 것을 기억했습니다. 아, 조심하는 대신 도박을 했어야 하는 건데, 그랬더라면 지금 공주님이 슬퍼하지 않을 텐데.


여섯, 후회한 것을 기억했습니다. 만약 좀더 무모했더라면, 공주님의 곁에 있을 수 있었을텐데, 만약 세상에서 가장 무모한 사람이었다면–


공주님의 품에서 마지막 숨을 거둔 순간, 그것이 바로 무사님의 마지막 소원이었습니다.


겐타로는 차오르기 일보 직전인 눈물을 닦아 내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읽다가 운 적은, 자신의 이야기속 인물들에게 공감돼서 운 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어째서 공주님의 눈물을 대신 흘리고 있는거지?


최근 들어 영상들이 빨리 찾아오는게 조금은 즐거웠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되었던걸 기억했다. 이번건 특히 이야기의 끝을 향해 서두르는 것 같았다. 끝없는 여정에서 거짓말만 채집할 줄 알았는데, 이 마법같은 이야기가 있었고, 친구와 친구를 미소짓게 만들 임무가 있었고, 팀과 목적이 있었고, 그중 어느 하나라도 멈추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


마지막 영상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찾아왔다.


아홉번째 영상은 오늘로부터 조금 전에 찾아왔다.

오늘 아침 곤경에 처한 자신을 도와달라는 다이스의 전화를 받았다. 그래도, 자신의 상황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겐타로가 뭘 해줘야할지에 집중하긴 했다.


다이스가 필요한 것만 전부 알려줬으니까 별도의 해명은 필요 없었다. 그래서 현관을 나서기 전 돈다발이 두둑히 든 가방으로 무장했다. 그러자 길을 걷는 도중 영상이 들이닥쳤다-


(제 9장. 첫번째 거짓말)


왕실 무사들의 죽음은 온 나라를 절망에 빠지게 했지만, 사랑하는 국민들과 진정한 사랑을 잃은 공주님의 비탄에 비교할 수 는 없었습니다.


공주님이 성공적으로 구출되어서 국민들은 크게 안도했지만, 공주님 본인은 그 누구도 자신의 귀환을 축하하는걸 원치 않았습니다. 살아있음에 감사했지만, 국민들의 죽음은 그 감사를 죄책감으로 바꿨습니다.


무사님이 자신을 어떻게 구했는지 공주님은 평생 잊지 못했습니다.


절대 잊지 않을거란걸 확신했습니다. 고독의 나날이 지나도, 애도의 다달이 지나도, 비탄의 해들이 지나도-다음 생에서도, 절대 잊지 않을거란걸 틀림없이 확신했습니다.


이제 세상이 뭘 바라는 걸까요? 이제 더이상 의미없는 이야기에서 무슨 역할을 연기하길 원하는 걸까요?


무사님이 죽었을때 공주님의 세계도 멈췄습니다. 오직 왕국이 기대하는 의무만을 이행하기 위해 기능하면서, 공허하지만 무거운 마음으로 남은 나날들을 살아갔습니다.


공주님은 모두가 눈치챘고, 모두가 걱정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왜냐면 당연히 그럴 테니까요. 하지만 어느날 괜찮냐는 질문을 받았을때, 공주님은 모든걸 한꺼번에 깨달았습니다: 괜찮지 않더라도, 계속 슬퍼하고 싶더라도, 진실된 감정을 계속 느끼고 싶더라도, 괜찮아야 한다는 걸요-


아, 그렇다면, 더이상 정직할 필요 없겠네요.


만약 약점을 보여준다면, 온 나라가 공주님과 함께 무너지겠지요. 그래서 공주님은 그것 외의 다른 사실은 신경쓰지 않으연서 거짓말했습니다. 설령 그러다가 마음의 문을 영원히 잠궈버리게 된다 하더라도요.


곧 닫아버릴 마음을 치유하는 대신, 그리고 슬슬 발걸음을 옮기는 대신 공주님은 즉시 왕국에게 필요한 지도자로 변했습니다. 왜냐면 보다시피 여전히 이 이야기의 공주님이었으니까요. 왜냐면 보다시피 여전히 이 왕국의 미래였으니까요.


거짓말에서 재빨리 피어난 왕국의 높은 사기는 공주님의 부정직함을 비웃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공주님은 거짓말했고, 계속 거짓말했고, 거짓말에다 거짓말을 반복했습니다:


네, 괜찮아요. 아뇨, 걱정할 필요 없어요.


네, 밤마다 우는거 아니에요. 아뇨, 슬퍼하는거 아니에요.


네, 이웃 나라의 왕자님을 사랑하니까요.


뇨, 왕자님의 나라와 동맹을 맺는다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에요.


네, 공허한 마음에 죄책감이 넘처흐르더라도 살고 싶어요.


아뇨, 지금 이대로도… 행복해요.


인생이 전부 날조되어서 흐리멍텅해지는것 같았지만, 여섯가지 후회는 평생 또렷하게 기억에 남았습니다.


하나, 바로 그날밤 용기를 낸걸, 무사님에게 고백할 용기를 낸걸 후회했습니다.


둘, 천생연분일지도 모른다며 농담한걸 후회했습니다. 어쩌면 운명에 간섭했던걸까요.


셋, 그냥 무사님을 사랑한걸 후회했습니다. 최후의 순간에 구하지도 못했으면서 무책임하게 사랑한걸 후회했습니다.


넷, 이렇게 생각한 것을 기억했습니다. 아, 무사님이 곁에 있어서 좋았다고 한건 거짓말이었다고 했어야 하는건데, 그랬더라면 즉시 다른 사람으로 교체됐을텐데.


다섯, 이렇게 생각한 것을 기억했습니다. 아, 처음부터 거짓말했어야 하는건데, 그랬더라면 자신의 곁보다 훨씬 안전한 곳으로 보내졌을텐데.


여섯, 후회한 것을 기억했습니다. 만약 좀더 거짓말했더라면, 무사님이 살 수 있었을텐데, 만약 세상에서 가장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다면–


이 세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둔 순간, 그것이 바로 공주님의 마지막 소원이었습니다.


영상이 끝나자 자신의 마음을 단단히 굳혀야 했던걸 기억했다. 단순히 공주님과 무사님이 둘 다 죽었기 때문은 아니었지만, 왜 때문인진 몰라도 그 장면은 마지막처럼 느껴졌다. 그 전에 찾아오던 영상들에선 예상하지 못한 결망이었다. 마치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누군가의 최후의 기억처럼 느껴졌다.


그럼 정말 그런건가? 이게 정말 어릴때부터 써오던 이야기의 끝인가? 이게 정말 어린아이일 시절부터 머릿속에서 이야기를 속삭이면 영감의 끝인가? 이게 정말 모든 것의 끝인가? 생각만 했을 뿐인데도 마음 속에서 공허함이 자라났다. 그리고 이야기에 거짓말을 엮어 자아낸 실로 공백을 채울수 있기를 바랬지만, 절대로 완벽히 같지는, 절대로 그만큼 환상적이지는, 절대로 전생의 기억의 파편을 떠올리는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겠지.


그래도 어쩌면 이 비극적인 이야기가 막을 내린건 좋은 일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공주님과 무사님이 내세에서 재회한다는걸 암시한건 좋은 일일지도 몰랐다. 둘의 마지막 소원이 나름대로 희망차게 느껴졌으니까.


임시 제목을 “우리의 별들이 만나던 날”로 새로 고쳐 쓰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애써 참았다.


아무리 받아들이기 싫었어도, 이건 사실이었다. 오늘은 공주님과 무사님의 이야기의 끝이었고, 친구들과 천생연분과 연인들의 이야기의 끝이었다. 오늘은 둘이 서로를 위해 함께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겐타로와 다이스가 서로를 위해 함께할 수 있는 첫번째 날이라는걸, 겐타로는 한참 후에 깨닫는다.


[제 10장: 천생연분]


“야, 겐타로?”


겐타로를 무아지경 상태에서 깨울려고 눈앞에서 손가락을 흔들어 대는 다이스. 겐타로가 눈치채기까지 거의 일분 가까이 걸린것 같다. 드디어 눈치채자, 어리둥절해서 눈을 가늘게 뜨고 손가락 사이로 다이스를 보려고 하는 겐타로.


“음식 왔는데,” 손짓하는 다이스.


몇번 눈을 깜박이며, 식탁 위에 펼쳐진 진수성찬을 하나하나 눈에 새기는 겐타로.


“아, 그런가요.”


둘이 있는 곳은 다름아닌 고풍스러운 은은한 조명과 꽃향기나는 양초까지 완벽한, 미니멀 양식의 고급 전통 일식당. 다이스는 꿈속에서나 갈 수 있을법한 비싼 식당이다. 하지만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오늘은 겐타로가 난데없이 밥을 사주겠단다. 정말 운이 좋은 날이다! 그래서 음식에 대한 감사의 기도 말고도, 이게 일생에 단 한번 있는 일이 아니기를 바라는 기도를 추가로 올린다.


조용히 접시 위 허공을 젓가락으로 젓는 겐타로. 더욱 혈기왕성하게 저을 수 있지만 그러기엔 너무 배고픈 다이스. 하지만… 걱정할 수 밖에 없다. 며칠 전에 마천랑 녀석중 한명이 패션을 비웃자 겐타로는 정말 기겁했지. 다행히 여자들에게서 도망친 다음에는 훨씬 괜찮아 보였지만. 그치만 여기 올때부터 계속 멍때리고 있다. 아악, 친구가 이 상태일땐, 특히 바로 눈 앞에서 이럴땐, 절대 먼저 식사를 시작할 수 없는 다이스.


“괜찮아?” 입을 열고선 재빨리 덧붙이는 다이스. “뭔가 신경쓰이는 거라도 있어?”


“공주님과 무사님이요.” 거의 자동적으로 대답하는 겐타로.


짜증나서 찡그릴 수 밖에 없는 다이스. 만약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면, 그냥 그렇다고 말하면 될텐데. 기껏 사려 깊게 대하려고 했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도 아니고, 또 그놈의 전생 운운하면서 사람을 가지고 놀린다.


“야, 나 진지하거든-”


“저도 그런데요. 거짓말 아니었어요.” 마찬가지로 찡그린 얼굴로 말을 끊는 겐타로. 다이스와 식탁 사이의 지점을 향해 눈을 내리깔아서, 말해줄지 아니면 조용히 함구할지를 고민한다.


다이스는 다시 맞받아치기 일보직전이었지만, 겐타로의 진지한 표정과, 겐타로가 전부 계산한다는걸 불현듯 깨닫자마자 볼을 부풀리면서도 입을 다문다.


“정말로 공주님과 무사님을 생각하고 있었다니까요.” 말을 잠시 멈추고 손을 들어서, 아직 할말은 많이 남아있다는걸 알리는 겐타로. 하지만 이미 거의 입을 열기 일보 직전인 다이스. 겐타로는 말을 계속하기 전에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러니까… 이건 소생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계속 떠올리던 이야깃감이에요. 영상이 항상 기억처럼, 생생하고 선명하게, 떠오르곤 했죠… 주요 사건에만 한정되었지만요. 실제로 소설을 쓰려면 자세한 묘사를 여기저기 엮어야 하더라고요.”


고개를 들기 전 슬픈 미소를 짓는 겐타로. “마지막 영감의 파도를 오늘 아침에 받은것 같아요. 드디어 이야기의 끝에 다다른 걸까요. 그래서일까… 좀 감상적인 기분이 드네요.”


“오오…” 감명받아서 감탄하는 다이스. 어쩌면 정말 유메노 겐타로 다운게 아닐까. 마법처럼 영감을 주는 뮤즈가 정말 있었다니! 솔직히 겐타로의 랩 리릭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의심하긴 했지만서도.


씩 웃는 다이스. “그럼 넌 정말 글쓰기 신동 같은거야?”


“딱히 그런건 아니지만…” 부정하면서도 칭찬이 쑥스러운듯 내심 미소지어 보이는 겐타로.


친구를 기운내게 해주려는 임무를 나름대로 완수하자 더욱 활짝 웃는 다이스.


하지만 ‘공주님과 무사님이라면’…


다이스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머리를 긁적이는데서 무언가가 뒤숭숭하다는게 한마디 없이도 명백하다.


“아 근데,” 일단 입을 열고본다. “그러니까, 그거 무슨 드라마에서… 영감받았다거나 그런거 아니야?”


즉시 자부심과 자기방어심의 표정을 꺼내어 쓰는 겐타로.


“이건 순수창작 이야기 라고요,” 한마디로 끝난 선언. 다른말을 한마디로 꺼냈더라면 틀림없이 화나게 했으리라. 그치만 좀더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계속한다. “물론 아직은 종이에다 전부 옮겨적지 않았어요. 오늘 아침에 막 끝났는 걸요.”


그런거겠지, 만약 그렇게 말한다면. 고개를 끄덕이고선 눈앞에 펼쳐진 진수성찬으로 시선을 돌리는 다이스. 구운 고기 몇조각과, 생선 튀김 몇조각, 신선한 초밥 요리, 그리고 수많은 반찬. 모두 참을 수 없는 냄새와 함께 자기를 먼저 집어달라고 다이스에게 외친다. 그래서 당연하다는듯이, 젓가락으로 한번에 집을 수 있는 가장 많은 양을 담기로 해서, 또다른 질문을 던질때 겐타로를 쳐다보지도 않는 다이스.


“어떻게 끝나?"


하마터면 음식이 목에 걸릴 뻔한 겐타로. “뭐라고요?”


사실상 작가에게 미래의 작품의 내용을 미리 스포일러 해달라고 물어본 거나 다름 없다는 생각 대신, 오, 겐타로가 조금 털어놓으니까 기분이 좋아졌잖아. 그럼 계속 얘기해야지, 라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서 어깨를 으쓱하는 다이스. 아마도. 에이, 그냥 도박이잖아, 이거.


“그냥 그 얘기 더 하고싶어하는거 같아보여서, 별거 아냐.”


겐타로의 눈이 사탕을 받은 어린아이의 눈처럼 반짝이기 시작해서(예를 들면 아메무라라거나, 라무다라거나, 모 패션 디자이너라거나), 이번 내기는 틀림없이 이겼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한 다이스. 그러자 들어본 것중 가장 행복한 목소리가 낭독한다: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


그 말에 활짝 웃을수 밖에 없는 다이스. “와아, 그거 좋네-”


“거짓말이에요. 둘다 죽었어요. 서로의 치명적인 결점이 불러일으킨 비극에 가로막힌채 각자의 생을 마감했죠.”


젓가락에서 떨어져 무너지는 음식의 탑보다 훨씬 빨리 무너지는 다이스의 미소.


“그래도 나름대로 희망차게 끝난다고요,” 문자 그대로 다이스는 물어보지 않았더라도 말을 계속 잇는 겐타로. “왜냐면 무사님은 세상에서 가장 무모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죽고, 나중에, 공주님은 세상에서 가장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죽거든요. 그래서 다시 만날때-”


크게, 그리고 오래, 절규하는 다이스. “아아아아악 젠장 겐타로! 넌 왜 항상 이런 식인건데?!”


조용히 웃는 겐타로. “먼저 물어본건 다이스가 아니였나요? 소원을 빌때는 항상 조심해라, 그런 말이 있-”


“거짓말 안했다면서! 아무리 들어도 우리 얘기 같잖아! 또 전생의 인연 어쩌구 하는 헛소리로 낚는게 말이 되냐고오!”


“소생은… 뭐라고요?”


그 자리에 얼어붙은 겐타로의 휘둥그레해지는 두 눈. 잠깐만, 방금 그 암시를 스스로 눈치챈건가? 아니면 이번에는 내가 거짓말에 넘어가지 않아서 놀란 건가? 틀림없이 후자일 거라고 단정짓는 다이스, 그래도 어쩌면-알게 뭐야, 상대는 절대 읽어낼 수 없는 그 유메노 겐타로인데.


이번에는 짜증을 잔뜩 실어서 볼을 더 부풀리고 팔짱을 낀채 얼굴을 찌뿌리는 다이스. 잠시 동안 서로를 빤히 쳐다보며, 눈에 보이는 짜증 뒤에는 당혹스러움이 숨겨져 있을거라며 가정하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겐타로. 이젠 다이스가 차의 불빛과 맞닥뜨린 사슴처럼 꼼짝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을 차례다.


“뭐가 어쨌-”


“그럼 소생과 다이스가 ‘세상에서 가장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과 가장 무모한 사람?’ 이라는 건가요? 좀 감동인데요 다이스, 그렇게나 높게 평가할줄은 꿈에도 몰랐…”


훨씬 약오르는 표정을 장착하느라 잠시 말을 멈추는 겐타로.


“어쩌면 저희가 전생에서 연인이였다는 공상을 정말 좋아하나봐요?”


만화에서나 볼법한 기세로 머리를 세차게 긁적이고, 희미하게 화난듯 달그락거리는 주사위 소리와 함께 발을 쿵쿵 구르는 것 외에는 달리 반응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다이스.


그러나 겐타로는 아직 장난을 그만둘 생각이 없다는게 곧 밝혀진다. 다이스는 속으로 ‘공주님 목소리’라고 이름붙인 가성으로 말을 계속한다:


“세상에, 이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고 공주님을 때리실 건가요? 어라, 제 무사님은 절 지켜줘야 하는게 아니였나요?”


아.


그 한마디에,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서, 침묵하는 다이스.


이 ‘공주님과 무사님’ 이야기가 언급될 때마다, 꼭 떠올릴 수 밖에 없는게 있는데... 아악, 이게 왜 그렇게나 골치아프게 하는건지 겐타로에게 말해줘야하나 고민된다. 왜냐고? 솔직히 말하자면, 겐타로는 항상 솔직하게 털어놓아 줬으니까? 만약 이 가슴속 응어리를 풀어낼 수 있다면, 어쩌면, 만에 하나, ‘공주님과 무사님’ 이야기가 나올때마다 겐타로라면-


“어, 다이스?” 속삭임보다 아주 약간 더 큰 겐타로의 목소리. 다이스는 고개를 푹 떨구었지만 그래도 눈을 맞추려는듯 고개를 기울이는 겐타로.


“…때려서 미안,” 입을 연 다이스. “나… 다시는 안 그럴게.”


"걱정하지 마시어요. 아-” 실수로 공주님 목소리로 말했지만, 재빨리 평상시의 목소리로 바꿔 말을 잇는 겐타로. “전부… 잊어버렸는걸요.”


“먼저 말꺼낸건 너였는데?” 다이스의 미약한 반박.


“네. 하지만 그 감상은, 거짓말이 아니였어요.”


그 말에도 여전히 침묵하는 다이스. 머릿속 톱니바퀴를 열심히 굴려가며 선택지를 저울질한다. 그동안 끈기 있게 대답을 기다리는 겐타로. 몇 초가 지난 후, 다이스는 드디어 입을 연다.


친구에게라면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결정내린다.


“들어봐, 내가 왜 식겁해서 너를 쳤냐면…” 마음의 준비를 하려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지만, 이 일을 가지고 한창 놀릴 겐타로와 라무다의 모습이 떠올라서, 대신 다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잠깐만, 다른말 하기 전에, 이거 가지고 나 놀리지 않겠다고 약속해줘! 라무다한테도 말하면 안돼!”


“약속할게요,” 간단한 겐타로의 대답.


제길. 이건 거짓말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나? 전혀. 어쨌든 겐타로를 믿을건가? 당연한 소리. 겐타로가 항상 그러는 것처럼 거짓말로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대신, 그러기로 한 자신을 새삼스럽게 원망한다.


어쩌면 정말로 ‘세상에서 가장 무모한 사람’인걸까.


또다시 깊은 숨을 들이마시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는 다이스. 드디어 겐타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선-


“운명의 붉은 실 얘기 들어봤어?”


심각하다 못해 쓸데없을 정도로 진지한 얼굴.


고개를 끄덕이는 겐타로. “많이 들어봐서 익숙한 설화네요.”


“글쎄, 난 아니거든.” 어깨를 으쓱하고선 겐타로를 바라보는 다이스.


설명해달라는 말이란걸 눈치채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걸린 겐타로.


“아! 그거라면, 언젠가 맺어질 한 쌍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붉은 실로 연결되어 있다는 내용의 이야기인데-”


“어라, 잠깐만.” 의자를 바싹 끌어당겨서 테이블에 기대는 다이스. “어느쪽이야?”


“어느쪽이냐니 무슨 말인가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는 겐타로.


“그 실 말인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다이스. “눈에 보이지 않는거야? 아니면 빨개?”


“둘 다요.” 다시 끄덕이는 겐타로. “빨간색이지만,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죠.”


“뭐- 눈에 보이지 않으면 빨간지 어떻게 아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짓는 겐타로. 이내 천천히 눈을 감는다.


“어쨌든 그런 내용의 이야기예요, 다이스. 저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나요?”


재빨리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다이스. 그리고 이야기를 계속하는 겐타로.


“운명과 사랑의 실이라서 빨갛고, 만약 바로 눈앞에 있다면 그게 존재한다는걸 믿을 수 없으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이번에는 진심이라고 속아넘어갈수 있을법한 미소와 함께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겐타로. “새끼손가락에 묶여 있다고들 하죠.”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서, 대체 어떻게 하면 실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빨갈 수 있는건지 여전히 조금은 혼란스러운 다이스. 오만가지 잡생각들을 재빨리 떨쳐내는 겐타로의 목소리.


“다이스, 설마 그게 다였나요? 운명의 붉은 실 설화를 모르는건 그렇게 분위기 잡을 만큼 부끄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더욱 진해지는 겐타로의 눈웃음. 하지만 눈치채지 못한 다이스. “그리고 저희 둘다 이미 라무다는 덜 개인적일지 몰라도 훨씬 짜증나는 방식으로 들이대는거 알고 있잖아요.”


“아니, 그런게 아니라…”


드디어 이야기를 시작하는 다이스.


“그러니까, 내가 한번 도박하러 갔을때, 돈을 뿌리다시피 흥청망청 쓰던 얼간이가 있었어. 아마도 술에 찌든 부자였겠지. 게다가 자기 입으로 자기가 천재라는거야. 그러더니 도박장 한가운데에 ‘질문에 답해드립니다’ 뭐 그런 코너? 같은걸 세우더라. 줄서서 기다린 다음에 문제를 맞추면 낸 돈의 두배를 받는거였는데… 아악, 나도 알아, 내가 들어도 노잼이긴 한데, 쨌든, 그때 돈이 필요했거든?”


마지막 문장에 대한 겐타로의 반응을 꼼꼼히 지켜보는 다이스. 고맙게도 들은것만으로 자신을 판단하고 있는것 같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전혀 놀란것 같지 않다. 후유, 별건 아니였지만, 큰그림이 아무리 쓰레기 같더라도 평판은 온전히 보존하고 싶다. 그래서 겐타로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단어를 강조하고 가능한 한 많은 손짓을 곁들이며, 이야기를 계속 이어간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건지 1도 감이 안잡혔는데, 바로 그순간! 그 인간이 갑자기 가장 유명한 ‘천생연분 전설’이 뭐냐고 묻는 거야. 이건 진짜 자신 있어서 가진 돈을 모조리 쏟아부었거든!"


그때 느낀 스릴을 지금 다시 느끼는 것처럼 정말 흥분한 다이스. 살짝 미소짓는 겐타로. 겐타로도 이야기를 빨리 듣고 싶어하는거 같아서 조금 기운나는 다이스.


“그래서 그대로 했거든. 면상에 돈다발을 던지고 말했는데…”


온몸에 힘이 확 빠져버린것 같은 다이스. 같은 시각 연민으로 바뀌는 겐타로의 미소.


“운명의 붉은 실이 아니였나요?” 겐타로의 추측.


“으으으으응…” 그때 느낀 실망을 완벽히 재현해서 다시 볼을 부풀리는 다이스.


무모하네요.


무언가를 이해한듯 콧노래를 부르다가, 즉시 팔짱을 끼고 살짝 얼굴을 찌푸리는 겐타로.


“다이스,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인데요, 원래 주제에서 멀어진 것 같지 않나요?”


“아악… 아니 그게 아니라, 이제 막 이야기 하려던 참이었어!” 갑자기 하이텐션이 돌아오기라도 한것처럼 재빨리 똑바로 일어나 앉는 다이스. “그러니까, 그 뭐였더라… 그게 말이지-”


망설이는 다이스. 이 비싼 식당의 식탁간의 간격은 이상하리만큼 멀지만, 행여나 엿듣는 사람이 있을까 좌우를 살피고나서야 말을 계속한다.


“기억도 안날 정도로 오랫동안 꾸던 꿈이 있거든. 처음에는 전에 보던 재밌는 드라마에서 나온 장면인가 싶었는데, 계속 꾸면 꿀수록, 내 과거나, 아니면 어린애 시절때쯤의 중요한 기억같은거야. 그 있잖아… 생각만 해도, 심지어 팬티와 히프노시스 마이크 빼고 모든 걸 잃었을 때도, 웃음이 나오게 하는 그런거. 응, 바보같고 웃프지만 나한텐 그렇게 느껴져. 뭐랄까-”


“다이스, 그거 귀엽네요.” 겐타로의 한줄평. 틀림없이 웃었다고 확신하는 다이스.


“너… 너 안 웃겠다고 약속했잖아!” 보기 좋게 배신당해서, 겐타로의 코에서 불과 몇 센치 떨어지지 않은 곳에 비난의 삿대질을 해대는 다이스.


“비웃는 웃음에만 한정한거, 확실하나요?” 천진난만하다 못해 가짜인 티가 팍팍 나는 겐타로의 미소. “이건 지금까지 본 소생을 믿는 법중 가장 귀여운 방법이네요.”


“널 믿어? 흐음, 그거 도전과제 같은데.” 스릴 넘치고 짜릿해서 계속 시도하게 되는 도전과제, 라는걸 덧붙이고 싶은 마음은 딱히 들지 않는다. 손가락을 치우고 대신 팔짱을 낀다.


“그래도 계속하세요, 무슨 내용의 드라마였나요?”


꽃받침 자세라고 하던가, 귀여운 짓을 하려는 것처럼, 팔꿈치로 식탁에 기대어, 손목을 모은 다음에, 양손 위에 턱을 걸치는 겐타로. 그래도 납득할 정도로 충분히 흥미 있어 보여서, 말을 계속하는 다이스. 익숙한 목소리보다 훨씬 자그마한게 흠이라면 흠이다.


“…무사님과 공주님.”


조심스럽게 겐타로의 반응을 관찰하는 다이스. 의자에 기대더니 식탁 밑으로 손을 넣는다. 어쩌면 머릿속에서 한번에 너무 많은 퍼즐조각을 맞추려고 하는 걸까. 잠시 동안 둘 사이에 흐르는 침묵.


“그래서 소생의 이야기가 드라마에서 영감받은건지 물어본 거였군요.” 반쯤은 혼잣말인 겐타로의 대답. “왜냐면… 그 꿈이…”


“그러니까! 그래서…” 말을 계속 잇는 다이스, “너가 그게 우리 이야기인척 했을때… 둘을 가지고 노는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둘을 죽여서 비련의 연인으로 만든건 도움이 되지 않았지. 내 말은, 10화도 안되는 짧은 드라마였거든. 그냥 그렇다고…”


납치당한 공주님과 공주님을 구하려다 공주님의 품에서 숨을 거둔 무사님이 나오는 악몽은 이제 지긋지긋해서, 그 얘기를 꺼내서 더 떠올리고 싶지 않다.


“그래서, 어어… 미안.” 살짝 고개를 숙였다가 어리둥절 해져서 다시 드는 다이스. “잠깐만, 무슨 얘기 하고 있었더라?"


반응할 기색조차 없이 깜짝 놀란 겐타로. 아니면 다이스가 상상한 퍼즐을 머릿속에서 맞추는데 열중한걸까. 하지만 꺼내려고 했던 중요한 이야기가 갑자기 떠올라서 너무 신경쓰지 않기로 한다. 그걸 깨닫자마자 손가락을 튕기는 다이스.


“아 맞다! 드라마에서도 천생연분이었어. 좀 뻔한것 같지만.” 불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들떠서, 식탁 밑에서 요란하게 다리를 떨면서도 활짝 웃는 다이스. “근데 그걸 어떻게 눈치챘을거 같아?”


“글쎄요?” 말한다기보단 숨을 내쉰 겐타로, 그래도 다이스는 알아듣는다.


“눈 때문에!” 활짝 핀 다이스의 미소. “진짜 대박인게, 공주님의 눈은 무사님의 눈에 비친 색으로 빛났고, 무사님의 눈은 공주님의 눈에 비친 색으로 빛났거든! 그래서 천생연분은 눈 색깔 이야기라는 거에 올인했는데, 그 쉬운걸 틀려서 그렇게 기분 상한 적이-겐타로?”


건너편에서 숨쉬고 있는것 같지 않아보이는 겐타로. 다이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내내 단 한번도 눈을 깜박이지 않았다고 맹세할 수 있다. 그러다가 몸을 푹 숙이더니 떨기 시작한다. 맙소사.


“ㄱ-겐타로? 왜그래?!”


깜짝 놀라서, 겐타로 곁으로 시끄럽게 의자를 끄는 다이스. 안돼안돼안돼, 뭘 해야 하지? 의사 불러야 하나? 아니면 병원까지 데려가야 하나? 가장 가까운 병원까지 업고 달려가자! 지금 당장!


그대로 업으려는 것처럼 겐타로의 손을 자신의 어깨 위에 얹는 다이스. 그러자 머리 근처로 손을 반쯤 올리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겐타로. ‘기억,’ ‘당연히,’ 그리고 ‘바보.’ 이 세 단어만 가까스로 알아들을 수 있다.


“잠깐만, 무슨 말을 하려는-?”


그 말에 떨어지는 겐타로의 눈물.


“어어- 잠깐, 겐타로?”


겐타로에게 시선을 고정시킨채, 즉시 식탁에서 냅킨을 집어서 조심스럽게 겐타로의 뺨에 갖다 대는 다이스. 아, 몸이 자동 조종 모드로 바뀐 것처럼, 팔이 이 동작에 익숙한 것처럼 느껴진다. 주위를 딴 데로 돌리려고 ‘우정 아드레날린.’ 뭐 그런거라고 상상해본다. 촉촉히 젖어서 반짝이는 눈으로 다시 다이스를 바라보는 겐타로.


“아, 죄송해요, 괜찮… 아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가까스로 내뱉은 몇 마디.


거짓말쟁이.


찡그린 얼굴의 다이스. 단 1초동안이라도 납득하지 않고, 겐타로의 뺨에서 손을 치우지도 않는다. 퍽이나 괜찮겠다. 이 모든걸 보고도 어떻게 그게 거짓말이란걸 믿을 수 있겠어? 지금 문자 그대로 울고 있는데!


하지만 말을 계속하는 겐타로,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요? 그래서일까… 꽤 멋지네요, 천생연분이란걸 한눈에 아는게, 천생연분이 여기에 있다는걸 아는게- 그리고, 그러니까, 천생연분이란건, 눈 색으로... 아, 소생 걱정은 하지 않아도-, 다이스, 소생은 단지… 행복- 아, 감동받은거예요.”


마지못해 입을 열기전 겐타로를 관찰하는 다이스. “정말 괜찮은거 확실해?”


“이제 괜찮아요.” 그말을 하는 겐타로는 정말 기운을 차린것 같다. 훌쩍이면서도 평상시의 목소리로 계속한다. “어쩌면 운명의 붉은 실보다 더 나을지도 모르네요.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는 표시니까요.”


그 말에 다시 표정이 밝아져서 들뜬 다이스. “그치 그치? 네말이 다 맞아, 겐타로.”


그러고선 겐타로의 나머지 눈물을 전부 닦아낸다. 다이스가 뭘 하고 있는건지 마침내 눈치채자 뻣뻣해지는 겐타로.


“다이스, 소생이-”


“만약 정말 행복하고 감동받은거였으면 그렇게 울지 말았어야지.” 자신의 말을 내뱉자마자 무시하고선 대신 눈물을 전부 닦아내는데 집중하는 다이스. 겐타로의 얼굴이 아직도 빨간건, 조금 전에 운거 때문이겠지.


“아하하하, 글쎄요…” 미소를 지으면서 시선을 피하는 겐타로. “그냥 단순히… 당황한것 뿐인걸요.”


다이스가 만족한 뒤 직접 냅킨을 쥐는 겐타로. 도중 전에 그랬던 것처럼 서로의 손이 우연히 스쳤다–어, 정확히 언제였지? 기억을 더듬어보는 다이스. 아마 라무다와 셋이서 친치로를 할때였을거야. 응, 그때다.


이제 다이스에게 미소지어 보이는 겐타로. 뺨이 따뜻해질 정도로 전염성이 강한 온기의 미소여서 시선을 피할 수 밖에 없는 다이스. 하지만 겐타로의 조용한 목소리에 다시 바라보게 된다.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요, 다이스.”


즉시 다이스의 정신세계를 공격하는 생각. 우와, 오늘따라 정말 감상적인데! 근데 그거 아냐, 자신에게 묻는 다이스, 그거 아냐? 우린 친구잖아!


“헷, 당연한 소리! 나도 그래!”


눈끝을 찡그릴 정도로 활짝 웃는 다이스. 하지만 그 미소는 겐타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천천히 사라진다.


“어- 잠깐, 어디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설명을 대신 하려는 듯 다시 훌쩍이는 겐타로. 다이스의 찌뿌린 얼굴에 배웅하듯 살랑살랑 흔든 손. “소생이 없을동안 디저트 주문하세요.”


“같이 가줄까?”


“…”


왜 그걸 물어본건지 모르겠다. 아, 아직도 걱정된 건가? 아 잠깐만, 화장실에 같이 가줄까라는 말은 이상한데, 지금당장 설명, 아니 해명해야 되는데- 그리고 지금 겐타로는… 재미있어 하는거 같다? 마치 웃음을 참으려는 것처럼. 아 왜그러는 건데.


하지만 겐타로는 다이스가 예상한 것처럼 놀리지 않는다. 대신, 가볍게 웃고선 이렇게 말한다-


당연하다는 듯이 화장실에 갈때마다 호위할 필요는 없지 않나요?”


“…그러네.”


해명하려는 시도는 의미없겠지, 라고 다이스는 단정짓는다. 체념의 한숨과 함께 포기하고선, 다시 제자리에 털썩 앉는 다이스. 겐타로가 조심스럽게 건넨 메뉴판을 다이스는 작은 미소와 함께 받는다.


“곧바로 돌아올게요,” 곧바로 한마디를 덧붙인 겐타로. “주문한 음식 나올때까지 기다리세요.”


모퉁이를 돌아 화장실로 향하는 긴 복도 너머로 사라지는 겐타로를 바라보는 다이스.


대신 디저트를 고르는데 집중하려고 걱정을 가라앉힌다. 아까 전에는 겐타로가 생각해둔 며뉴가 이미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어서 메뉴를 자세히 볼 기회가 없었다. 맘에 드는 디저트를 나열하던 도중, 아무거나 환영한다는듯이 벌써 꼬르륵거리는 다이스의 배. 그래서 이젠 메뉴를 혼자서 훑어보고 있는… 와 잠깐만 가격이 좀 심각하게 많이 미쳤는데? 이 쓸데없이 정갈한 반찬과 똑같은 가격이라면 문자 그대로 어느 패스트푸드 식당을 가도 풀코스로 먹을 수 있잖아! 설마 겐타로는 맨날 이렇게 사는건가? 사실 오늘은 특별한 날이 아니였던 건가? 어쩌면 정말로 왕족이나… 그런 높은 신분인 건가?


혼자서 디저트를 결정하는건, 왜 때문인진 몰라도 어렵다. 일단 가격을 고려해야 하는지 아닌지부터 모르겠다. 어차피 전부 말도 안되게 비싸니까, 그래서 말인데, 그냥 원하는 거로 고를까? 가격을 고려하더라도 사진이 특히 맛있어 보이는 것도 아니잖아. 사진만 바라봐도 진한 시럽이 뚝뚝 떨어지는게 눈에 선하고, 종잇결에서 케이크의 촉촉함과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이미 뱃속으로 보낼 디저트 후보 3개를 고른 다이스지만, 그래도 가서 주문하기 전에 겐타로는 뭘 원하는지 물어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 겐타로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조금 전에 겐타로가 내뱉은 그 한 문장이 여전히 머리 한구석을 갉아먹는다. 그런데 어째서 동시에 익숙하게… 느껴지는 걸까? 평소에도 친구가 화장실에 갈때 같이 가주는건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플링 포세 만큼 가까운 친구를 둔 적이 있는것도 아닌데.


그건 너무 신경쓰지 않기로 결정내리는 다이스.


근데 겐타로, 너무 오래 걸리는거 아닌가? ‘만약에’와 ‘어쩌면’이 다이스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만약 무슨 일 있었으면 어떡해? 혹시 또 울고 있는건가. 실은 전혀 괜찮지 않은 거 아냐? 어쩌면 곁에 친구가–


일어선 다이스.


엄청난 박력으로 달려나가다 모퉁이를 돌던 다른 사람과 정통으로 부딪힌다. 완전히 동요한채, 겐타로는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진다–하지만 그렇게 되도록 절대 내버려두지 않은 다이스는 손을 붙잡은 뒤 더욱 힘차게 겐타로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다이스의 어깨를 붙잡고 균형을 되찾는 겐타로. 그리고 겐타로에게 팔을 둘러서 마찬가지로 균형을 되찾으려는 다이스.


그 자세로 얼어붙은채 지나간, 훨씬, 훨씬 길게 느껴졌던 몇 초. 겐타로의 숨결이, 목과 파카에 달린 털 사이에 이마를 대는게 느껴진다. 심장이 콩닥거리는 것도 거의 느껴진, 아니 잠깐만, 자신의 심장인가? 갑자기 욱신거려 오는 유일무이한 리듬이란걸 감안해도 단정짓기 어렵다.


겐타로가 입을 열자, 단어가 귀에 들어오기 직전의 찰나의 순간, 소리를 낮춘 목소리를 먼저 느끼는 다이스.


“…놓아줄 생각은 없는 건가요?”


잠시동안 어안이 벙벙한 다이스. 아니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넘어지기 전에 붙잡아 준건 난데- 그제서야 문득 깨달았다, 아, 밀쳐내고 싶더라도 내가 가까이 붙들고 있어서 그러지 못하는 거구나.


“아, 맞다, 미안.” 재빨리 붙들고 있던 팔을 빼내고, 혹시 그것만으로는 부족할까봐 한발짝 뒤로 물러난다. 뒤로 물러서자 새빨개진 겐타로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 더이상 눈물 자국은 없지만, 다이스는 또 운게 틀림없다고 추측한다. 그게 아니라면 얼굴이 새빨개질 이유가 없잖아?


“어, 괜찮아?” 물어볼 수 밖에 없는 다이스.


“ㄱ-글쎄요,” 다시 자신의 몸을 일으켜 세우고선 하카마의 매무새를 정돈하는 겐타로, “다이스가 소생이 뒤로 넘어질 뻔 한걸 구해준걸 고려하자면, 예, 소생은 괜찮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뻔뻔하게 활짝 웃는 다이스. 하지만 겐타로는 마저 말을 끝맺는다-


“그렇지만, 이걸 빼먹을 수는 없죠. 애초에 소생이 넘어질뻔한 원흉은 다이스잖아요. 디저트 주문하고 음식 나올때까지 기다리라고 콕 집어서 말했는데도 말이죠.”


“미아아아아아아아안…” 강조하려고 말을 끄는 다이스. 겐타로가 계산한다는걸 기억하기 아주 좋은 시간이다.


“그럼 디저트는 다이스가 계산할 건가요?” 그 눈에 닿지 않는 미소를 다시 짓는 겐타로.


“겐타로님 제에에에에에발 자비를!” 자기 자신도 소리에 깜짝 놀랄 정도로 두 손을 재빨리 움켜쥔 다이스. “그렇게 하고 싶어도 못하는데요?!”


하지만 다이스의 처절한 간청은 환상적이고도 아름답게 무시당한다. 겐타로는 그대로 다이스를 지나쳐 걸어갔다–아니면 그럴줄 알았는데, 겐타로는 서로의 어깨가 맞닿자 바로 옆에 그대로 멈춰선다. 거기에서, 다이스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좋아하는 말버릇을 내뱉는다:


“물론 거짓말이었어요.”


마찬가지로 겐타로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다이스. 특히나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선, 물어보기 두려워 보이기까지 하지만, 그래도 알고 싶다는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다. “…어느게?”


눈을 천천히 깜박이는 겐타로. 눈을 깜박이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걸 선명히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다이스. 바로 그순간, 다이스가 지금까지 목격한 것중 가장 장난끼 넘치는 표정을 짓고선 입을 여는 겐타로.


“소생이 말한 첫번째 문장에 담긴 감정이요.”


다이스의 머릿속 톱니바퀴는 열심히 돌아가다가 순식간에 멈춘다. 부딪힌 후 일어난 일들의 시작까지의 기억을 되살려 본다. 부딪힌 다음 겐타로가 처음으로 말한건 놓아줄 생각은 없냐는 거였지–아니 잠깐만, 어쩌면 그것보다 한참 전, 낮에 있었던 일도 포함해야 하나? 밥 사주겠다고 한 때인가? 아니면 아무리 들어도 우리 얘기같은 그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한 때인가? 혹시 옷 빌려준건 갚을 필요 없다고 말한건가? 아아아아악 대체 뭐가 정답인지 1도 모르겠어!


“겐타로 제발…” 완벽한 도게자 자세로 엎드려 절하는 다이스. “나 빈털터리 라니까.”


“다이스, 지금 뭐하는-? 제발 일어나세요?” 겐타로도 무릎 꿇고 크게 속삭이고 있다는건 짐작할 수 있지만, 절대 안돼. 안전과 빚으로부터의 자유가 보장되기 전까진 못 일어나, 아니 안 일어나! 하지만 머리 한구석은 겐타로도 그걸 알고 있다는걸 상기시킨다.


겐타로가 포기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알겠어요,” 패배의 한숨, “…그것도 거짓말이었어요.”


다이스도 자기 나름의 감정이 섞인 한숨을 내쉰다. 다름아닌 짧은 시간내에 드라마틱하게 끌어낸 안도가 담긴 한숨이다. 무릎꿇은 자세에서 일어나면서 겐타로를 바라보다가, 둘의 눈이 마주친 순간 동작을 멈춘다. 그러자 깜짝 놀란것 같은 겐타로.


“겐타로, 제발.” 몹시 화가 나서 낮게 깔린 다이스의 목소리. “그 짓좀 하지 말아줘.”


“ㅁ-무슨 짓 말이죠?”


“나 가지고 노는거!”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씩 웃는 겐타로. “…고려해보도록 하죠.”


속으로 기도하는 다이스. 제발 이건 거짓말이라고 하지 말아줘. 그러다 문득 든 생각.


어쩌면 정말로 ‘세상에서 가장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인걸까.


그리고 두 명은 동시에, 천만다행이도 웨이터중 한명이 눈치채고 이상한 질문을 하기 전에 일어선다. 다시 식탁으로 돌아와서, 넘어져 있던 의자를 자기 자리까지 끌고 가는 다이스와, 우아하게 제자리에 앉는 겐타로.


“나는, 그러니까, 이걸로 하려고 했어!” 메뉴에 나온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를 가리키는 다이스.


“디저트를 주문해도 된다는건 이미 허락한것 같은데요?” 메뉴를 훑어 보면서 찡그리는 겐타로.


“응, 그래도 너가 괜찮은지 먼저 확인하고 싶었어.” 메뉴판 너머에서 겐타로를 힐끔 보는 다이스.


그 답변에 만족한듯 조용히 콧노래를 부르는 겐타로. 가장 맘에 드는걸 가리키기 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커다란 꽃잎 모양으로 잘려진 조각들이 한송이의 꽃을 이루도록 배열된 조각모둠케이크.


“이걸로 할까요?”


알고보니 다이스도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였다. 우연의 일치!


웨이터가 주문한 디저트와 함께 도착했을때, 다이스의 눈에는 디저트가 빛나는 것처럼, 마치 뒤에 후광이 떠오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처음 나온 요리에도 후광이 떠올랐으니까 그렇게 크게 놀라지는 않는다.


각자의 티스푼을 들고 케이크를 파낸다. 처음에는 각자의 편에서만 먹으면서, 서로의 숟가락이 맞부딪힐 때마다 조용히 사과했지만, 어느새 일부러 숟가락을 부딪히면서 가장 맛있는 케이크 조각을 차지하기 위한 장난스런 결전으로 번진다.


다이스의 승리로 끝난 결전 중 한번, 수많은 이상한 목소리 중 하나로 이 맛만큼은 딱 한숟갈이라도 좋으니까 먹어보고 싶다고 칭얼거리는 겐타로. 다이스는 즉시 양심의 가책를 느꼈기에, 그래서…


“알았어, 여기.” 복숭아 케이크의 마지막 한숟갈을 모아서 겐타로의 얼굴에서 2.5cm 떨어진 거리까지 숟가락을 가져다주는 다이스.


예상과는 달리 불쾌한듯 거절하는 겐타로.


“ㄷ-다이스, 그 숟가락으론 먹지 않을건데요.”


“차이 없잖아?” 진짜, 숟가락 나눠 쓰는 게 뭐 어때서. “이미 같은 접시 쓰고 있으면서.”


“실은, 거짓말이었어요. 처음부터 먹고 싶어한 거 말이에요.” 겐타로는 밀쳐내지만, 다이스의 눈에는 맛없는 부스러기 몇조각으로만 만족하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먹을거야, 말거야?” 숟가락을 들이대면서 다시한번 권유하는 다이스.


“…알겠어요.”


체념한 한숨과 함께 포기하고선, 눈을 감고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더니 다이스가 천천히 입에 숟가락을 넣을 때까지 기다리는 겐타로. 겐타로가 천천히 씹을 동안 반응을 끈기 있게 기다리는 다이스.


“좋네요,” 삼키자마자 겐타로의 입에서 나온 말. “아- 맛이 좋다고요, 이거 맛있네요.”


“말했잖아!” 만족해서 활짝 웃는 다이스.


즉시 나머지 조각모둠케이크를 해치우는데 집중해서, 똑같은 티스푼으로 한조각 다음 한조각을 입에 욱여넣는다.


왜 때문인진 모르지만, 잠시동안 다이스를 지켜보고 있어서, 무슨 일 있는지 물어보려는 찰나, 머리를 젓더니 티스푼을 들고 작은 미소와 함께 마저 먹는 겐타로.


실은 이랬던 적이 전에도 몇번 있다. 겐타로가 무슨 말을 할려는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아무것도 아니였던 적? 글쎄, 다이스의 편을 들자면, 겐타로가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게 마치… 눈에 서린 모든 빛깔을 가져가려는 것처럼 보여서일까.


일어서서 나갈 준비를 할때, 그 순간보다 더 행복할 수 없는 다이스. 딱히 겐타로가 ‘빚’을 놀리면서 저녁을 전부 계산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배부른데 디저트까지 얹은채 돌아다니는 날은 흔치 않으니까. 신나고 흥분되서 우연히 겐타로를 한참 앞서간다. 그걸 깨닫자마자 문을 열어둔채 겐타로를 기다린다.


그러자 혼자 웃는 겐타로. 그 어떤 것보다도 기뻐하는 듯한 웃음, 다이스가 물어보더라도 말해주지 않을것에 대한 웃음이다.


함께 조용히 라무다가 셋을 위해 마련한 아파트로 돌아간다. 둘 사이의 평화로운 침묵은, 좋은 식사로 나눈 만족감과 노을의 빛깔과 섞여 한데 어우러진다. 미소를 띈채 기지개 피면서 걸어가는 다이스.


몸을 틀자 눈앞에 있는 무언가를 똑바로 바라보는 겐타로가 눈에 들어온다. 또 무언가가 신경쓰이는 걸까.


“아직도 그 이야기 생각중이야?” 다이스의 추측.


“딱히… 그런건 아닌데요.” 겐타로의 부정. “왜 물어봤나요?”


“아무것도 아냐, 그냥 생각난 건데…” 걸음을 멈추더니 허공에 손을 내미는 다이스. “머릿속에서 끝났다는게 좀 슬프긴 하지만,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면, 이제 글로 옮겨적을 수 있다는 소리잖아! 그건 기쁘지 않아?”


마찬가지로 걸음을 멈춰서 다이스를 바라보는 겐타로. 찡그린 얼굴 뒤에 숨겨진 작은 미소를 다이스는 놓치지 않는다.


“언제 한번 네 예쁜 문체로 그 이야기 쓰면, 나 정말로 읽어보고 싶어.” 잊기 전에 재빨리 덧붙인다: “아! 하지만 꼭 해피엔딩 이어야 해. 공짜로 읽게 해줄거지?”


고개를 저으면서 더욱 활짝 웃는 겐타로. “해피엔딩이라… 그건 두고 바야죠.”


다이스는 잠시 동안 기다리지만, 책을 공짜로 만들어달라는 얘기를 꺼내도 겐타로는 대답할 생각이 1도 없는거 같다. 이런, 마찬가지로 찌푸리고 싶은데, 동시에 미소가 얼굴에 번진다.


그때 다시 입을 여는 겐타로.


“근데 그거 아시나요?” 턱에 손가락을 갖다 대는 겐타로.


겐타로를 마주볼려고 몸을 돌리다가, 너무 빨리 돌려서 가까스로 숨을 참은 다이스.


타오르는 저녁노을의 광채가 내려앉은 겐타로는… 한 폭의 그림 같다.


“어… ㅁ-뭐라고?”


“오늘 공주님과 무사님의 이야기가 끝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슬슬 드네요.” 눈을 감고선 가벼운 몇걸음을 옮기는 겐타로.


“정말… 그렇게 생각해?” 잠시 동안 겐타로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따라잡을려고 뛰어가는 다이스. “잠깐만, 어째서?”  


그 따뜻한 미소로 다이스의 눈을 바라보는 겐타로. (노을의 빛깔을 감안하더라도, 이건 확실하다: 둘의 눈은 서로의 눈에 비친 색으로 빛난다.)


“당연히 그래야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하니까요.”


(작가와 갬블러의 이야기, 라는건 입밖에 내지 않은 비밀)



[흥이 다 깨져버려도 책임 안 지는 에필로그(우소데스요)]


다이스, 헐떡거리면서: 겐타로! 난 정말 바보였나봐! 지금 막 내 천생연분이 누군지 깨달았어!


겐타로, 내심 기대하면서: 지금 막 깨달았다고요?


다이스, 겐타로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면서: 응! 여태껏 내 눈앞에 서있었는데 그걸 못 알아봤네.


겐타로, 다이스의 뺨에 손을 대면서: 확실한가요?


다이스: 당연하지! 초록색에 보랏빛이 언뜻 빛나는 눈이야-


겐타로: 아, 다이스-


다이스: 요코하마 디비젼의 이루마 쥬토.


겐타로:


(P.S. 사랑해 쥬토쨔응)


(P.P.S. 아니 장난이 아니라 진짜 눈색 확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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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연성한 것: 장렬히 실패한 캐해석+과거날조+사마토키사마 생일기념 1111자+아오히츠기 사마토키 이름고찰+묵시록의 4기사

........................어쩌다 이렇게 된걸까요


한때 삼톡이가 이치로에게 자신을 투영했다는 설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아아!!!


추천 BGM: 아야노의 행복이론


글을 쓰기 위해 설정을 짜는게 아니라 설정을 짜기 위해 글을 쓰는 인간이라서, 그리고 불행히도 의미부여+확대해석에 특화되어 있는 답없는 인간이라서...... 사용한 상징을 끝에 정리해놨어요. 2회차로 읽으실때 한번 다르게 해석해 보세요 아니 제발 해주세요


늘 붉은 소나기가 내리던 환상에서 살아왔다.


한밤중, 천둥에 묻혀져 거의 들리지 않던 비명을 지르던 엄마의 입에서 흐르던 액체.


하나뿐인 여동생 미유를 꼬옥 껴안고 폭력을 필사적으로 받아내는 등을 타고 흘러내리던 액체.


서투른 솜씨로 빨간약을 발라주다가 울음을 터뜨린 미유의 눈물과 섞여 팔을 더럽히던 액체.


그 인간의 복부를 관통한 식칼에서 흐르던 액체. 손수 눈을 감겨줄 정도의 자비심은 들지 않았다.


엄마의 목에 걸린 밧줄 목걸이에서 뚝뚝 떨어지던 액체. 즉시 미유의 눈을 가렸다.


핏빛 눈에서 흐르던 액체. 모두 눈물이라기엔 너무나도 씁쓸했고 피라기엔 너무나도 깨끗했다.


추웠다. 뼛속까지 얼어붙을것 같았다. 차라리 얼어버리면 고통을 아예 못느끼지 않았을까. 그러나 우산은 사치였다. 살아남으려면 맨몸으로 버티는 법을 배워야 했다. 머리가 거부해도 몸으로 부딪히며 배웠다. 열두살 소년에겐 가혹한 운명이었다. 하얀색에 스며들어 두드러지는 붉은색은 잔혹했다.


그래서 전부 환상을 덧씌어서, 과거의 저편에 내팽개치고 끝없이 도망치듯 살아왔다.


오늘도 파란색을 덧칠하면서 애써 괘찮다는 주문을 되뇌인다.


나는 오빠니까, 괜찮아, 이건 아무것도 아냐,


라면서.


그날은 검은 소나기가 내려서 환상에서 깨어났다.


비가 흘러내려서 더욱 검어지던 상복. 그러나 한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묘비 위에서 사그라들던 촛불의 불꽃. 결국 굵어지는 빗방울에 꺼졌다.


빗방울에 닿자마자 생기를 잃어버려 칙칙해지던 하얀 국화.


부모님이 돌아가신건 자기 잘못이라며 자책을 멈추지 않던 지로.  꼬옥 쥔 왼손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울다 지쳐 내 품안에서 잠들었지만, 잠결에서도 계속 엄마 아빠를 부르던 사부로.


눈물흘릴 여유도 없이 새까매지던 머릿속.


먹먹했다.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질것 같았다. 내가 혼자서 둘을 먹여살릴수 있을까, 이제부터 뭘 해야 할까.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러나 망설임은 사치였다. 살아남으려면 맨몸으로 버티는 법을 배워야 했다. 머리가 거부해도 몸으로 부딪히며 배웠다. 열두살 소년에겐 가혹한 운명이었다. 붉은색을 무자비하게 침묵시키는 검은색은 잔혹했다.


그래서 환상을 전부 내던져서, 과거의 저편에 내팽개치고 쉴새없이 달려나가며 살아왔다.


오늘도 빨간색을 덧칠하면서 애써 괘찮다는 주문을 되뇌인다.


나는 형이니까, 괜찮아, 이건 아무것도 아냐,


라면서.


히프노시스 마이크를 쥐고 요코하마의 광견으로 군림하던 아오히츠기 사마토키가 야마다 이치로를 처음 만난건 이케부쿠로의 뒷골목에서였다.


흑발과 적안과 녹안 오드아이의 소년에게서 언뜻 은발과 적안의 소년을 보았다.


울다 지쳐 잠든 동생을 꼬옥 껴안고 내일은 좀더 나은 하루가 될것을 약속하고,


두손으로 동생의 귀를 막으면서 스스로 귀를 닫아버리는 법을 터득하고,


한겨울에 집에서 쫓겨났을땐 동생에게 온기를 나눠주며 이 또한 빨리 지나가기를 기도하던,


거의 웃지 않았지만 한번 웃으면 그 누구보다도 천진난만하게 웃던 그 소년.


그때 누구에게 말하는 심정으로 입을 연건지 오늘날까지도 확실치 않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자신의 과거가 반복되는걸 원치 않았다는것.


붉은색은 히어로의 색이라고, 그 어떤것도 두려워할 필요 없다고 말해줘서,


평범한 소년이 아무것도 아닌 테리토리 배틀에서 디비전의 제왕 행세를 하고, 동생들이 조금이라도 다시 웃어주고, 오늘도 화목한 가족과 함께하고, 과거와 미래가 아무리 슬프더라도 행복을 바랄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지 않을까.


한때는 안식과 구원을 찾아서 성당에 다녔던 적이 있었다. 두꺼운 성경의 페이지를 한장 한장 넘기다보면 어느새 하루가 무사히 저물어 있었다. 솔직히 사람들이 종교를 왜 믿는지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심심풀이로 페이지를 넘기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묵시록의 4기사는 뇌리를 강렬하게 스쳤다.


아오히츠기碧棺. 푸른. 아오히츠기 사마토키碧棺左馬刻. 푸른의 왼편에 말을 새기다. 결국 엄마에게 이름에 담긴 본래 의미를 끝까지 물어보지 못했다. 아무리 많은 퍼즐 조각을 모아도 퍼즐을 완성할수는 없는 것이다. 추측해보자면, 말은 대부분 ‘힘’을 상징하니까, 이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갈망했던게 아닐까.


반대로 미유의 이름은 누구라도 한자를 보자마자 단번에 의미를 알 수 있었다. 自由. 자유. 아오히츠기 미유碧棺自由. 푸른 자유自由. 미유만큼은 멍든 삶에서, 죽음에서 자유로워지기를 바랬던걸까. 힘과 자유, 자유와 힘. 서로 떨어뜨려 놓을 수 없는, 불가결한 조합. 힘 없인 자유도 없다. 자유 없인 힘도 없다.


자유는 곧 나의 뮤즈가 되었다.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를 노래했다. 이제는 과거의 유산이 되어버린 그 미소를 떠올릴 때마다 리릭이 샘솟았다. 누구라도 어렴풋이 상상할수는 있겠지만, 절대 공감해서는 안될 과거의 한을 쏫아붇은 리릭의 위력은 강력했다.


……다시 묵시록의 4기사로 돌아가서, 하얗고, 빨갛고, 검고, 파란 네마리의 말이 나오는 구절을 읽었을때, 어쩌면 자신의 이름에 들어있는 말은 그 말들을 의미하는게 아닐까 싶었다. 정복의 백기사, 전쟁의 적기사, 기근의 흑기사, 그리고 죽음의 청기사.


처음엔 하얬던 자신의 인생은 붉은색으로 더럽혀졌다. 그랬더니 붉은색에 이끌려서 검은색이 찾아왔다. 그렇다면 곧 파란색도 찾아올까? 미유의 손을 꼬옥 잡고 산책하던 요코하마 부둣가의 파란색은 좋아했는데, 그것과 똑같은 파란색일까? 아니면 엄마를 데려간 파란색일까?


곧 파란 파멸의 미래가 들이닥칠 거란걸 예측했으면서도, 미래를 바꾸려는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파멸을 기다리고 있던게 아닐까? 아니면 자신은 파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란걸 오래전에 깨닫고 체념한걸까.


어느새 어른이 되었다는걸 비로소 눈치챘을때는 봄내음이 한창일 때였다. 마치 누군가의 음모처럼, 이 추악한 어른의 세계의 진실을 감추려는듯이, 머리를 아프게 하는 강렬한 향기였다.


나는 사마토키형과 시부야의 라무다형, 신주쿠의 쟈쿠라이 선생님과 함께 The Dirty Dawg이라는 그룹을 결성했다.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우리는 함께 세계의 제왕으로 군림했다. 이 멋진 팀에게 축복을!이라고 육성으로 외치고 싶었을 정도였으니까. (나는 그걸 또 TDD 첫 승리 기념 회식에서 술김에 멋지게 저질러 버렸고, 현재 그 흑역사는 라무다형의 핸드폰 앨범 어딘가에 고이 박제되어 있다. 청소년 여러분들은 술을 하지 말도록)


……그게 이 썩어빠진 세상의 치안을 현역 고등학생과 야쿠자, 패션 디자이너와 천재 의사가 지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중왕구 탓이야!로 바뀌기 까진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손이 팀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그것도 두번다시 붙일 수 없을 정도로.


행복이 끝나는 세계가 찾아왔다. 저항도 눈물도 무의미하다는걸 이미 알고 있었다. 무언가가 어긋나고 있는걸, 미쳐가고 있는걸 알아차렸을땐 이미 늦어있어서, 아니, 처음부터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어서, 부서지는건 싫다고 울부짖고 싶은걸 애써 삼켰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눈물은 검게 변해서 땅바닥에 떨어졌다. 애써 미소의 가면뒤에 모든걸 숨겼다.


무릎꿇고 개보다 못한 더러운 처지가 되어도 상관없으니까, 검은색에게 더이상 누군가의 미래를 부수지 말아달라고, 아니, 맘대로 해도 상관 없으니까 최소한 지로와 사부로만큼은 건들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검은색에 다른 색깔을 덧칠해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 순간 고개를 들었을때, 내 눈에 비친 세상이 붉게 빛났다.


빨간색. 내가 지니고 태어났고, 함께 살아왔으며, ‘그 사람’과 만나게 해준, 나만의 색.


빨간색이라면, 누군가를 구할 수 있을까, 라는 철없는 영웅심리가 다시 피어났다. 한때 폭력의 세계를 동경했던 나는 더이상 없었다. 정의감의, 정의감에 의한, 정의감을 위한 히어로로 다시 태어났다.


서투르고 한심한 혼자만의 작전. 아니, 지금까지 잘해왔잖아, 괜찮을거야, 틀림없이 괜찮을거야, 나는 전 The Dirty Dawg의 멤버, 이케부쿠로 디비젼의 야마다 이치로니까!


나중에 엄마 아빠를 다시 만난다면, 혼나도 좋으니까,


제대로 된 형이 되었는지 물어보고 싶으니까,


그때까지 좋아했던 그 말을 몇번이고 다시 떠올리며,


나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동생들과 함께 내일이 오기를 기대한다.


어차피 언젠가 헤어지게 될 인연이란걸 처음부터 알았다.


처음 만났을땐 꼬맹이였던 놈이 내게 마지막으로 던진 싸늘한 시선은 어른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눈빛이었다. 그렇게 전설은 과거가 되었다. 후회도 여운도 미련도 없었다.


요코하마로 돌아간 나는 새로운 놈들을 찾아 새로운 팀을 결성했다. 토끼짭새 경찰놈과 21세기에서 서바이벌을 외치는 또다른 미친놈. 더럽게 미친 주제에 힘은 또 무식하게 세지. MAD TRIGGER CREW. 그게 우리다.


가뭄에 콩 나듯 전 동료들의 소식을 들었다. 라무다놈은 시부야로, 쟈쿠라이 선생님은 신주쿠로 돌아가서 각자 팀을 결성한 모양이다. 그녀석도… 예외는 아니였다. 한때 동료였던 자들과 승부를 겨루게 될 미래가 다가올거란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서야 깨달았다. 사마토키의 ‘사’를 고로아와세를 사용해서 3으로 바꾸고, ‘토키’를 때 시時자로 바꾸면, 사마토키, 세마리 말의 시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하얀 말과 붉은 토끼, 그리고 검은 꾀꼬리의 시간이겠지. 그리고 셋을 한데 어우르는 파란색의 시간. 나를 위한 시간. 오직 미유를 지키기 위해서 살아오다가 비로소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  


지금의 나에게 진정으로 어울리는 색은 파란색이야. 내 인생은 하얀색에서 시작해서 빨간색과 검은색을 거쳐서 이제 파란색이 되었어. 돌아갈 생각은 없어. 애초에 돌아갈 방법도 없는걸. 한때 우리는 우연히 같은 색에서 만났지만 각자의 색의 길을 가게 될 운명이었던거야. 설령 그것이 극과 극으로 치닫는 길이었다 해도-


그러니 빛나줘, 나의 붉은 별. 나의 유일무이한 뮤즈. 끊임없이 리릭을 생각해내면서 결전에서 너를 마주하게될 그날까지.


여동생 이름은 어느 팬픽에서 본 이름이 맘에 들어서 거기에 이것저것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아오히츠기 미유碧棺自由. 일단 한자 표기를 그대로 읽으면 자유. 성우 이리노 미유入野自由님의 표기와 동일합니다. 푸른 관의 자유. ‘푸른’에 집중해서 ‘푸른색=멍(=폭력)’이라고 해석해도, ‘관’에 집중해서 ‘관=죽음’이라고 해석해도 ‘자유’가 엮이는 순간 급 앵슷  

아니면 푸른색=MTC, 관=해골=삼톡이로 해석해서, 삼톡이가 갈망하는 자유… 죄송합니다 살려주세요


미유, 애칭은 뮤 아니었을까. 프랑스어로 ‘~보다 좋다, 더 잘(better)’라는 뜻인 단어 Mieux가 있어요. 최소한 엄마의 인생, 오빠의 인생보다는 훨씬 좋은 인생을 살길 바라지 않았을까… 그리고 (발음만 따지면) 뮤직music, 음악이 연상되는데, 아시다시피 히프마이는 랩으로 싸우는 세계. 이 두가지는 프듀48에서 수고하신 타케우치 미유竹内美宥님에게서 영감받았어요. 리릭을 쓸때 사마토키의 뮤즈는 여동생 아닐까요?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혈육. 애초에 야쿠자가 된 이유…


그리고 색깔은:

하양: 정복, 순수함, 뽀쟉시절의 삼톡이

빨강: 전쟁, (삼톡이에겐) 폭력, 이치로, 쥬토

검정: 기근, (이치로에겐) 절망, 리오

파랑: 죽음, 사마토키, MTC

대충 이렇게 해석하면 될까요. 그와중에 노란색=빛은 코빼기도 안보이는게 절망 포인트라면 포인트

원문: https://archiveofourown.org/works/15812625

Ao3의 reishicolleen님, 감사합니다

원제는 'I'm proud of you' 


1년 넘게 뉴단에서 뻘짓이라고 하기엔 쓸고퀄이지만 어쨌든 뻘짓을 하던 절망잔당이 수메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태풍마냥 히프마이에 이륙했다는 소식입니다

탐라에 붉은머리에 민트빛 브릿지라는 범상치 않은 컬러링의 캐가 자꾸 출현하더라고. 근데 다크서클이며... 반쯤 풀린 눈이며... 퇴폐미가 쩔었어. 

그땐 몰랐지. 무덤 분산투자를 또 확장하게 될거라곤. 이것이 바로 최애가 1명이면 차애가 999명인 올캐러의 폐해

힢마에선 올캐러 입니다. 디비젼 올 스타즈 애껴요


평소에 몇십 페이지 단위로 놀던 사람이 2페이지라는 초단편을 만지니까 뭔가 감칠맛이 안나더라고요

작업하기 싫다는 의욕은 일의 분량과는 전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첫 투표결과 공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올라온 글입니다. 어저깨쯤 파이널 배틀 일러스트가 올라왔으니 간접적으로 느끼는 시간의 흐름(?)


끝났다.


우레와 같은 소리에 파묻히는 스타디움을 이치로는 바라보았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울려서,  잠시동안 마지막 충격파가 고막을 터뜨린 건지 궁금해했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마치 누군가가 스피커의 음향을 최대치로 키운 것처럼, 전부 들을 수 있었다. 비명, 환호, 박수갈채… 온통 소리지르는 사람들. 누군가가 확성기에 대고 소리지르고 있었고---비록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주변을 슬쩍 보자, 무릎을 꿇은채 복잡한 표정을 지은 동생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 맞다.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두통과 귀울림은 무시하면서, 동생들이 있는 쪽을 향해 억지로 몸을 일으킨다. 무릎이 휘어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균형을 잡는다. 약해빠져있을 시간은 없다-동생들을 한시라도 빨리 봐야 하니까.


갑자기 팔이 어깨를 감싸서, 똑바로 설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치로는 즉시 주변을 훑고 곁에 다가온 사마토키를 발견한다. 여전히 찡그린 인상이지만 대신 평소와 한참 다른,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다. “진정해라, 망할 꼬맹아.”


전 팀 동료에게 더이상 분노를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사마토키가 동생들과 자신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해서 자랑스러웠다. MAD TRIGGER CREW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고 말할 수 있어서 자랑스러웠다.


그래도 패배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쓰라린다. “네, 그럴게요.” 그렇게 대답하면서, 사마토키가 쥬토와 리오가 일으키고 있는 동생들이 있는 곳까지 부축하도록 몸을 맡겼다. “감사합니다.”


사마토키는 걸으면서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이치로는 지로와 사부로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애정을 가득 담아서 머리를 쓰다듬는다. “둘다 수고했어.” 자랑스럽게 말했다. MAD TRIGGER CREW의 강력함을 맛본 다른 팀이라면 들것에 실려나가야 했을 텐데, 이치로 본인은 최소한 견뎌낼 수 있을거란걸 알았으니까, 이게 공식적으로 첫 무대 배틀인 동생들이 무척 걱정되었다. 동생들이 버틸수 있었다는 것보다 더 만족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이거보다 더 좋은 팀을 찾을 수 없었을거야.”


하지만 둘의 표정으로 판단하건데 정작 둘은 다르게 생각한다는걸 알 수 있었다. 이치로는 사마토키에게서 벗어나면서 한숨쉬고선 동생들을 꼬옥 껴안았다. 둘다 후회와 고통을 이겨내느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지로는 눈물을 삼킬려고 입술을 깨물고선, 형의 온기에게 위로받으려고 품에 안겼다.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고, 다리가 흐물흐물 녹아내릴것 같았지만,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거의 다 됐는데, 거의 이길 뻔 했는데. 소리지르고 화내고 싶었다. 세상한테 틀렸다고 삿대질 하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편은 정정당당하게 이겼다는걸 알았다… 그리고 자신의 팀이 진 이유는… 서로의 약함 때문이라는 것도.


그 무엇보다도 아팠던건 현실이었다.


“니쨩…” 어떻게 형은 졌는데 자랑스럽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본인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아니 못했을텐데.


“이치니…” 형과는 달리, 눈물을 억누를 수 없어서, 사부로는 형의 품에 안겼다. 상당한 피해를 입은 막내는,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지만, 어떻게든 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안힌김을 썼다. 인정하기는 죽도록 싫었지만, 팀내에서 가장 약한건 자신이었다. 그래서 자신 때문에 진거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나약해. 자신을 원망하고 자책했다. 나는 한심할 정도로 나약해. “죄송해요…”


맏형은 단순히 고개를 저었다. “사과할 필요 없어.” 이치로의 말은 상냥했고 분노라곤 기색조차 찾을 수 없었다. “너희 둘다 자랑스러워.” 부드럽게 이어지는 말. “그리고 고개를 들어...” 시선은 상대편을 향했다. 말없이 서서 형제들만의 순간을 간직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사마토키와 그의 동료들 말이다.


“땅바닥만 보는 녀석에게는 평생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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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s://archiveofourown.org/works/14723534

Ao3의 glitchedmirrors님, 정말 좋은 글 감사합니다!

원제는 'Simple Steps'


최장기록을 갱신해버린건 저도 참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4362 단어 공백포함 18399 공백미포함 14115...ㅎㅎㅎ


수상한 메신저 팬덤 첫 데뷔작(?) 이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707 루트, 시크릿 엔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드림소설이라기 보단 2인칭 서술 소설에 가깝습니다. 본격 ‘여주’라는 단어 안쓰고 번역하기… 라는 도전과제 아닌 도전과제. ‘자기’라던가 ‘얘’라는 단어로 절충안을 확립했습니다. 세영이라면 이미 그렇게 부르고도 남았으니까. 이참에 이름/인칭대명사를 쓰지 않고도 말이 통하는 일상체 한국어에 경의를 표하겠습니다

그리고 최둥이와 여주는 동갑이지만 생일은 최둥이가 더 빠르다는 깨알 뇌피셜.


이번 번역의 핵심은 상황 묘사는 형용사의 기능을 하는 동명사+주어 위주, 하지만 여주가 엮이면 주어+현재형 동사 위주로 바뀌는 서술. 독자분들 무슨소리인지 이해 못하시겠지…?


왜 세영 세란이는 ‘ㅐ’가 아니라 ‘ㅔ’인데 ‘Se’가 아니라 ‘Sae’로 번역됐을까요? 제 이름도 ㅐ를 e가 아니라 ae라고 쓰는데. 아마 Seyoung Seran이라고 쓰면 검색했을때 동명이인이 많아서 그랬을까? 그럼 납득. Seran이라고 쓰면 한국보다는 일본 장르에 익숙한 양덕들은 일본식 이름이라고 착각했을수도 있겠다


작가님 본인의 공황발작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그라운딩Grounding이 메인 테마 같네요. 우울증이나 현실 감각이 사라져 갈때 하면 좋은 활동으로, 팬픽에선 약간 변경되었지만, 대부분:


    1. 의자에 편하게 앉는다

    2. 1 ~ 10 숫자로 내 감정 상태 확인하기 (숫자가 클수록 좋지 않은 것)

    3. 땅에 발, 의자에 등, 허리, 엉덩이가 붙어있는 걸 느끼기

    4. 눈에 보이는 사물 이야기하기

    5. 눈에 보이는 색깔 이야기하기

    6. 들리는 소리 이야기하기

    7. 향초, 향수 등의 향 맡기

    8. 초콜릿을 먹으며, 무슨 맛이 나는지, 무슨 느낌이 드는지 이야기하기

    9. 손, 발을 쭉 뻗으며 스트레칭하기

    10.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 그리고 그 호흡을 느끼기

    11. 호흡하면서 내가 가장 편안하고 안전하게 느끼는 것을 떠올리기

*감정에 더 빠질 수 있기 때문에 눈은 감지 않는다

이 순서를 따른다고 합니다!


세란이는 반드시 행복해질거고 세영여주(=형수님!)가 항상 옆에서 격려하고 응원할거예요오오오(행복회로 타는 소리)


조심스럽게 방을 훑는 민트빛 눈, 주변 상황을 인지하려고 하자 짧고 가쁜 숨을 내쉬며 헐떡거리는 세란이. 숨이 막히는 듯한 이 느낌이, 공기가 목을 졸라서 죽이려는거 같은 이 느낌이 왜 드는지 영문을 몰라한다. 지하 거실 한가운데서 무릎을 껴안고 웅크린다. 마치 자신을 현실에 붙들어 놓으려는듯이, 두 팔은 자신을 단단히 껴안는다. 소리지르지 않으려면 그것밖에 할 수 없다. 물론 이 순간 자신의 숨소리가 얼마나 이상하게 들리는지 알면서 그럴리는 만무하지만. 방금 전에 뭐하고 있었더라? 방의 TV도 켜져있지 않았는데, 세란이는 전혀 기억해낼수 없다. 방을 오래 비우는 적은 별로 없는데, 그래서일까, 이 느낌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


일어나 앉을수도 없어서, 바닥에 주저앉아, 숨이 막혀오자 한껏 웅크린다. 만약 지금보다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릴수 있다면, 쌍둥이 형이 어딨는지 궁금해하겠지. 지금도 여전히 약한 모습 보여주는건 싫어하지만,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형이라면 두 손 걷고 자신을 도와줄거란걸 아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 생각마저도 사라진다. 죽을 것 같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는 적발의 소년. 숨이 너무 가파서 죄어오는 가슴. 익숙한 쓰라림과 함께 차오르는 눈물. 신이시여, 왜이렇게 아파야만 하는 건가요?


“세란아? 지금 어딨어?” 소리치는 세영이와, 형의 목소리에 묻어나오는 흥분을 쉽게 눈치챈 세란이.


쌍둥이 형에게 대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목을 옥죄어 오는 흐느낌밖에 나오지 않는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세영이 형이 가까워질수록 커지는 발걸음 소리. 형의 발과 다리가 시야에 들어오자 고개를 들어서 형의 얼굴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오히려 두 눈은 꼭 감겨서, 차오르던 눈물이 드디어 흘러넘쳐서 더렵혀진 두 뺨.


“젠장. 세란아, 괜찮아?” 쌍둥이 형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에 깊이 새겨진 걱정의 기색을 세란이는 놓치지 않는다. 왜 이게 지금 일어나야 되는거야? 민트 아이에서 구출됐을 때부터 들러붙던 세영이 형이 드디어 떨어졌는데, 세란이는 그 모든게 반복될거란 예감이 든다.


“아니...” 쌕쌕거리며 새어나오는 답변, 다시 헐떡이는 호흡. 양팔을 더 꽉 껴안을수록 부들부들 떨리는 연약한 몸. 살을 파고드는 손톱. “아니. 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 그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몇번이고 계속해서 입에서 쏟아지는 그 말. 갈수록 더 절실하게 들리는 바로 그 말.


세영이가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상황파악 하기 전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사랑하는 동생이 공황 발작을 겪고 있고, 세란이가 바닥에 붙어 꼼짝도 못하는 걸로 판단하건데, 정말 지독한 발작이다. 전에도 이랬던 적이 없는건 아닌데, 너가 어떻게 하면 된다고 말해준게 분명 있었는데? 다시 제정신 차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건데? 세란이를 바라보는 금안 한 쌍. 무언가를 기억해내면 즉시 머릿속을 떠나버린다. 이런 상태의 쌍둥이 동생을 보자니 정말 마음아프다. 특히 이렇게 심한 발작은 기억에 없으니까 더더욱. 아니면 있었지만 어땠는지 까먹은 걸까? 어쨌든간에, 세영이는 세란이를 이렇게 내버려둘수 없다는걸,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는걸 잘 안다.


“세란아, 다른데 가지말고 여기 있어. 나... 우리 자기 데리고 올게. 나는 몰라도 자기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거야, 알았지?” 본인의 불안감이 증폭될수록 덩달아 높아지는 목소리. 세란이 대신 그 고통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지만서도, 자신보다는 너의 도움을 받는게 더 낫다는걸 알고 있다.


세란이가 들을수 있는건 형이 걸어가는-아니, 달리는-발걸음 소리 뿐. 너가 어떻게 도와줄수 있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한 쌍둥이 동생. 실은 쌍둥이 형과 같이 살고 있지만 아직도 너를 믿지 못한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건 싫어! 그 생각에 복통과 현기증이 몰려온다. 또다시 들리는 흐느낌과 신음소리. 이제 더 격심해진 울음과 함께 찾아온 경련.


세란이가 민트아이에서 구출된것도, 세영이가 병원에서 세란이를 빼낸것도 거의 1년 전, 몇달 전의 이야기. 하지만 민트아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히 되살아난다. 그곳에서 받았던 벌이라는 이름의 폭력. 가끔은 숨이 막힐 정도로 격렬하게 쏟아지던 구원의 약. 때로는 도로 토해내기도 했지. 끔찍했다. 다시 아파오는 배. 목구멍 뒤에서 차오른다고 확신할 수 있는 메스꺼움. 눈을 꼭 감은채 도로 삼킨다. 이대로 악화되도록 내버려둘리 없잖아. 이제 그 나날들은 그만 생각해야겠다…   


천만다행히도 형이 무언가를 소리치는게 들린다. 하지만 아무 말도 알아들을 수 없다. 모든 소리가 흐리멍텅 해진다. 희미한 외침 외에도, 머릿속을 울리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다. 멈춘 것 같은 뇌. 이제 더이상 어떤 것에 집중할 수 없다.


너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건지 모른채 방까지 남자친구한테 이끌려 온다. 끌고 오기 전에 세영이가 말할 수 있던 단어는 “세란이” 뿐이어서, 쌍둥이 동생에게 일어난 일이란건 짐작 갔지만, 직접 보기 전까진 확신이 든건 아니다. 마룻바닥에 웅크린 세란이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살을 파고 들어서 팔과 손톱에 묻은 혈흔을 보자 너는 숨이 막힐 정도로 놀란다. 아무래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상태일거라고 추측한다.  


“자기야, 나좀 제발 도와줘...” 세영이의 간청. 너의 셔츠를 잡는 손. 금빛 눈에 또렷한 공포. 네 남자친구가 얼마나 걱정됐는지를 보자 너의 마음도 아파온다. 자신의 불안장애에 맞서 싸우는것에 익숙해서, 동생이 똑같은 일을 당하는걸 바라보고만 있자니 틀림없이 괴롭겠지. 너는 안심시켜주는 상냥한 미소를 지어준다. 당연히 도와줄 거니까.  


“ㄴ-나한테 해줬던거 그대로 세란이한테 해줘, 부탁이야. 틀림없이 세란이한테도 도움이 될거야.” 부들부들 떠는 쌍둥이 동생을 바라보며 속삭인다.


세영이를 꼬옥 껴안자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게 느껴진다. 너는 몸을 살짝 숙여 세영이의 이마에 키스한다. “물론이지. 하지만 그전에... 세영아, 미안한데, 우선 너야말로 먼저 진정해줘. 세란이가 걱정되는건 아는데, 너도 멘붕하면 공황 발작이 더 심해질 거야.” 너의 말에 놀라서 커지는 세영이의 눈. 그리고 찔린 것처럼 쓰라려오는 심장. 듣고싶지 않은 소리지만, 네 말이 맞다는걸 알고있다. “잠깐 나갔다 들어와도 돼, 알았지?”


네 남자친구의 훌쩍임. 눈물이 맺힌 금빛 눈. 그래도 대답대신 끄덕인다. 입술에 조심스럽게 키스를 남기고선 조금 더 꼬옥 껴안자 긴장이 풀리는게 느껴진다. 그러다가 너를 밀어내고선 똑바로 바라보는 금안 한쌍.  


“아-알았어. 그건 내가 할수 있어. 고마워. 그러니까... 제발 세란이 좀 도와줘,” 말하고선 눈을 감고 너의 대답을 기다린다.


“당연하지. 두번 말할 필요 없어,” 너는 대답하고선 쌍둥이 동생에게 집중하기 전 한번더 키스를 남긴다. 너의 답변에 만족해서, 다른 방에서 숨쉬는데 집중하고 안정되면 다시 돌아올려고 슬쩍 방을 나가는 세영이.


너는 세영이가 나가자 마룻바닥에 앉아서, 내려다보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세란이와 눈을 맞추려고 한다. 눈을 뜨자 공포에 사로잡혀서 너를 바라보는 세란이. 더 가까이 다가가자 숨소리가 얼마나 불규칙적인지 들린다. 얼마나 많이 떨고 있는지가 보인다.


수만가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지만 딱히 어느 하나에 집중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너가 주변에 앉아 본능적으로, 마치 너가 무슨 짓을 할거라고 상상한 것처럼,  움츠려든다. 하지만 그 상상이 무엇이든 간에… 상상과는 달리 아무 일도 없어서 동그랗게 커지고선 너를 바라보는 민트빛 눈 한쌍. 여전히 숨을 쉴수가 없고,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방울이 느껴지지만, 이유는 몰라도… 차분하게 바라보는 너의 눈빛에 조금이나마나 심장이 안정되는게 느껴진다.  눈 씻고 찾아봐도 동정심은 커녕 온기와 사랑밖에 보이지 않는 눈빛. 형을 바라보는 눈길에 어린 것과 똑같은 사랑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랑은 사랑이다. 또다른 흐느낌이 새어나오자 시선을 딴데로 돌린다. 이 상태로 널 바라볼 수 있을리가 없잖아. 이런데도 어째서 날 나약하고 한심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거야? 팔에서 머리를 향하고 붉은 머리칼을 정돈하는 두 손.


너는 세란이에게 간절히 손을 내밀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는다. 어떤 형태로든 접촉한다면 놀라서 즉시 보복하곤 했으니까, 부담주는 행동은 하고싶지 않다. 하지만 세란이는 너가 생각하는것과는 달리, 너가,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잡아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하지만 그 생각을 목소리로 옮기려는걸 억누르고 있어서, 입밖으로 아무 말도 낼 수 없다.


“세란아? 일어나서 앉아줘. 그렇게 해줄수 있어?” 계속 응시하면서 너는 묻는다.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할 수 있나? 일어나 앉을 수 있나? 살짝 끄덕이고선 자세를 바꾸는 세란이. 몸을 일으키자 한없이 약하게 느껴지는 팔. 잠시동안 고군분투 했지만, 무슨 일이 있으면 너가 곁에 있을거란걸 아니까, 일어나 앉는데 성공한다. 주변에 있던 소파에 등을 기대고, 무릎을 꼬옥 껴안는다.


“잘했어, 세란아... 벌써 잘하고 있어,” 너는 부드럽게 말한다. 너를 바라보는 세란이의 민트빛 눈엔 여전히 공포가 역력하지만, 이제 시작이다. 너가 다음엔 무슨말을 할지 기대하는듯 바라보는 두 눈.


“좋아, 다음 단계는 좀더 힘들거야, 알았지? 하지만 하나씩, 차근차근 해볼거야,” 너는 말한다. 다시 끄덕이고선 기다리느라 굳게 닫힌 입술.


“우선... 너가 볼 수 있는 것 다섯가지를 말해줘. 만약 주변을 둘러봐야 하면, 그래도 돼. 서두를 필요는 없어.”


잠시 진정할려고 깊은 숨을 들어마시자 감기는 세란이의 눈. 다시 눈을 열고 주변을 둘러본다. 솔직히 거실 치고는 가구가 적은 편이긴 하다. 그래도 쌍둥이 형과 자란 집의 거실보다는 많다. 그 집을 떠올리자 끊기는 호흡과 다시 시작될 뻔한 헐떡거림. 하지만 고개를 돌리고 너의 눈과 마주치자 안정되는 호흡. “네... 네 눈이 보여. 형처럼 금빛은 아니야. 그렇다고 해서 ... 나처럼... 민트빛인것도 아냐. 네 눈은...” 잠시 생각할려고 말을 멈춘 세란이, “정말 예뻐.” 한숨과 섞인 그 말이 혀끝을 떠나자마자 발그레해지는 세란이의 두 뺨.


“고마워 세란아. 그러면, 또 뭐가 보여?” 너는 답변한다. 세란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는 사실에 주의를 끌고 싶진 않지만, 칭찬은 고맙다. 자주, 특히 너에게는, 하지 않는 말이다. 세란이가 조금씩 너에게 마음을 열고 있다는 사실에 네 심장은 긍지로 부풀어오른다. 그래도, 애초에 이런 상태의 자신을 너에게 보여주기까지 몇번이고 마음을 다잡아야 했을 거란걸 너는 알고 있다.


“으음... 난... TV가 보여. 지금은 꺼져 있고, 우리의 모습이 비춰져. 하지만...” 맞는 단어를 찾기 위한 망설임. “가끔 너하고 형이 같이 영화보자고 부추겨. 그 평화로운 순간을 좋아해,” 마지막 문장은 속삭임에 가깝고, 너는 무슨 말인지 알아내려고 안간힘을 쓰며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너는 대답 대신 미소짓는다.


“계속해,” 너는 부추긴다. 눈 한 켠으로 흘깃 보면 머리가 부스스해졌지만서도 다행히 진정된 세영이가 다시 방으로 몰래 들어온다.


“세영이 형의 안경이 보여. 노란색과 검정색 줄무늬가 웃기긴 한데, 그치만... 참 형다운 색이야,” 멋쩍은 웃음과 함께 형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세란이. 전혀 예상치 못한 동생의 말에 잠시동안 움찔하는 세영이. 그의 볼이 발그레해진걸 너는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치료시간때 그린 난초 그림이 보여. 정말 못그린 건데, 형이 맘대로 액자에 끼워서 벽에다 걸어놓은 거야,” 눈물을 억누르느라 비통해지는 세란이의 목소리. 다시 숨이 가빠지자, 너와 세영이 둘다 세란이의 과호흡이 재발할까봐 걱정한다.


“난... 세란이 너가 만든 거라서 걸어놓은 거야. 그리고... 우리 자기도 이곳에 너의 흔적을 남기면 좋겠다고 했거든,” 세영이의 속삭임. 네 곁에 앉아서 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너는 그의 손을 꼬옥 쥐고선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문지른다. 아직도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것 같은 세란이.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추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을 찾느라 주변을 둘러보는 세란이. 하지만 방에 있는것 중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 자각에 무릎을 더 꽉 껴안게 된다. 얼굴을 찡그리고선,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한숨을 내쉰다. 지금까지 잘하고 있었는데, 이제 전부 말아먹었다. “나... 못하겠어. 못해... 못해못해못해-” 흐느낌과 함께 시작된 반복.


“아니야. 할수있어, 세란아. 말했잖아, 서두를 필요 없어. 약속했잖아,” 너는 그렇게 말하면서, 직접 세란이에게 다가가서, 머리에 손을 내려놓는다.


흠칫하고선 깜짝 놀라 너를 쳐다보는 눈. 꽉 다문 이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숨. 찰나의 순간동안, 눈에 번뜩이는 분노를 본것 같다. 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분노는 슬픔으로 바뀐다. 너의 손길에 머리를 맡기자 들리는 조용한 훌쩍거림 그리고 다시 닫히는 두 눈. 침묵에 귀가 멀지 않도록 너는 소곤소곤 콧노래를 부른다. 미소짓고선 콧노래의 동참하는, 너의 어깨에 파고드는 세영이. 이럴때의 너는 정말이지 사랑스러워서, 자신도 동참한다면 세란이가 진정되서 다시 입을 열기를 바란다. 그리고 놀랍게도, 효과가 있는것 같다. 너와 쌍둥이 형을 다시 바라보는 세란이. 고통과 불안이 아직도 역력한 두 눈.

“다른거 생각이 안나는데...” 그말에 메어오는 목.


“괜찮아, 세란아. 공황발작 때문에 생각이 뒤죽박죽이 되지?” 너가 묻자 답변으로 끄덕거림을 얻었다. “이해해. 의사 선생님이 아티반[각주:1] 처방해 주셨지? 한 알 먹어볼래? 신경이 진정되면 생각 정리하는게 더 쉬워질거야. 나중에... 좀 피곤해지는 부작용이 있긴 하지만, 원한다면, 먹어도 돼.”


어리둥절해서 눈썹을 꿈틀거리는 세란이. “잠깐만, 그건 어떻게 알았어?”


“그건 이 형아가 대답할수 있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가 잠시동안 너를 바라보고선 다시 쌍둥이 동생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세영이. “우리 자기도 불안장애가 있거든. 가끔씩 한알은 먹어줘야해,” 그렇게 말을 끝맺는다.


“어, 정말?!” 충격을 감추지 못하는 목소리로 물어보는 세란이.


“응, 정말이야,” 너는 웃으면서 대답한다. “그래서 널 도와주고 싶어, 세란아. 이게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으니까, 맹세해.”


“그-그럼... 알았어. 한 알... 먹어보고 싶어,” 너에게 미소지어 보일려고 하자 자신감이 조금씩 붙는 목소리. 하지만 무언가를 생각하니까 오래 남지 않는 미소. “먹고 싶은데... 못 일어날 거 같아.”


쌍둥이 동생에게 미소짓고 후드티 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내는 세영이. “걱정은 붙들어 매. 숨쉬기 운동때 널 위해서 집어왔거든. 난, 어어.. 자기가 곧 추천할거 같다는 느낌이 들더라고,” 너가 자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니까 새빨개지는 얼굴.


너는 병을 건네받은 다음, 뚜껑을 열고 세란이에게 건네주기 전에 조심스럽게 병을 흔들어서 한알을 꺼낸다. “의사선생님이 정확히 어떻게 복용하라고 말해주신적 없는거 같으니까, 대신 내가 지금 말해줄게. 혀 밑에다 약을 넣은 다음에 녹여. 혀에 닿으면 정말 맛없겠지만, 그래도, 약효는 빨리 나타날거야.”


네가 말한 대로 하는 세란이. 너희 세명이 기다리는 동안 입을 꾹 다문채 몇분동안 그대로 앉아있는다. 찡그린 세란이를 보자 너는 꺄르르 웃을 수 밖에 없다. 아마 혀로 약을 녹이다가 맛보게 된 거겠지. “네 말이 맞아, 이거 진짜 맛없다.”


“알아, 나도 알고 있어. 그래도, 믿어봐, 도움이 될거야,” 킥킥 웃으면서 말하니까 노려보는 세란이의 시선을 얻는다.


너희 둘을 보자 조용히 웃을수밖에 없는 세영이와, 형에게 미소지을 수 밖에 없는 세란이. 가장 작은 미소라 해도 동생이 미소지어 주자 진심으로 기뻐서 미소로 답할 수 밖에 없는 세영이. “그럼, 이제 머릿속이 차분해진 거 같으니까... 볼수 있는거 하나 더 말해야 하잖아, 그렇지?”


형의 말에 움찔하는 세란이. 눈에 다시 비치는 두려움. “어... 그래, 그러네...” 속삭인 답변, 한손으로 턱을 괼려고 숙인 몸. 얘기하려고 집중할 수 있는 물건을 찾아서 방을 훑는 눈. 완벽한 물건을 찾아내자 너와 세영이 뒤에 있는 그걸 가리키기 전에 들을 수 있는 가장 작은 웃음. “우리 세명을 찍은 저 사진. 너가 이사온 날에 형이 찍자고 했지.”


그때를 떠올리자 잠시 멎은것 같은 너의 심장. 너는 고개를 돌려 사진을 직접 바라본다. 불안한듯 쳐다보는 세란이. 혹시 둘이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걸까 너는 궁금해한다. 둘중 누구라도 먼저 입을 열기 전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세란이의 생각. “나는... 너가 이사오는게 정말 무서웠어. 세영이 형을 믿는것도 망설이고 있었는데, 너가 온다고 하니까... 그렇다고 너를 못 믿었다는건 아냐. 오히려... 너를 다치게 할까봐 걱정되었어,” 말을 끝맺자 다시 숨쉬는게 힘든 것처럼 보인다. 살짝 찡그린 미간. 흐리멍텅한 눈. 너를 바라보면서 두통을 느끼는 건지 궁금해진다.


“ㅇ-왜 그런게 걱정됐어?” 물어보면서 말을 더듬을 수 밖에 없다.


“이걸... 지금 말해줄 수 있는지 모르겠어. 아직도... 내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야. 이건 테라피스트 선생님 한테도 아직 말해주지 않은거야,” 방을 훑는 눈을 보면 이 대화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는거란걸 알 수 있다.


보이지 않는 힘에 억눌러 발버둥치는 것 같다고 느끼는 세란이. 그 얘기를 두루뭉술하게 나마나 꺼낸게 이 느낌을 더 불러일으킨 걸지도 몰라. 그래도 거기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걸, 사고회로가 다시 멈춘 느낌이 들자 더더욱 잘, 안다. 이 복잡한 감정으로부터 마음을 딴 데로 돌릴게 필요하다. “그래서... 다음 단계는 뭐야?”


“아! 그럼... 너가 볼수 있는것 다섯가지 다음엔... 너가 만질 수 있는것 네가지를 말해봐,” 너는 다시 미소지으면서 대답한다. 세란이에게는 힘든 시간이란거 알고 있지만, 아직 도망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너의 도움을 구하려고 해서 기쁘다.


“내가 만질 수 있는것 네가지?”


“응! 볼수 있는것들 만큼 자세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래도 그건 정말 잘했어! 지금까지 정말 잘하고 있는데, 알고 있지?” 너는 세란이를 북돋아준다. 언뜻 세영이가 동의의 표시로 끄덕이며 동생을 향해 미소짓는게 보인다.


“그럼... 첫번째는 이 소파일까. 이렇게 등을 맞대고 있으니까 편안해. 그리고... 바짝 신경쓰게 돼, 아아-” 잠시 머리를 움켜잡으며 내뱉은 한숨. 지금 이 모든게 두통을 일으키는게 틀림없었다.


“괜찮아. 잘하고 있어. 계속해, 세란아,” 이번에 입을 연 건 세영이었다.


찡그린 미소로-그래도 미소는 미소니까-형을 바라보는 세란이. “그럼... 어어... 내가 만질 수 있는 것 두번째는... 마룻바닥이야. 손가락으로 훑으면 차가워. 이 소파에서 느끼는 온기하고는 정반대야,” 말을 이으면서 바로 곁에 있는 마루 바닥을 훑는 손가락. 생각을 정리하면서 직접 모든것을 만져봐야 하는 모양이다.


“마지막 두개는... 한번에 말해도 괜찮아?” 갑작스러운 물음.  기대하는듯 너와 형을 바라보는 두 눈. 아주 조금이나마나 올라간 목소리.


“너가 원한다면.”


“그럼... 내가 만질 수 있는것 마지막 두가지는... 너하고 세영이 형이야,” 그렇게 내뱉지만 무릎에 얼굴을 파묻어서 단어가 약간 뭉개진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처럼 손잡고 싶다고 말하는 거지?” 세영이의 조용한 놀림. 너는 재빨리 남자친구의 배를 팔꿈치로 친다. 그럼 작은 소리로 ‘으윽' 거리고선 키득거리겠지. 그래도 세란이가 공황 발작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던 도중 너희들의 손가락이 서로 엮인건 사실이다.


“형은 무시해. 그래도 손 잡을래? 만약 지금 원하는게 그거라면, 괜찮아. 그리고 너가 마음의 준비가 됐을 때까지 놓지 않을께,” 그렇게 말하는 너의 상냥한 목소리.


살짝 고개를 들어 너희 둘을 다시 바라보는 세란이. 무릎을 감싸던 팔을 펴고 너희에게 손을 내민다. “해줘. 그럼... 정말 고마울 것 같아,” 중얼거리자 새빨개지는 얼굴. 너희 둘에게 이런걸 물어보는건 불편하기 짝이 없지만, 그게 간절히 필요하다. 너가 세영이 형에게 주는 편안함의 부스러기 만이라도 느끼고 싶다. 그 편안함을 자신도 느꼈으면 좋겠, 아니, 느껴야 한다. 대답 대신 너와 세영이 둘다 손가락을 엮을 수 있도록 손을 내민다.


“괜찮아졌어?” 입모아서 동시에 물어보는 너와 세영이.


“응, 고마워,” 대답하면서 너희 둘에게 배시시 웃어보이는 세란이. 하지만 바로 그때 너와 세영이 둘다 예상하지 못한 풍경이 펼쳐진다. 세란이가 너희 둘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너의 손을 놓고 너희들을 껴안는다. 둘에게 기대자 떨리는 몸은 세란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를 보여준다. 대답 대신 너희 둘이 할 수 있는건 더 꼬옥 안아주는것뿐. 너의 손이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자 어깨에 파묻힌 흐느낌이 들린다. 동생의 머리 위에 턱을 괸 세영이. 여전히 두 팔은 동생을 꼬옥 껴안고 있다.


마치 목숨이 걸리기라도 한것처럼 너희 둘의 품에 파고드는 세란이. 세란이가 흐느끼자 너희 세명은 말없이 앉아있는다. 그래도 이제 진정되기 시작한것 같다. 둘에게서 느껴지는 온기가 정말 좋아서, 포옹에 몸을 맡기자 긴장이 풀어지는걸 세란이는 느낀다. 계속 이대로 있어도 괜찮을지, 이렇게 응석 부려도 괜찮은 건지 궁금해진, 아니 궁금해할수밖에 없다. 이렇게 안는건 말할 필요도 없고, 형의 신체적 접촉을 허락한 적은 거의 없었는데… 하지만 지금은, 너와 쌍둥이 형에게 들러붙는다. 지금 이렇게 너희 둘의 팔에 파묻힌 순간만큼 사랑받는다는 느낌이 든 적이 있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사실은, 이렇게 꽉 껴안긴 적은 전혀 없었다고 확신한다. 최소한 이젠 형이 왜그렇게 들러붙는지 이해되는것 같다. 정말 놀라우면서도 기분좋은 느낌이니까.    


너의 어깨에서 머리를 떼고선 무언가 말하려는 것처럼 너희 둘을 바라보는 세란이. 잠시동안 생각을 정리하고나서 쌍둥이 동생은 천천히 깊은 숨을 들이마신다. “그래서... ㄷ-다음 단계가 뭐야?” 얼굴이 새빨개졌으면서도 물어본건, 지금 받고 있는 신체적 애정에서 관심을 딴데로 돌리려는 의도라는게 명백하다.


너는 잠시동안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콧노래를 부르면서 세란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붉은 곱슬머리에 파묻히는 너의 손가락. 손끝으로 두피를 마사지하기 시작한다. 그 느낌에 깜짝 놀라서 커지는 민트빛 눈. 더욱 새빨개지는 세란이의 두 뺨. 하지만, 충격이 사라지자, 쌍둥이 동생은 너의 손에 더욱 기댄다. 감기기 시작하는 두 눈. 웃으면서 실수로 동생을 툭 쳐버린 세영이. “이런, 머리 쓰담쓰담 하는거 내 몫도 뺏어가는거야? 이거 질투나는데.” 웃음에 서린 조소 약간.


“조용이 해, 세영아. 즐기게 내버려 둬.“ 계속 콧노래 부르기 전에 너는 꾸짖는다. 그 와중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세란이. 틀림없이 무슨 말을 하면 형에게 한방 먹일수 있을지 혼란스러운 거겠지. 공황에 떨리는 눈을 보자 머릿속에 들어가서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알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간에, 다음 단계가 뭔지 알고싶다고 했지?” 너가 묻자 시선을 피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세란이.


“네가 들을 수 있는것 세가지,” 이번껀 직접 기억해내서 입을 연 세영이.


“응, 바로 그거야. 네가 들을 수 있는것 세가지.” 너는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돌려 남자친구에게 웃어보인다. 답변 대신 활짝 웃고선 재빠르게 키스를 남기는 세영이. 그러자 웃음이란 예상치 못한 반응을 얻는다.


“너의 웃음소리,” 대답이 그렇게 빨리 나올 거라곤 예상치 못해서, 세란이가 갑자기 말하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는 너와 세영이. 너와 눈을 마주친 쌍둥이 동생의 눈에 잠든, 공포 뒤에 숨겨졌던 동경을 너는 눈치챈다. “ㄴ-너의 웃음은...” 그렇게 다시 입을 열었지만서도 너가 바라보고 있다는걸 깨닫자 잠시 망설인다. “내가 들은것중 가장 사랑스러운 소리야. 형처럼 활기찬건 아니지만, 차분하고 부드러워. 그리고 나... 난 ㄱ-그거 듣는거 정말 좋아해.”


너는 두 뺨이 따뜻해지는걸 느낀다. 이미 눈을 칭찬할 때부터 방심하고 있었는데, 이젠 웃음소리를 칭찬한다? 오늘밤동안 네 남자친구의 동생이 보여주는 호전 속도에 감탄하게 된다. 다만 이 발전을 이뤄내는데 공황발작이 없었으면 더 좋았을테니 아쉬워진다. “ㄱ-고마워, 세란아. 그렇게 말해줘서.” 대답하자 반짝이는 세란이의 눈을 본다.


“ㅊ-천만에...” 말을 더듬으면서도 너와 형의 손을 다시 잡는다. 너희 둘다 마찬가지로 손가락을 엮자 덜 떨고 있는게 느껴진다. 너가 칭찬을 고마워하자 심장이 두근거려서, 너를 좀더 칭찬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절대로 손을 놓지 말고, 오늘밤처럼 많이 좋아졌다고 계속 칭찬해줬으면 좋겠다. 진작에 너를 빨리 받아들이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지만, 전에 너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바꾸기엔 이미 한참 늦었다. 너와 형이 자책하는걸 원치 않을거란걸 아니까 그 생각은 즉시 머리에서 떨쳐내었지만.


“그리고 또… 내 숨소리가 들려. 전보다는 좀더 조용하면서 숨가쁘게 헐떡거리는 소리가 아니야. 그리고… 더이상 숨막혀 죽을거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 너와 세영이를 좀더 꼬옥 붙잡으면서 시인한다.


“응, 잘하고 있어, 세란아,” 너는 속삭인다. 그리고선 몸을 살짝 숙여서 쌍둥이 동생의 이마에 작은 키스를 남긴다. 안심시키려고 한 행동이었지만, 세란이는 움찔하고선 예상치 못한 공포가 서린 눈으로 널 쳐다본다. 혹시 실수한건가 싶어서 마음이 저려온다. 하지만 세란이는 틀림없이 심란해 보였으면서도 너를 밀쳐내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너의 손가락은 여전히 세란이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있으니까. 아직은 접촉해도 괜찮은 모양이다.


슬픔에 잠기는 너의 눈을 보자 잘못 반응했다는걸 깨달은 세란이. “젠장. ㅈ-저-정말 미안해. 그냥... 갑자기... 그럴줄은 예상조차 못했어,” 너의 눈을 피하면서 속삭인다.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서, 너가 계속 두피를 마사지 할 수 있도록 손에 다시 머리를 기댄다. 정말 좋은 느낌이어서 이게 자주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이거 세영이 형한테만 하는거 같아서, 그래서… 어어...” 유치하게 들려서 부끄러워져서 말끝을 흐린다.  


“괜찮아, 세란아,” 쌍둥이 동생의 손을 꼬옥 잡으면서 대답한 세영이. “딱히 우리가 사귄다고 해서 키스한건 아니거든. 그런걸 거창하게 여기는 타입이 아니야. 그런 작은 키스는 감사와 편안함을 표현하는 일종의 방식이야.” 너를 대신해서 설명해주자 동의의 뜻으로 끄덕인다. “젠 형이나 유성이하고도 그런짓 해봤을걸.”


“그래도, 가장 많이 키스받는건 세영이야. 순전히 데이트하는 사이니까.” 꺄르르 웃으면서 너는 말한다. 얼굴이 새빨개지자 무안해져서 너에게서 고개를 휙 돌릴수 밖에 없는 세영이. “걱정하게 했으면 미안해, 세란아. 갑자기 그러기 전에 먼저 설명했어야 하는 건데. 특히 지금은 더더욱. 의도치 않게 선을 넘어버렸어.“


“아! 아, 아니, 그런거 아냐! 괜찮아... 너... 너가 잘못한건 없으니까,” 너를 안심시키고 싶어서 서둘러서 쏟아져 나오는 말. “실은… 정말 좋아했어. 밀쳐내서 미안해.”


“미안해할 필요 없어, 세란아. 그래도, 좋아했다면… 자.” 그렇게 말하면서 너는 다시한번 꼬옥 껴안고 이마에 입술을 갖다 댄다. 스르륵 감기는 세란이의 눈. 입에서 새어나오는 만족의 소리. 손을 때자 세란이는 허리를 숙여서 다시 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나... 내가 들을 수 있는 마지막 소리가 뭔지 알거같아. 아니면… 내가 듣고 싶은 거야.” 속삭임을 들으려고 온갖 힘을 다해 귀를 쫑긋 세우는 세영이와 너. “너… 조금 전에 콧노래 불렀잖아. 그거… 다시 듣고 싶어. 들으면서 긴장 풀렸거든.”


단순한 부탁이지만 너는 기쁘게 실천한다. 곧바로 조용한 콧노래를 시작하면서 눈을 감는다. 온기를 향해 너와 세영이의 품속으로 파고드는 세란이는, 할수만 있다면 영원히 이 상태로 있고싶어진다. 콧노래를 계속하면서, 세란이가 물어본 걸 좀더 깊이 곱씹는다.


쌍둥이 동생을 구출하기 전 세영이와 보낸 시간들이 떠오른다. 정확히는 세란이를 만나러 민트아이에 처들어가기 전의 기억이다. 리카의 오피스텔의 침대에 누운 세영이와 너. 전날 있었던 일 때문에 기진맥진 해서 너의 무릎을 베개삼아 잠에 빠지던 세영이. 지금 세란이에게 하는 것처럼 머리를 쓰다듬던 너. 그리고 자장가 불러달라고 했던것 까지. 오늘날까지도, 적발의 해커가 그런걸 물어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실마리조차 잡히지 않는다. 그치만 지금 그런 것처럼 군말 없이 부탁을 받아들였지. 지금까지도 세영이와 보낸 가장 좋아하는 추억들 중 하나여서, 떠올리니까 기분이 좋아진다. 쌍둥이가 이렇게까지 닮을 수 있다는건 신기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다.   


“다음 단계 준비됐어, 세란아?” 계속 흥얼거리다가 너는 입을 연다.


“으응?” 한손으로 비비면서 뜬 눈으로 너를 바라보는 세란이. 잠시 깜박 잠든게 아닌가 궁금해진다. “응, 어. 끝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좀 많이 피곤해지거든,” 무안한 미소를 곁들인 설명.


“괜찮아. 아티반 먹으면 피곤해질거라고 했잖아. 지금 가서 누울래?” 너는 물어본다. 잠시 세영이 쪽을 힐끗 보자 아예 잠에 빠진 남친이 눈에 들어온다. 너의 다른 어깨에 침을 흘리는걸 보자 깨우지 않을려고 웃음을 억누르게 된다.


자신이 그러는 것처럼 너에게 기댄 쌍둥이 형을 보자 조용히 웃는 세란이. 세란이에게도 둘러진 든든한 그 팔. 쌍둥이 동생이 일어나고 싶어도,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 “아니, 괜찮아. 기다릴 수 있어. 다음 단계 뭔지 말해줘.”


“너가 냄새 맡을 수 있는것 두가지. 다른것보다 대답하기 어려워도 이해해.”


세란이의 조용한 웃음소리에 너는 깜짝 놀란다. “솔직히 말하면 그게 가장 쉬운 건데.”


“정말? 그럼 그 두가지가 뭔지 말해줘,” 세란이가 좀더 말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싶어서 너는 미소짓는다.


“첫번째는,” 운을 떼면서 손가락 하나를 치켜올리는 세란이, “세영이 형의 허니봤다칩 입냄새야.” 너희 둘은 꺄르르 웃으면서 세영이를 흔들어 깨운다. 세영이는 잠시동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너희 둘을 쳐다보았지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정도로 신경쓰지는 않은 모양이다. 대신 피곤한듯 너에게 부비적거리더니 쌍둥이 형은 다시 눈을 감는다. 그러자 자신의 생각을 좀더 말해줄려고 세란이는 두번째 손가락을 핀다. “두번째는… 항상 너에게서 나는것 같은 정말 좋은 바닐라 향기야.”


“항상?” 너가 놀리자 머리칼 색깔만큼이나 새빨개지는 세란이의 얼굴.


“응! 항상! 미쳐버릴거 같아...” 대답하자 커지는 목소리와, 허공에 손을 내던지는 세란이. 그의 답변에 너는 웃으며 다시 세란이를 꼬옥 껴안고선 새빨간 뺨 양쪽에 키스를 남긴다. 너가 떨어지자마자 즉시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부끄러움을 숨기려고 하는 세란이.


“그리고 방금 여러분은 두번째 최마토를 목격하셨습니다,” 너는 무미건조하게 말하면서 세란이를 향해 혀를 내민다.


“ㅊ-최마토?!” 조그맣게 칭얼거리면서 말을 더듬는 세란이.


“최 토마토,” 한쪽 눈을 뜨고 동생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리는 세영이. “그리고 얘 말이 맞아. 넌 지금 최마토야.”


“아직도 그게 뭔지 모르겠다니까! 둘다 나빴어,” 여전히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리려 하면서 칭얼거리는 세란이. 너는 다시 키득거리면서 쌍둥이 동생에게 환하게 웃어보인다.


“며칠전에 내가 세영이한테 붙인 별명이야. 지금 너만큼이나 새빨갛게 얼굴 붉히니까 머리색하고 똑같다고 토마토라고 농담했어. 그리고 ‘최마토’를 내뱉었고... 나머지는 전부 알겠지,” 너는 설명하면서 부드럽게 네 남자친구의 머리를 토닥인다. 다른 손으로 세란이를 쓰담하는 것처럼.


“그것 참... 바보같아. 두번 다시는 나 그렇게 부르지 마,” 너를 노려보면서 세란이는 그렇게 말한다. 정말로 화난게 아니라, 단지 갑자기 놀리는걸 싫어할 뿐이다.


“알았어, 알았다니까. 미안해, 세란아,” 또다른 웃음을 가까스로 억누르면서 너는 말한다. “그러면 마지막 단계가 뭔지 말해줄까?”


대답 없이 여전히 너를, 그래도 조금이나마나 풀어진 눈빛으로, 노려보는 세란이. 너가 다시 입을 열기만을 고대하고, 그럴 낌새가 보이지 않자 한숨짓는다. “계속 할거야?” 기다리다 지쳐서 드디어 너를 부추긴다. 뺨은 이제 덜 새빨개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따뜻한게 느껴지자 문자 그대로 집중할 수 있는 다른게 아무거나 있었으면 하는 세란이.


“너가 맛볼수 있는 것 한가지.” 왜인지는 몰라도 그 말에 다시 새빨개지는 세란이의 얼굴. 어쩌면 처음으로 떠오른 생각이 절대 말해서는 안될, 특히 너의 어깨에 형이 기대고 있을때는 더더욱 입밖에 내선 안될 생각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형이 다시 잠든건지 확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세란이는 위험을 무릅쓸 여유가 없다. 방황하다 너의 입술을 바라보는 두 눈. 정말 보드라워 보여서, 무슨 맛이 날까 잠시동안 궁금해한다. 그 살짝 부풀린 볼은 정말이지, 매우 구미가 당긴다. 하지만 다시 위를 올려다보자 빤히 바라보는 너의 시선을 만난다. 어리둥절해 하는 너의 표정. 궁금해서 올라간 눈썹 하나.


“어... 딸기맛 아이스크림?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맛이야. 지금 냉동고에도 좀 남아있는데,”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 너가 좀더 추궁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물론, 인생은 항상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너가 실제로 말하고 싶은건 그게 아니지 않아?” 그렇게 물어보는 너의 목소리는 속삭임에 가깝다. 어떻게 대답할지 확신할 수 없지만, 좌절해서 가늘어진 민트빛 눈이 시선을 피할땐 별로 놀라지 않는다. 다시 들리는 한숨, 이마에 가져다 대는 손.


“응, 당연히 아니야! 하지만 말하고 싶은거, 절대 못말해!” 고함 그리고 다시 올라가는 손.


“젠장, 세란아, 그냥 키스하라니까,” 세영이가 투덜거리자 너희 둘다 깜짝 놀라서 흠칫한다.


“ㅁ-뭐?!” 너와 세란이 둘다 말을 더듬는다. 쌍둥이 형을 바라보는 너희들의 얼굴은 새빨갛게 불타오른다.


“원하는게 뭔지 다 티난다니까. 만약 이게 도움이 된다면, 왜그런지 알거같아. 지금까지 계속 세란이를 안심시켜주고 공황발작을 이겨낼 수 있게 도와줬잖아, 만약 내가 세란이라면 나라도 널 키스하려 들걸, 지금당장,” 다시 똑바로 앉고 눈을 비비며 잠을 몰아내는 네 남자친구의 설명.


“세영...” 세영이가 고개를 젓자 너의 말은 끊긴다.


“너희 둘다 사랑해. 그리고, 이런게 자주 있는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약 세란이에게 도움이 된다면 난 괜찮아. 하지만, 자기가 괜찮지 않다면, 당연히 최종 결정권은 자기에게 있어,” 직접 입술을 가볍게 맞추면서 말하는 세영이.


이 상황에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서, 너가 바라보자 시선을 회피하는 세란이. 한편으로는, 형 말도 일리가 있다. 정말 간절히 너를 키스하고 싶다. 그래도... “아니. 내가 형 여친한테 키스할 리가 없잖아, 세영이 형. 그걸 원하더라도 괜찮아질거 같진 않은데,” 서늘하다 못해 싸늘한 세란이의 목소리. “바보짓 그만해.”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몰라서 너는 한숨을 내쉰다. 애초에 어쩌다가 이런 흐름이 된건지도 모르겠다. 실망한 세란이와, 그리고... 지금 정말 자신없어 보이는 세영이. “이마나 뺨에 하는 키스는 좀 사적이라고 생각하는건 아니지만, 정확히 뭘 원하는 거야? 됐어, 세영아. 아니. 안할거야,” 단호한 목소리로 너는 말한다. 남자친구의 얼굴을 두손으로 잡은 다음 너를 바라보게 돌린다. 서로의 이마를 맞대고 찬란한 금안 한 쌍을 바라본다. “어차피 너가 바라는건 그게 아니라고 얼굴에 다 적혀 있거든. 그러니까, 다음부턴 그런거 괜찮다고 널 몰아붙이지 마. 알았지?”


“아-알았어...” 네 목소리에 담긴 강경함에 깜짝 놀란 답변.


“좋아, 그럼 이제... 모두 침대로 갈까? 네 동생한테 키스할건 절대 아니지만, 지금쯤이면 껴안고 쓰담해줘도 괜찮을거 같거든. 그리고, 어차피 우리 세명이 모두 누울 정도로 넓잖아,” 너는 추천한다.


“그거라면 찬성임요.”


다시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이번에는 너의 말에 반대하지 않은 세란이. 분명 너희 둘은 그 결정을 미리 내렸고... 한명도 아니고 두명이나 붙어 있다면 도저히 거절할 수 없겠지. 그리고 모두가 눕기 전에, 너는 세란이의 팔을 치료해야 한다는걸 지적한다. 손톱이 파고든 흉터에 알코올을 바르는건 쓰라려서 세란이는 움찔하지만, 감염되지 않으려고 그러는걸 알고있다. 너가 한 팔에 붕대를 감을 동안 세영이는 다른 팔을 맡았다. 너희 둘이 작업할 동안 세란이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두사람이 보여주는 정성에 감사해한다. “고마워,” 감사의 속삭임. 붕대를 다 감자 너와 형에게서 포옹을 받는다.


침실에서, 너와 세영이는 세란이를 사이에 두고 자기로 결정한다. 그렇다면 만약 공황 발작이 다시 닥쳤을 때 (자신의 방이 아닌 곳에서 일어난다면 그럴 거란 예감이 든다), 최소한 너희 둘과 있으면 안전하다고 느낄테니까. 둘 사이에 남자친구의 동생을 두는건 이상했지만, 그래도, 오늘 세란이가 나아진걸 보니까 기분이 좋아진다. 만약 상황이 또 악화된다면 같이 거쳐간 단계를 기억하길 바라지만,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기쁘게 다시 이끌어 줄 수 있다.


아직도 이 모든 일이 어쩌다 일어났는지 어리둥절한 세란이, 하지만, 세명이 침대에 드러누웠을때... 너와 형 사이에 껴있어서 기쁘다. 너희 둘이 세란이의 품으로 파고 들자 조금 전 너희에게 느꼈던 사랑이 다시 느껴진다. 물론, 키스는 아니였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공황 발작은 잊혀진 채, 세란이는 이 소소하고 조용한 순간을 즐기고 감사해한다. 회복을 향한 작은 한걸음이다. 너희 둘이 곁에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해낼 수 있으니까!


오래 지나지 않아 너희 세명은 달콤한 잠에 빠진다.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긴 대화를 나눠야 할거라는거 알고 있지만, 그렇지만, 지금만큼은... 너희 세명이 느낄수 있는건 서로의 온기 뿐이라는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1. Ativan. 로라제팜Lorazepam의 상표명. 벤조디아제핀Benzodiazepine계 의약품이며 강력한 항불안제이다. 진정/최면, 근육이완, 불안 완화, 건망증, 경련 억제 등의 작용이 환자의 상태에 따라 부작용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이상 스피드웨건 이었습니다! [본문으로]

슈이치 한살 더먹은거 축하해! 우리는 아직 너를 잊지 않았어


취미: 아직 살아있는애 미리 죽이기...가 아닙니다(feat. 설득력 없는 설득)

가상현실+검정피해자 전부 생존+슈이치의 죽음이 진정한 종결이었다는 (아직까지도 확고한) 뇌피셜 기반이에요

공식에서 그 고생을 했으면 차라리 죽음이 안식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물론 이건 차선이고, 최선은 당연히 꽃길만 걷는 겁니다. 보고있냐 코다카?


시간이 지나 단간론파라는 이름은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건만. 사람들은 결코 그 이름을 잊지 못했다.


초고교급 탐정 사이하라 슈이치.


비난의 화살을 돌릴 희생양을 성난 군중에게 던져주는것 만큼 독재정권이 애용하는 기만은 없다. 희망이란 이름의 절망을 찬양하는 사회를 만들길,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디스토피아에서 절대 권력자로 군림하길 원했던 팀 단간론파도 예외는 아니였다.


사이하라 슈이치. 유명 배우와 각본가의 아들. 유명 탐정의 조카. 중성적인 수려함. 예리한 두뇌. 언행 하나하나에 배어 나오는 배려. 모든것이 질투를 사고도 남을 정도로 완벽한 존재였다. 상대가 우수할수록 시기심은 더욱 커지는것이 당연지사. 그러기에 그는 최고의 미끼가 되어 내던져졌다.


여기까지가 모두가 쉽게 추론할수 있는 이야기.


태어난 순간 사라져버리고 싶다면서 울부짖은, 제한된 사랑만을 바라보며 고독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서 죽지 못해 살아간, 사람의 온기가 무섭다면서 흐느끼며 주저앉은 너에게 단 한번이라도 눈길을 준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아니, 유혈과 유흥에 굷주린 시청자들은 그런 결함 따위는 신경쓰지도 않았다. 우울 등의 감정은 소비되어 버릴 뿐. 굶주린 사자들이 오랜만에 던져진 고기가 상했다고 먹지 않을리는 없으니까, 오히려 그들은 신나서 달려들었다. 설정이라도 고등학생인 캐릭터를 성적으로 소비하는것이 암묵적으로 허용된건 사회의 뒤틀린 윤리관이 반영된 결과겠지.


마지못해서, 동시에 살고 싶어서 결연히, 픽션의 파도에 익사하도록 자신을 내던질 정도로 벼량에 몰린 너에게 단 한명이라도 손을 뻗었다면 무언가가 달라졌을까?


아니, 오히려 그런 너의 결점이 최종적으로는 종결을 불렀다.


유약하고, 두루뭉술하고, 유유부단하다면서 너는 비난받았다. 탐정 주제에 남을 신뢰해도 되냐면서. 주인공이 되지 말았어야 했을 주인공이라면서. 하지만 너가 주인공이 아니었다면 단간론파는 영원히 끝나지 않았겠지. 너에게는 자신의 본모습으로 미움받을 지언정 자신이 아닌 모습으로는 사랑받고 싶지 않다면서 거짓말쟁이로 살아가기보단 진실쟁이로 죽는 결말을 택할수 있는 신념과 용기가 있었다. 자신만의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


지금 하려는 것은 지금까지 해 온 어떤 행동보다도 훨씬 더 숭고한 일임을, 그리고 이제 지금까지 알았던 그 어떤 안식보다도 평안한 안식을 향해 갈 것임을 알기에 당당하게 나아간 너의 뒷모습이 아직까지도 계속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그때 내가 네 이름을 외쳤다면, 손을 뻗었다면, 너는 뒤를 돌아봤을까, 내 손을 잡아줬을까? 아니, 지금 후회해봤자 달라지는건 없겠지. 역사에 만약은 없으니까. 너는 과거에 남기로 했으니까 나는 현재를 살아가야겠지…  


그때부터 너의 생일에는 항상 비가 내렸다. 24절기에서 백로에 해당되는걸 감안해도, 아침부터 해가 질때까지, 너의 머리색을 닮은 구름에선 비가 끊임없이 퍼부었다. 책에서 백로에 비가 오면 풍년이 들 조짐이라고 했던것을 기억한다. 분명 좋은 징조인데도, 정말 착한 사람이 죽으면 하늘도 슬퍼한다는 말이 생각나서 마냥 기뻐할 수 만은 없었다. 너의 죽음에 다수는 기뻐하겠지만 하늘만큼은 슬퍼하는구나. 이 말이 입안에서 씁쓸하게 맴돈다.


너의 두 눈은 한쌍의 달처럼 빛났다. 처음에는 탁하고 흐리멍텅한 회색으로만 보였는데, 진실을 마주할수록 찬란한 금빛이 되었다. 마치 구름이 걷히고 환한 달이 드러나는 것처럼. 네 생일은 그믐달이 나타나는 마지막 날이라는게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랄까. 아냐, 사이슈라고 이름붙여진 너다운 달이네.


최후의 달이 지지 않았더라면 지금 내가 눈을 깜박이고, 손가락을 움직이고, 숨을 내쉬는 일은 없겠지. 너가 불러일으킨 변화를 지켜보는 일은 없겠지. 전부 네가 있어서 이뤄질 수 있었어.


단간론파의 종결 1주년 축하해. 절망에서 해방된지 1년된거 축하해. 그리고, 그리고-


열아홉번째 생일 축하해! 너는 태어난걸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우리는 네가 태어난걸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어. 서로를 적으로 돌리게 되는 사회에서 너는 진실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희망이 되어주었어. 우리가 나아갈 새로운 길을 밝혀주었어.


모두가 정의라고 믿어온 틀이 틀렸음을 지적하고 더 옳은 길을 향해 첫걸음을 내딛은 최초의 사람들은 항상 비난받았지. 다행히 시간의 흐름이 재평가의 여지를 주었지만서도. 너도 역사가 된다면 오명을 떨쳐낼 수 있을거야. 아니, 떨쳐낼거야. 우리가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목소리를 낼 거니까!


저기, 네 이름 불러도 괜찮을까?


사이하라, 사이하라 슈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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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교급 탐정의 독백  (0) 2017.08.22

문: https://archiveofourown.org/works/12344961

Ao3의 cheinsaw님, 정말 감사합니다 

원제는 'Song to say goodbye'


시험 끝나신 분들, 노력 안해도 좋은 결과 얻었길 바라고 아직 시험 안보신 분들은 뭐하는 거야 빨리 창 닫고 공부해


고객의 숫자를 늘릴려면 컨텐츠의 가짓수를 늘리면 되겠지


문체에 변화를 꾀하고자 주어+동사->형용사의 기능을 하는 동명사+주어 위주의 서술, 현재형에서 카에데가 엮이면 과거형이 되는 서술의 시차 교차, 그리고 호칭 없이 요비스테(=그냥 이름으로 부르기) 위주로 번역해 보았습니다. 무슨 소리인지 1도 모르겠죠? 괜찮아요. 깔끔하게 무시하세요.


그리고 이제부턴 외래어 그대로 쓸거야. 플러팅을 플러팅이라 쓰지 못했던 과거 이젠 아디오스 사요나라 오르보와다!


항상 한결같았던 카에데. 기억을 싹 지워내도 잊을 수 없었던 명랑한 성격, 다른 사람들을 쥐고 흔들긴 했지만, 마음씨 고왔고, 항상 모두에게서 장점을 찾아낼 준비가 되어 있었지. 이제 마키는 기억한다. 한참 늦었을때 기억해낸다.


세명의 생존자들과 부서진 키보와 시로가네의 잔해를 회수하러 다가오는 팀 단간론파 스태프들. 저항하지 않고 따르는 마키. 바들바들 떠는 사이하라. 울음을 터뜨리는 유메노. 하지만 마키에게는 그 무엇도 상관 없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은 전부 죽었으니까.

마키는 퇴장 양식과 비공개 합의서에 서명하고선 운영진에게 심리치료는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진짜 세계에서의 기억을 복구하고 싶으신가요? 한명이 물어보자, 마키는 눈을 굴리면서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한다. 진짜 기억이라면 적어도 시로가네가 준 암살자 과거에서 한발 나아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되겠지. 지루하고, 평범할지도 모르지만, 고통스럽지 않고, 가혹하지 않고, 학대와 고문으로 이뤄져 있지 않겠지.

대신 더 최악의 것을 받게 된다.


처음으로 키스했을때, 카에데가 마키에게 허리를 숙이고 서로의 입술이 맞닿았을때 그들은 열두살이었다. 얼굴이 새빨개진채 소리지르는 마키. "방금 그거 뭐야!"


반면 꺄르륵 웃는 카에데. "미리 연습해야 하니까? 크면 남자애들한테 키스해야 할 때가 있지 않을까."

씩씩거리는 마키. 고아원 남자애들은 전부 징그러운걸. 수줍음을 많이 타서일지도 모르지만, 카에데는 마키가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마키의 기억에선 항상 함께였다, 마키의 내향적인 성격과 완벽히 상호보완적이었던 카에데의 외향적인 성격. 어느날 남자들 때문에 헤어지게 된다는 생각에 뒤틀려지는 속.

"난… 그런거 관심 없어." 마키가 그렇게 말하자 카에데는 볼을 부풀리며 뒤돌아섰다. 둘중 그 누구도 두번 다시 그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밤, 카에데와 다른 여자애 3명과 같이 쓰는 비좁은 침실에 누워있을때, 머릿속에서 키스를 몇번이고 재생했다.


죽은 사람들을 생각할때마다 무언가가 마키의 가슴을 옥죄어온다. 카에데와의 기억이 정말로 일어났다는걸 확인하기 위해 몇번이고 팀 단간론파 소속 심리학자의 상담실 문을 두드리게 된다. 어느 대답이 더 나쁜지 모른다; 예 혹은 아니요. 의사가 단순히 살인 게임동안 끈겼던 기억을 복구하는 것뿐이라고 했을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녀와 유메노와 사이하라는 저명한 토크쇼, 잡지 인터뷰, 사진촬영, 파티에 초대된다. 인터뷰 진행자들은 항상 모모타에 대해 물어본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더이상 그런 행사에 가지 않는다.


처음이야.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건.


잠을 청할 수 없는 밤(자주 있는 일이다)마다, 낮에 비는 시간이 생길때(항상 있는 일이다)마다 머릿속에서 몇번이고 되풀이되는 그 한마디. 너무나도 생생해서 매번 다시 체험하는 것만 같다. 칼을 움켜쥐는 손. 눈물을 삼키자 메어 오는 목.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건 처음이라고 말하는 입.

하지만 그것마저도 거짓말이다. 그 역겨운 게임의 모든게 그랬듯이. 1~2주 동안 순식간에 피어난, 동경이란 이름의 그 감정은 카에데에게 느꼈던 감정-해가 지날수록 깊은 사랑으로 변한 어린 시절의 우정-과 비교하면 덧없기만 하다. 그냥 비극적인 커플이 좋더라고, 뭔지 알지? 열네살이었을때, 시즌 49 도중 초고교급 무녀가 초고교급 화가의 처형을 멈추러 하다 갈가리 찢어졌을때, 카에데는 그렇게 말했다. 이제 마키는 전부 이해한다. 전부 거짓이야, 전부 사람들의 목숨과 죽음을 엔터테인먼트로 소비하면서 심금을 울릴려고 만들어졌지.

누굴 가장 혐오하는지 마키는 모른다: 시로가네, 작가들, 아니면 자기 자신.


씁쓸하고 쌀쌀한 이월의 아침, 마키는 먼저 열일곱살이 되었다. 또 꺼진 고아원의 난방과, 얼음장 같았던 마키의 손발. 비몽사몽 옆에 있는 카에데의 이불을 걷어내고 최선을 다해 파고들었다.


"우웅... 생일 축하해," 눈뜨지도 않고 그렇게 말하던 카에데. 굴러오더니 마키에게 팔을 둘러, 서로의 몸을 밀착시켰다. 마키는 온기에 감사했다. "선물 준비했는데... 나중에 보여줄게."

“으응." 손가락과 발가락 끝으로 퍼지는 온기에 집중하던 마키. 오래 지나지 않아 카에데의 품속에서 다시 잠들었다.

선물은 바로 카에데가 마키와 어린애들 몇명을 청중 삼아 고아원의 낡은 피아노로 연주한 오리지널 송이었다. 마키를 위해 박수치던 모두와, ‘생일 축하해’ 합창을 주도하던 카에데. 그러자 이번이 고아원에서 자란 것을 축하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란걸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서 웃던 마키.

3월의 끝이 가까워질 무렵, 덜 요란하게 찾아온 카에데의 생일. 하지만 마키는 선물을 직접 만드는 타입도 아니였거니와, 카에데의 피아노 솜씨도 없었다. 어느 날 밤 카에데에게 이 사실을 고백했지만 카에데는 웃어넘기면서 선물은 필요 없다고 말했다. "너랑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쁜걸!" 그 대답에 콩닥이는 마키의 심장.

그해 봄 단간론파 시즌 52가 방영되고, 계절은 순조롭게 여름으로 흘러갔다. 늘 그랬듯이, 일주일에 한번씩 방과후 PC방에서 어김없이 서로 껴안은 채 고아원에선 보지 못한 회차들을 마저 정주행하던 카에데와 마키. 여름이 가을에 가까워질 무렵 시즌 52에는 6명의 생존자들이 남겨졌고, 팀 단간론파는 시즌 53 참가자 오디션 공고를 올렸다.

단간론파 V3에 출연하고 싶으신가요?
...신청 마감 기간 12/1/20XX
20XX년 4월 1일 기준으로 18세에서 24세 사이여야 할 것... 외관상 16세에서 18세 사이처럼 보여야 할것.
...선택된 참가자들은 20XX년 1월 1일까지 추가 정보를 위해 연락...

소식지를 훑어 보자 마키의 눈에는 문장 몇개만 들어왔다. 전에는 그딴 쇼에 참가한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는데, 가능성이 아에 없는건 아니었다: 신청 마감일 거의 2달 전에 18살이 될거니까.

오래 지나지 않아 그 생각은 떨쳐 버렸다. 자신같은 소녀에겐 끔찍한 생각이니까.

"있지, 우리 곧 고아원에서 나와야 할 나이잖아. 단간론파 참여 오디션 보지 않을래?" 카에데가 물었다.

마키는 손을 뻗어 꽁지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너가 한다면."


둘다 붙었다.


"세상에, 마키, 마키, 왔어," 고아원의 우체통에서 빨갛고 검은 편지봉투 두장을 꺼내면서도 흥분돼서 파르르 떨리던 카에데의 목소리. "아, 못기다리겠어, 지금당장 열어볼거야!"

"일단 안에 들어가자," 칭얼거리면서 썩 내키지는 않지만 현관까지 카에데를 끌고 가려던 마키. "추워…"

"아, 알았어," 그러자 서둘러 안에 들어가던 카에데. 들어가자마자 가방을 내던지고, 자신의 이름이 적힌 봉투를 열기 전까진 신발을 벗을 생각도 하지 않던 카에데. 마키는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이럴때 카에데를 관찰하는건 항상 즐거웠으니까. "세상에, 마키!"

"너—"

"붙었어! 초고교급 피아니스트! 세상에!"

"내꺼도 열어봐." 그렇게 말했지만 마키는 자신의 봉투에 별로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간에 카에데를 축하해줄거지만.

"확실해?"

"으응."

"알았어." 이번엔 더 우아하게 봉투를 열면서도 파르르 떨리는 카에데의 손가락. 그러자—"마키!" 신난 외침. "우린 단간론파에 나올거야!"

"우리 둘다?" 마키는 믿겨지지 않는다.

"우리 둘다! 넌 초고교급 보육사가 될거야! 세상에, 마키, 정말 기뻐!" 마키를 꼬옥 끌어안으면서 꺄르르 웃던 카에데. "우리가 해냈어!"


팀 단간론파 시설은 높은 철책으로 둘러쌓인 커다란 벽돌 건물이었다. 첫 시즌의 희망봉 학원이 그랬듯이. 카에데와 마키는 프론트 데스크에서 체크인했다. 비록 대부분의 말을 한건 카에데 였지만서도. "시즌 53 참가자들, 아카마츠 카에데와 하루카와 마키요," 자랑스럽게 말하던 카에데. 이름이 적힌 종이에 사인하면서 정갈한 글씨를 훑어보던 마키.


그날은 기다리고 문서를 확인하고 포기 서류를 작성하고 브리핑을 듣느라 순식간에 흘러갔다. 마키는 이번 시즌에서 계획된 자신의 역할과 희망 사항을 확인하기 위해 팀 단간론파 소속 심리학자에게 불러갔다. "하루카와양," 입을 연 의사. "이번 시즌의 다크 호스."

"뭐라고요?" 호기심과 두려움에 똑같이 사로잡힌채 마키는 물어보았다.

"보육사잖아, 그렇지? 애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

"글쎄요, 그냥 그런데."

"그럼 그게 다른 재능을 위한 위장용 재능이라면 어떨거 같아?"

마키는 발끝만 바라본다. "그건… 괜찮을 거 같네요."

의사는 끄덕이더니 무언가를 끄적였다. 심장이 철렁 내려 앉았지만,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저기, 카에데?"


"으응?" 마키와 같이 잘 팀 단간론파 게스트용 침대에서 뒹굴거리던 카에데. 내일부터 시즌 53 촬영이 시작되고, 둘다 잠들 수 없었다.

"할말이 있는데 괜찮아?"

"응, 당연하지! 말해줘!"

마키의 가슴이 납덩이처럼 딱딱해졌다. "원래...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되지만, 그치만, 너라서 말해주는거야... 나는—나는 사실 초고교급 보육사가 되지 않을 거야."

"어? 하지만 합격통지서에는—"

"아니, 아는데, 그치만... 그건 위장용, 이랬어. 내가... 내가 실제로 될 건 바로—" 마지못해 입을 열자마자 눈물이 차오르던 마키의 눈. "초고교급 암살자야."

혼란스러워 보였던 카에데. "암살자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갈라져가던 마키의 목소리. "나는 너처럼—강하지 않아."

"아, 마키..." 멈춰서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카에데. "너가 검정이 될까?"

"모르겠어," 조용한 마키의 대답. "말이 안되는건 아닌데, 그치만..." 나에게는 피해자가 더 어울리는걸,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살아남지 못할거란건 확신했다. 애초에 그럴 계획도 없었는걸. 생존은 카에데처럼 그걸 누려야 마땅한, 강하고 용감한 참가자들의 것이니까.

지금 이 순간이 카에데와 보내는 마지막 밤이 될거란걸 갑자기 깨닫자 울음이 터지면서 몸이 떨리는걸 마키는 느꼈다.

"저기, 괜찮아, 울지 마," 그렇게 말하면서 카에데는 재빨리 일어나 앉아, 마키를 꼭 끌어안았다.

"나, 난 죽을거야," 카에데의 어깨 너머에서 말을 잇지 못하던 마키. "난 죽을거고, 너도 알잖아, 기억을 지우니까 넌—넌 나를 잊어버리겠지."

"마키," 카에데는 말했다. 마키가 두 눈을 바라볼 수 있게 한발 뒤로 물러났다. "난 너를 절대 잊지 않을 거야, 알았지? 사랑해.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리고 내 마음은 너도 나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영원히 간직할 거야," 두 손으로 마키의 얼굴을 감싸면서 속삭이던 카에데.

"카에데," 흐느끼는 마키. "카에데..."

"쉿," 그렇게 말하면서 카에데는 마키의 이마에 키스를 남겼다. "울지마, 알았지? 오늘밤은 슬퍼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사랑해. 사랑해."

"나도 사랑해," 마키는 눈물을 참으려 하면서 거의 흐느끼다시피 속삭였다. "정말 사랑해."


마키가 기억하는건 그게 마지막이다. 그 후 감옥 안의 교실 바닥에서 일어났다. 빨갛고 검은 세일러복 교복과 암살에 관한 기억과 아스라히 오래된 과거의 어렴풋한 기억속 소녀들과 함께.


이제 마무리되지 않은채 버려질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마키가 두번다시 되돌려받지 못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참으로 끔찍하고 끔찍한 낭비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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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s://archiveofourown.org/works/12914505

Ao3의 Pantachan님, 감사합니다.

원제는 'I'll kill you if you let go'


날짜는 숫자에 불과합니다(당당)


시험기간이었다고 들었어요. 노력한만큼 아니 노력 안해도 좋은 결과 얻었길 바라고 아직 시험 안 보신 분들은 좋은 결과 얻으시길 바랍니다 이미 이 글을 읽고 있는 시점에서 망했지만!


지난번의 ‘작품’이 여러가지 의미로 무거웠던 관계로, 잠시 쉬어가는 셈치고 가볍게 치유물 한판 때리고 싶었습니다. 근데 분량은 결코 가벼운거 같지 않은데… 어 왜 눙무리 흐르지


Sickfic, 애를 아프게 해놓는 스토리 좋아해요! 중병이나 시한부 설정이 아니라 감기처럼 (상대적으로) 가벼운 질병. 공식에선 절대 아플지 않을거 같은 애가 약한 모습 보여주고 소울메이트가 상냥하게 간호해주는 치유물같은거. 아아 너무좋아

희망봉/비절망 AU에서 둘이 동거하는 설정이라고 행복회로 신명나게 돌려...볼려고 했지만 아직 살인게임 설정이란걸 깨닫고 절망


영원한 불공대천의 철천지원쑤 호칭문제… 이번엔 ‘슈이치짱’ ‘오마군’ 그리고 나레이션은 이름으로 고정했습니다. 딱 한번 '코키치군'을 썼는데 오타가 아닙니다. 그러나 나레이션과 오마의 생각이 헷갈리게 되는 참사가아아아아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태그에 Taking care of a sick grape가 있었습니다. 아픈 포도 돌보기라니 아 귀여워어어


코키치의 가슴이 격하게 두근거리고 목 뒷덜미에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진통제를 삼켰는데도 머리의 욱신거림은 전혀 멈추지 않은것 같았다. 심한 현기증 때문에 방이 빙글빙글 회전하는것 같아서 생각하는게 쉽지 않았다. 조용히 악담을 퍼부으면서, 종이와 연필을 내려놓았,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침대 옆 바닥에 떨어뜨렸다. 이제 더이상 개의치 않았다.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지난 몇년간 이렇게 심한 감기에 걸린적은 없었지만, 지금은 가장 비생산적인 순간이었다. 오마 코키치는 아프지 않았다. 의지력, 건강하고 동시에 허약한 몸, 많은 활동량과 좋아하는 음식으로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 아무 일이나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살인게임에 갇힌채 아픈건 인생에서 필요한 마지막 일이었다. 노려지기 쉬운 타겟이 된건 물론, 괜찮은 척 하는게 가면 갈수록 어려워졌다. 결국 여러 가지 약과 간식 잔뜩, 그리고 방에서 차를 끓일 재료와 도구를 가져오기로 했다. 그러나 당연하지만 계획에 집중하려고 아무리 애써도 몸이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이래 가지곤… 더이상 못해…! 한시라도 빨리 멈추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못할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머리에 손을 파묻었다. 두통 때문에 얼굴을 찡그렸다. 모든 것들이 전부 좋아질때까지 한숨 자라고 명령했지만,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할거야, 마음이 몇번이고 계속해서 속삭였다.


하지만 눈이 불처럼 화끈거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바꿀 수 없었다. 눈물의 장막 너머로 그리려고 하는건 어려웠다.


녹초가 된 채로 매트리스에 자신을 내던지자 길고 짜증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이딴 바보같은 병…정말 싫다고…아무것도 안되잖아…이젠 싫어…”


익숙한 무력감이 가슴을 메이게 했고 눈물이 눈을 떠나겠다고 위협했다. 팔로 재빨리 닦아내니까 너무나도 비참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아플때 혼자 있는건 싫었다. 돌봐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약간의, 어쩌면 많은, 애정과 그만 쉬고 자신을 돌보라고 강요해줄 사람을 갈망했을 뿐인데. 하지만 그럴 사람이 있을리 만무하고, 게다가, 정말 일해야 했다…


갑자기 노크소리가 들리자 움찔할 수 밖에 없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를 놀래키지 않게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노크하는 사람은 딱 한명밖에 없었다.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슈이치짱이라는걸 알고 있었다. 슈이치짱은 그가 자신을 고립시킨다는걸 깨달았을까. 슈이치짱이라면 틀림없이 걱정되었겠지, 슈이치짱이 도와주러 왔다, 슈이치짱, 슈이치짱, 슈이치짱. 적잖게 당황하면서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선 결국엔 문을 열거라는, 탐정을 들여보내면 처량한 기분이 들거라는 생각을 애써 억누르러 했다.


“오마군…? 잠깐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슈이치의 조용한 목소리가, 조심스럽고 걱정으로 가득 찬 목소리가 문 너머 그에게 닿았다.


“…뭔데 그래? 나 지금 바빠, 바보 탐정이랑 게임할 시간은 없어! 중요한 총통의 업무가 있단 말이야!” 그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혼란스러운듯 짜증난 목소리였지만 단호함이 결여되어 있었다. 슈이치는 몰랐더라도 최소한이나마나 진실이 일부 담겨져 있었다.


“진심… 처럼 들리지 않아. 나도 자물쇠 딸 수 있잖아, 기억나…?”


아, 맞다. 슈이치짱에게 탐정일에 도움이 될만한 기술을 알려주겠답시고 가르쳐줬으니까. 당연히 또다른 밀실 사건이 일어나면 1순위로 의심을 사지 않게 위해서라는 말 따위로 포장했지만, 그치만…


슈이치짱은 정말 필요하다면 자신의 거짓말을 논파할 수 있으니 저항은 무용지물이란걸 알고 있었다. 만약 걱정이 너무 커지면 엄청난 시간을 들여서라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낼 테니까. 결국 코키치는 일어나서 도중에 비틀거리다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문을 향했다.


“꼬…꼭 그래야 돼? 그냥 뭘 원하는지만 빨리 말해, 이럴 시간 없다니까….”, 지친 듯 신경질적으로 단어들이 튀어나왔다.


“…제발 문좀 열어주면 안될까? 며칠째 방에서 안나왔잖아, 걱정돼서 그래.”


코키치는 문고리를 쥔 채 멈췄다. 문을 열기 전에 옷매무새와 까치집을 조금이나마나 정돈하고, 눈을 비비고선 가능한 한 건강해 보이게 깊은 숨을 들이마쉬었다.


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드러난 슈이치의 표정으로 판단하건데, 예상보다 훨씬 나빴음이 틀림없었다. 코키치는 탐정을 바라보자 얼굴에 드러난 놀람과 걱정에 얼굴을 찡그렸다.


“ㅇ…오마군, 무슨 일이야? 너…”


“끔찍해 보인다고? 응, 알고 있어, 그러니까 기분이 백배는 나졌네, 고마워, 바보탐정”, 슈이치의 쓸데없는 해설에 짜증이 나서 딱딱거리듯이 대답했다. 정말로 존경하고 높게 평가하지만, 가끔 머리가 너무 둔해빠질 때가 있는 바보 탐정 같으니라고.


그 대답은 탐정의 의심을 약화시킨것 같았지만, 이제 작은 소년을 철저히 검사하는 그의 표정은 숨김없는 우려로 가득 찼다. 그 자각에 속이 뒤틀리는것 같았다. 예상했던 대로야. 물론 슈이치짱이라면 즉시 알았을 테지만. 문을 열지 말았어야 했어.


“아파? 왜 말 안했-“, 슈이치가 입을 열자마자 서둘러서 창백한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최선의 선택은 아니였겠지만, 입을 다물어주기만 한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쉿! 조용히 해줄래? 어서, 안으로 들어오고 계속 조용히 해줘”, 속삭이면서 조심성이라곤 한 줌도 없이 팔을 붙잡아 자비없이 방안으로 끌고가선 인간적으로 가능한 한 빨리 문을 닫았다. 머리가 지끈거려서 얼굴을 찡그렸지만, 그의 부주의함이 더욱 그를 화나게 했다. 물론 슈이치도 그의 행동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아서, 이맛살을 찌뿌린채 회의적인 태도로 그를 마주했다.


“왜? 왜 항상 모든걸 혼자서 하려고 하는거야…? 무슨 일이 있으면 날 믿고 도와달라고 말해도 된다고 했잖아, 오마군!” 가슴에 한 손을 얹은 채 진심을 담은 외침. 아주 조금, 조금뿐이지만, 그 말이 마음속의 스위치를 건드리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 한 구석이 아팠다. 평범한 상황이었더라면 분노로 반응했겠지만, 기력이 없어서 대신 입을 삐죽 내밀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화끈거리고 있었던 터라, 거짓눈물이 차오르는게 평소보다 쉬웠다.


“너-너무해…! 나는…정말 좋아하는 슈이치짱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착한 일 ㅎ-하려고 했던 건데…”, 떨리는 목소리. 조용한 훌쩍임과 울음. 슬픔과 비애로 찡그린 표정. 솔직함이 아예 없는건 아니었지만, 그중 대다수를 두개골을 울리는 고통을 감추는데 썼다. 슈이치의 눈에 걱정이 번쩍이자 시선을 피하고선 대답했다:


“지금… 이러지 마. 컨디션 안좋잖아? 도와줄게… 제발.”


코키치는 몇번 더 훌쩍이고선 가장 마음이 아파오는 표정을 지었다-오래 지나지 않아 밝은 미소를 짓자 눈물이 대부분 사라지긴 했지만. 있는 힘을 전부 짜내서 진이 빠지긴 했지만 슈이치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아직 거짓말같은 기교로 가면을 바꿔쓸 수 있다는걸 알아서 다행이었다,


“니시시! 헤, 재미없어! 조금만 더 장난쳐도 되지? 지난 며칠동안 컨디션 최악이었거든, 재밌게 해줘!” 평소의 장난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끝에 가선 목소리가 마지못해 포기하라고 협박했다. 슈이치는 고개를 젓고선 그의 손을 잡아 조심스럽게 침대까지 끌고 갔다.


“그냥… 누워, 내가 알아서 할게. 컨디션은 어때, 뭐 가져다 줄까?”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면서, 코키치는 순순히 침대에 앉아 이불을 끌어당기면서도 탐정을 향해 활짝 웃고 있었다.


“아이스크림! 그리고 판타도!”


“…아무것도 안 줄거야”, 슈이치는 한숨을 내쉬었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걱정이 점점 커지는것 같았다. 컨디션이 최악임에도 불구하고 가면을 벗으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를 걱정시킨다는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슈이치는 그를 비난할 수 없었다. 너무 비참한 기분이어서 조금만이라도 기꺼이 보여줄 리 없으니까. 심지어 그에게도. 그걸 눈치채야 했지만 코키치는 최소한의 골칫거리라도 억누르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를 내버려 두는 대신에 탐정은 그에게로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보랏빛 머리카락 몇가닥을 걷어내고선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 작은 손짓이 즉시 짜증을 덜어 주었다. 이 작은 행동이 다시 한번 누군가가 곁에 있어주면… 좋겠다는걸 떠올리게 해줬다. 슈이치짱이 곁에 있어줬으면 했다. 그 생각이 가슴을 조이게 했고 더없는 행복을 사라지게 했다. 하지만 안심… 이라 부를만한 것도 있었다. 특히 슈이치짱의 얼굴에 드러난 집중과 진심어린 걱정과 결합해서, 이상하게 마음이 이끌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몇초동안 숨이 평소보다 가빠지고 심장이 계속해서 두근거렸다. 무언가가 안에서 조금 녹아내렸고 잠시 후, 슈이치는 손을 떼고 입을 열었다.


“…이마가 불덩어리야. 내가… 이거저거 가져올게. 방 열쇠…?”


“침대 테이블에” 대답하려면 끝까지 들을 필요도 없었다. 슈이치는 마지막으로 그를 바라보기 전에 고개를 끄덕이고선 열쇠를 집었다.   


“곧 돌아올게, 걱정하지마.”


상냥하고 친절한 목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끄덕이고 슈이치가 방을 떠나고 조용히 문을 닫는걸 보는 내내 기진맥진한 피로에 따라잡히는 것 같았다.


침묵에 집어삼켜져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좋으면서도 동시에 끔찍했다. 곁에 있어주기를 정말 바랬지만, 그건 효율성을 떨어뜨리겠지. 그리고 자신은 엉망진창 인데다가, 방은 훨씬 더 엉망진창 이지만 슈이치짱은 그래도 남아 있어 주겠다고 했다… 그 자각에 심장이 내려앉으면서 동시에 기록적인 수준으로 떨어졌다. 필사적으로 생각을 정리하려고 하다 신음과 함께 포기하고선 매트리스로 자신을 내던졌다. 아마 이번만은 슈이치짱에게 맡겨야 될거같아. 어차피 머리도 제대로 안돌아가니까.


게다가, 만약 자신에게는 정직하다면, 곁에 있어주겠다고 약속했고 증명해준, 신뢰하는 슈이치짱에게 의지하는건 두려웠지만, 오랬동안 필요했던 확신이기도 했다. 하지만, 누군가를 믿고 이 일을 맡긴다는건… 그 생각이 불편한 것처럼 몸을 떨었다. 이걸 할 수 있는건 나 뿐이야, 내 임무인걸. 하지만 생각이 마음대로 안됐다…


코키치는 눈을 감고선 침착하게 기다렸다.


잠시 꾸벅꾸벅 졸았다. 반은 잠들고 반은 깬 채, 몸도 마음도 휴식에 빠지고, 부글부글 끓는 열기, 마음 한 구석에서 딸각거리는 소리도 거의 눈치채지 못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한채, 그냥 베개로 파고들고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몇마디를 내뱉었다. 무언가가 어깨를 조심스럽게 건드리자 온몸이 동요해서 뒤를 돌아보아서 휘둥그레진 눈을 탐정에게 고정시켰다.


“ㅇ-아, 미안… 놀래키려던건 아니였어…”, 슈이치는 사과하면서 다시 손을 내려놓았다. 새로운 냄새가 폐를 채우자 코키치는 고개를 젓고 눈을 비볐다. 어리둥절 해져서 냄새의 근원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곧 침대 테이블 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거운 수프 한그릇과 과일 조금, 많은 물을 발견했다.  


“…며칠동안 제대로 못먹었지? 어제 저녁도 안먹었으니까…”


정말이지 가정적이고 배려심이 넘쳐서, 그 행동에 심장이 벅차오르는게 느껴졌다. 시선을 피하면서 끄덕거렸다. 조금 부담스러웠다. 막 대답하려는 순간, 슈이치는 덧붙였다:


“살짝 맵게 했어…”


“ㄱ-그래… 그건… 조금 매운 음식 좋아해…”, 그렇게 더듬거리자 뺨에 열이 확 올랐다. 다른 말을 하거나 말로 감사를 나타내는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일어나 앉아 침대 끝머리로 다가가서 그릇을 집었다. 조심스럽게 먹기 전에 슈이치는 아직도 약간 뜨겁다고 경고했다.


맛있었다.


슈이치가 침대 위 바로 옆에 앉은 채 침묵 속에 시간을 보냈다. 때때로 그를 확인하면서, 탐정은 호기심에 방안을 둘러보았다. 슈이치를 처음으로 들여보낸지 조금의 시간이, 처음으로 슈이치짱을 이름으로 부른지 며칠이 지났다. 상황은 좋지 않았지만… 이제 와서 뒤돌아보면, 탐정은 그의 실수를 용서했고 의도는 좋았다는걸 알았다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지하겠다고 말해주었다. 그 말은 코키치가… 슈이치짱에게 자신의 계획을, 얻은 지식을 말해주는 선택지를 고려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감시당하고 있을 경우를 대비해서 말하는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


지속적인 감시 하에 있다는 생각은 극도로 불편해서 파라노이아가 폭발했다. 대부분의 시간엔 성공적으로 그런 생각들을 머릿속에서 치워버리곤 했다. 그냥… 지금은 어려웠다. 찰나의 순간, 슈이치가 완전히 믿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이제 정말 토하고 싶어졌다. 위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신뢰가 닿을 수 있는 한 그를 믿었다.


어떤 이유에선지는 모르지만, 갑자기 엄청난 피곤함을 느꼈다.


“…평소보다 더 지저분한데. 조금만이라도 청소해줄까…?”, 슈이치의 제안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맘대로 해. 중요한건 건드리지 말고.”


탐정은 끄덕거리고선 발걸음을 옮겼다. 먹을때는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치유되는 온기가 몸을 채웠고 파괴적인 의심이 머릿속을 흐렸다. 자신의 방을 정리하는 슈이치짱을 바라보고도, 관찰하고도 싶지 않았다. 간신히 전부 해낼수도 없는 상태였기도 했고. 오래 지나지 않아, 흩어진 휴지와 구겨진 종이들은 모두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다행히도 기진맥진 해서 음식을 입에 넣고, 삼키고, 깨어 있고, 깜박거리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릇의 바닥이 드러나자 갑자기 슈이치가 새 옷 한벌을 밀어넣기 전까지 시간이 얼마나 빨리 흘렀는지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잠들기 좋은 편안한 옷. 코키치는 빈 그릇을 옆으로 치우고선 어리둥절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국물의 짭조름한 냄새가 아직도 공기중에 맴돌았다.


“이제 뭘 할까?”, 물어봤다. 옷 갈아입는다고 뭔가 달라질 리는 없잖아?


“…샤워한 다음에 옷 갈아입어. 심부름하고 이것저것 처리하고 올게, 알았지?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 무슨 일 있으면 불러줘”, 슈이치의 한마디 한마디가 단호한 설명에 당황했다.


일어나고 싶진 않았지만…슈이치가 말하니까 자동으로 대답이 나왔다: “니시시! 기대하지 마! 어차피 안 미끄러질거니까.”


슈이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을지언정 그 대답을 받아들여, 옷을 건네고 그가 일어설 때까지 기다렸다. 일어서자마자 비틀거렸지만 간신히 욕실에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벽에 기대어 서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숨을 몇번 깊게 들이마시니까 목덜미와 이마에서 땀이 흘렀다. 이제 이걸 ‘작업’ 이라고 부른다는 유일한 사실은 어이없을 정도로 웃겼지만, 그것도 상관 없었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고 그게 싫었으니까. 짜증나서 벗은 옷을 구석으로 걷어찼다. 샤워기를 키고 뜨겁게 타는듯한 느낌이 고통을 녹여 없애버리길 바랬다.


그러지 않았다. 심각하게 어지러워졌지만 최소한 근육통은 가라앉은것 같았다.


다시한번, 시간이 흘러가자 불안해졌다. 몇초를, 몇분을, 몇시간을, 며칠을 낭비하고 있는데. 생각이 몸에서부터 저 멀리, 마치 연결이 끊긴 것처럼 떨어져 있는것만 같았다. 한순간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물을 느꼈고, 곧바로 뿌연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자신의 창백한 피부를 관찰했다. 달아오른 뺨, 새빨개진 눈. 전부 조금 볼품없었다.


옷을 갈아입자, 현기증에 거의 기절할 것만 같았다. 머리는 아직 축축하고 따뜻했다 - 착잡한 기분이었지만 깨끗함 덕분에 한결 편안해졌다. 더러운 침대로 돌아가는 생각이 그 긍정적인 느낌을 부수겠다고 협박했지만, 문을 열자 새로 정돈된 침대가 앞에 있었다. 깨끗한 이불, 더러운 접시도 바닥에 쓰레기도 없고, 상쾌한 공기가 방을 채웠다. 슈이치짱도 없는게 흠이지만. 작은 미소가 입가에 번졌고 침대에 무사히 착륙하자 만족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베개에선 새 빨래 냄새가 났다.


바로 그 순간, 문이 찰칵 열리고 슈이치의 발소리가 방을 채웠다. 어수선한 머리와 헐렁한 옷, 베개에 깊이 파묻은 얼굴에 칠해진 미소의 초고교급 총통을 발견하자 조용히 웃어야만 했다. 코키치는 절대 과소평가 해선 안될 위협이 될 수 있지만, 천진난만하고 귀여운 모습을 보여줄때는 반드시 간직해야할 순간이었다.


코키치는 그를 향해 돌아섰다. 베개를 꼭 껴안고 함박웃음을 지은 채.


“전부 깨끗하고 깔끔해서 맘에 들어!”


“어… 그래. 건강에 중요하니까… 조금 괜찮아 졌어?”, 대답하는 슈이치의 입가에 멋쩍어하는 미소가 피어났다. 모은 물건들을 빈 안락의자에 내려놓았다. 코키치는 그를 향해 끄덕거리다가 머리가 아파왔는지 살짝 찡그렸다.


“방이 빙빙 돌고 머리가 둘로 쪼개질거 같지만, 그걸 빼면 훌륭해! 너무 지쳤지만…”


그 문장에 밑줄쳐서 강조하려는 것처럼 긴 하품이 나왔다. 호기심에 슈이치가 가져온걸 빤히 처다보더니 미심쩍은 시선을 보냈다. “그게 뭐야?”


슈이치가 입을 만한 스타일로 보이는 또다른 편한 옷 한벌을 발견했다.


“아, 내가… 그-그러니까… 쓸쓸하지? 그래서 옆에 있어줄까… 라고 고민했는데, 만약 너가 원한다면…”


믿기지 않아서 눈썹이 곤두섰지만 곧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었다. 슈이치의 뺨이 새빨개지자 당황하고 불안한 것처럼 보였다. 한 다리에 체중을 옮겨 실으면서 시선을 피하더니 코키치의 대답을 기다렸다. 평소보다 대답을 이끌어내는데 오래 걸렸다. 왜냐면 특히… 그래, 슈이치짱을 당황스럽게 하는건 쉬웠으니까. 하지만 자신을 간호해주려는 단순한 의지에 안절부절 못하는건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이 광경이 마음속 스위치같은 걸 키자 심장이 따뜻하면서도 무거워졌다. 일어나 앉아 이불을 끌어당기고, 말투가 진지해 졌다. 동시에 사려 깊으면서도 까다로워 지려는 것이 섞인 이상한 심정이었다.


“가서 옷갈아입고 침대로 와줘. 그걸 원해.”


분명히 슈이치가 예상한 답은 아니였다. 가끔씩이지만 여전히 코키치의 예측 불가능함에 적응하는게 어려울 때가 있었다. 그렇지만 간단히 끄덕거리고 숨을 내쉰뒤 옷가지를 챙기고 욕실로 사라졌다.


코키치는 혼자서 웃다가 다시 털썩 드러누워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가끔 사람들이 자신의 명령에 따르는 데에서 상당한 만족감을 느꼈다. 말 뒤에 악의가 숨겨져 있었다는건 아니지만, 이 상황이 만족스러워졌다.


잠시 한숨을 돌리자 몇분후, 더 편안한 옷차림으로 나타난 슈이치는 껴안고 싶어지게 보였다. 탐정은 침대 옆 쑥쓰러운듯 옷매무새를 정돈하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뭘 해줬으면- “, 그렇게 입을 열었지만 코키치는 갑작스럽게 말을 끊었다.


“안아줘.”


“어-어어?”


명확한 이유는 딱히 없었지만, 코키치의 표정은 울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아이의 그것으로 녹아내렸다. 거짓 눈물이 차오르고 슬픔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게 느껴졌다. 훌쩍이면서, 낙담을 모조리 끌어올려 표정에 실었다. 전부 거짓말… 이 아니라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아픈데 며칠을 혼자서 보내니까 무력하고 허약해져서 평소보다 훨씬 쉬웠다.


“ㅈ-지금까지… 혼자서 외로웠는데…  아-안 안아주면 곧 죽을거 같아…! 딱 한번만 안아줘, 슈이치짱… 제발?”


그를 진정시키려는 것처럼 팔을 든 슈이치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잠-잠깐만! 오마군, 왜 그러는-“


“아-안 안아줄거야? ㄴ…너라면… 나-날 버리려는 거야? 내 약한 면을 보여줬는데도?”, 미묘하게 원망하면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별로 힘들이지 않아도 눈물이 쏟아졌다. 이상했지만, 연기였다고 하더라도 마음 한 구석에선 조금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슈이치는 완전히 속지 않았다.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이 상황에 압도당할것만 같았지만 이젠 침대에 걸터앉아 유념시키려는 듯이 어깨를 잡았다.


“가끔 안은 적 있지 않았어? 내가 여기 남아있는 것도 처음이 아니잖아… 너가 원한다면 그냥… 안는게 어때, 코키치군? 안된다고 말하지 않을게”, 자신의 마음을 말하는 슈이치의 목소리엔 진심과 단호함이 담겨져 있어서 기분이 조금 나아지면서도 나빠졌다. 그말에 안정되고 솔직히 도움이 되긴 했지만. 다시 훌쩍거리면서 눈을 비비고 기대하는 듯한, 그리고 어쩌면 도발적인, 표정으로 슈이치를 바라보았다.


“ㅁ-말로만 하지 말고 안아 주라고, 바보!”


슈이치는 이맛살을 찌뿌리더니 즉시 코키치에게 팔을 꼬옥 둘렀다. 그를 가까이 끌어당기더니 손바닥을 등에 대었다. 둘다 탐정의 갑작스러운, 그러나 단호한 행동에 깜짝 놀랐다. 감정을 가라앉히느라 입을 살짝 벌렸던 코키치는 슈이치를 껴안고선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보랏빛 머릿결을 쓰다듬자 눈이 감기고 환희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직도 젖어있었지만 슈이치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심장이 마구 뛰는걸 느꼈다. 아마 대부분은 열 때문이겠지만. 어쩌면 껴안는건 최선의 방책이 아닐지도 몰랐다. 슈이치를 오염시키고 싶지 않았고 자신의 몸이 이미 열을 발산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일어났는데도 그의 품 안에서 녹아내려서 놓아버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보 슈이치짱… 옮을 텐데…알고 있지?”


“신경 안써…”


코키치는 의심이 절절한 눈으로 그를 주시하기 위해 등을 기댔다. 눈썹을 치켜올린채 대답을 기다렸다.


“그… 글쎄… 지금 기운이 없고 컨디션 안좋잖아. 나한테선… 숨길 수 없어. 하지만 내가…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잖아, 기억나…?” 설명하기 시작한 슈이치의 목소리에 수줍음이 잠들었다. 그치만 그러고 나서 확신을 계속 유지하라고 상기시켜야 했다. ”너가 다시 좋아질 때까지 떠나지 않을게. 너도 나에게 그대로 해줘.”


혀끝에서 항의가 굴러떨어지겠다고 위협했지만, 제시간에 붙잡아서 진실로 대체했다.


“…응. 하지만 이유없이 건강을 해치라고는 절대 안했잖아!”


탐정은 어색한 미소와 함께 반론했다: ”방금 안아달라고 하지 않았어…?”


“…아…아마 그랬을지도. 그-그냥 안아주면 고맙겠는데.”


빠른 승리에 슈이치는 조용히 웃으면서 그를 껴안았다. 패배에도 불구하고, 그를 마찬가지로 껴안고선 조심스럽게 끌어당기는 코키치의 입가에도 미소가 피어났다. 등이 매트리스에 착지하고 슈이치가 반쯤 위에 눕게 되자 만족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온몸에서 슈이치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익숙한 향기가 폐를 채웠고 짧은 소매 덕분에 피부의 접촉을 만끽할 수 있었다. 슈이치의 팔은 정말이지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서로에게 더 깊숙히, 아늑하게 파고들었다. 그것만으로도 벌써 훨씬 많이 괜찮아졌다.


걱정에서 풀려나고 입가에서 행복이 춤추자, 슈이치의 밤하늘색 머리에 얼굴을 파묻고 다시한번 눈을 감았다.


“놓아버리면 죽여버릴거야, 슈이치짱.”


찰나의 순간 그가 움찔하자 코키치는 까르르 웃다가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엔 말을 못했지만 슈이치는 힘겹게 말을 꺼냈다.


“안 그럴게, 하지만… 그건 네 신조랑 어긋나지 않아?”


코키치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번졌다. “우와아, 나도 상식이 있다는걸 기억하고 있었구나! 대단해!”


슈이치가 깊은 한숨을 쉬자 키득거렸다. 탐정은 자세를 바꿔 똑바로 눕고선 코키치를 끌어당겨 그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기대게 했다. 그의 심장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뺨이 옅은 심홍색으로 물들었다. 확실히 낯설었지만 환영했다. 트릭스터는 침묵을 만끽하다가 탐정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슈이치의 손이 머리를 어루만지자 눈을 감고 몇번 심호흡을 했다. 그저 그의 심장소리를 듣기만 하면서.


몸이 마치 온기로 이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편안하고, 나른하고, 안전한 온기로만.


“안 그럴게…”


슈이치의 대답에 끄덕였다. 몇가지를 고려하더라도 이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숨 쉬어도 괜찮아. 슈이치짱 덕분에 곧 좋아질 거야.


너무 많이 신경 쓰지 않으면서 모든 느낌이 마음과 몸과 맞닿도록 내버려 두었다. 정말로 환영한 손끝의 부드러운 스침, 만족스러운 한숨과 함께 입술을 떠나는 슈이치의 이름, 포옹에서 느끼는 안도. 피로가 눈 깜짝할 사이에 따라잡았지만 더이상 맞서 싸우지 않았다. 무해한 어둠이 머릿속에 퍼지고 편안한 잠의 세계에 빠졌다. 슈이치는 그를 꼭 끌어안고선 살펴보다가 함께 잠에 빠졌다.


벌써 훨씬 좋아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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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s://archiveofourown.org/works/13400985

Ao3의 ethereal_blue님, 정말 감사합니다.

원제는 'Tainted' 너무나도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제목이


3일 지각한 만큼 2일 서두르는 이상한 논리조삼모사. 이거만큼은 빨리 보여주고 싶었어요


폭탄선언: 15개월차 번역러의 첫 열아홉금 작품입니다. 오마사이 아마사이 아카사이 신구사이를 포함한 사이른. 지금 이 문장에 현혹되신 분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분량도 12페이지 3500단어 공백포함 15291자 공백미포함 11955자라는 경이로운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저 숫자들을 딱딱 맞추려고 한건 안자랑이지만.


1월 17일에 처음 읽은 이래로 정확히 65일동안 기다려왔어. 이 절망을 퍼뜨리기를......

이 팬픽이 올라온 날 슈이치도 울고 나머지 애들도 울고 작가님도 울고 댓글창도 울고 모노쿠마를 제외한 전미가 울었습니다. 진짜로.

태그에서 울부짖는 '죄악' 라던가 '사죄'라던가 '회개'가 압권. 작가의 말에서 '게임에서 슈이치 울때 나도 울었다' '과거의 나야 왜그랬니' '어쩌다 이게 12페이지를 돌파한걸까' '슈이치 절망시키지마 얜 꽃길만 걸어야돼'가 참으로 일품. 그렇게나 잘 아시는 분이 왜그러셨어요


처음 읽고 멘탈이 증발한 후 다시 보니까 Mature(성인등급) 태그가 있더라고요. 그것도 1순위로(...)

이래서 시험볼때 지문을 먼저 꼼꼼히 읽어보라는 겁니다. 단순히 멘탈이 나가는 것 이상으로 절망적인 대참사가 터지는 수가 있어요  


열린 결말...인것 같지만, 해피엔딩 써달라는 작가님의 간청을 보면 언젠가 결말이 나올 가능성도 없진 않은듯 합니다. 근데 이 작가님의 다른 작품들로 추론하건데, Aㅏ, 아아......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배경음악은 되풀이 한 방울, 그중에서도 슈이치 인력론파 버젼(sm30981989)을 강력추천 합니다. 가사는 몰라도 슈이치의 목소리가 심금을 울리고 가사를 알게되면 눈물샘이 고장나고 거기에 본편에서의 슈이치의 행적을 떠올리면 이만한 절망고문이 따로 없어요


벌거벗은 몸 위 시트를 꽉 붙잡아, 놓아버린다면 제정신도 같이 놓아버리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잠든 척 하면서, 매우 조용히 있으면서, 또다른 어슴푸레한 그림자가 뒤돌아보지도 않고 방을 떠나는걸 지켜보았다. 더이상 그게 누구였는지, 성별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아는 것은 누군가가 자신과 몸을 섞었고, 자신은 거기에 기꺼이 찬성했고, 그렇게 자신을 내버려두었다는 것 뿐.


마지막으로 혼자 잔 게 언제일까? 아마 오래 전이겠지. 밤이면 항상 누군가가 침대 위, 바로 옆에 있었고 다음날 아침이면 떠나서, 이용당하고 버려졌다는 기분이 들게 했으니까.


이 시점에선 이미 정례적인 일이었다.


슈이치는 클래스메이트를이 원할 때마다 그와 섹스하는것을 허락했다. 자신의 몸을 바쳐서 자신의 가치를 대가로 그들의 환상을 이뤄주었다.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그의 생각엔 불결한 시트 뒤로 숨었다. 더이상 순결하지 않으니 상관없었다. 그것과는 이제 한참 거리가 멀었다. 모노쿠마만큼이나 더럽혀졌으면서 여전히 자신을 타인을 죽이고 싶어하는 존재보다 야비하고 추악하다고 여겼다. 최소한 그 곰인형은 순수하다고 여겨질만한 일부가 있었으니까.


슈이치는 이 일에 대해서 자기 자신 말고는 비난할 사람이 없었다.


사태가 이정도로 커지도록 내버려두지 말았어야 했다. 애초에 이걸 제안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랬다.


대놓고, 또는 노골적으로 자신을 성적 욕구를 위해 써도 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직접 말하는 대신 자신의 방으로 초대하면 모두 빈말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신의 스트레스를 해소해야 했기 때문이 아니였다. 절대로. 그게 자신이 쓸모있을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사이하라 슈이치가 존재한다는걸 기억할테니까.


그는 탐정이었다. 범죄의 영역에 조예가 깊은 자. 하지만 모두 살인을 하지 않는데 동의했으니, 해결해야할 범죄가 없었다. 수사해야할 시체가 없었다. 아무것도.


단지 누군가를 죽이려고 각오한 눈과는 달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들이 갇혀있는 동안 원하는건 아무거나 하게 내버려두는 빡친 모노쿠마가 있을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일어나서 개인실에 있는 소형 냉장고에서 물 한잔을 꺼내 마시려 하다 축축하고 끈적끈적한 무언가가 허벅지에서 흘러내리는걸 느꼈다. 아마 클래스메이트들 중 한명이겠지, 지난 밤의 파트너는 남자였다는걸 추가로 기억해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허리에서 통증을 느껴 자신의 무게에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몇초전 자신의 다리에서 미끄러져 흘러내리는게 무었인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더이상 보고 싶지 않아서 침대 머리맡 티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역겨웠다. 클래스메이트들을 더럽혀서. 그리고 자신을 더 소중히 여기지 않아서.


티슈로 다리에 들러붙은 정액을 전부 닦아내었다.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꼈지만 몇초 지나지 않아 다른 사람이 그의 안에 있을때 상대의 이름을 거의 애원하다시피 불렀던 것을 기억했다. 늘 그랬듯이 자신은 이걸 원했다고, 이걸 받아 마땅하다고 되새겼다. 애초에 이것밖에 안되는 사람이었으니까.


절대 바뀌지 않았다. 그의 야간 일과는.


아침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것처럼 어울렸다. 밤마다 새로운 사람에게 오르가슴을 느끼며 좀 더 세게 박거나 박혀달라고 간청하는 색정광은 아니였으니까. 누구와 밤을 보내느냐에 따라서 페르소나[각주:1]를 바꿨다. 도미넌트 탑부터 시작해서, 서브미시브 바텀, 그리고 원한다면 쑥스러워하는 연인까지. 남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 거짓말의 풍부에 자신을 내던졌다. 부스럭거리고 옷을 갈아입는 소리에 일어나, 문이 닫히면 후회만이 남겠지.


간직할 만한 여운도, 아침인사 키스도, 점심때까지의 나른한 포옹도 없었다.


원하는걸 받았으니 그를 버렸다. 홀로 쓸쓸하게 내버려두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물론 그도 노력했다. 단지 인간으로서의 슬프고도 구차한 변명이 아니라, 최소한 한명이라도 곁에 두려고 정말 노력했다.


코키치와 처음 잤을땐 이번 한번뿐만이라고 생각했었다. 친구와의 동침. 몸을 바친 첫 상대는 바로 그 키작은 소년이었다. 아마 이성보다 자신의 감정을 따랐던게 아니였을까. 코키치가 안뜰에 혼자 있는걸 보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행동했다.


코키치를 방으로 끌고 간건 그였다. 서로의 입술을 맞닿게 한건 바로 그였다. 그리고 둘이 침대에 쓰러지듯 넘어지게 한것도 역시 그였다.


코키치는 느리면서도 상냥하게 대해줘서, 육체적인 사랑을 나눌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부드럽고 친절해서 그에게 품은 작은 감정이 갑자기 폭발한 것처럼 느껴졌다. 입술이 한군데도 놓치지 않고 몸 구석 구석을 훑는 그의 키스 방법이,


예술 작품을 새기는 것처럼 몸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가락이,


몸을 떨면 그가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지 속삭이던 그의 목소리가 정말 맘에 들었다.


“사이하라짱…사랑해…” 열애로 가득 차 반짝거리는 눈과 함께 탐정의 얼굴을 부드럽게 애무하기 전의 속삭임.


코키치는 첫번째 경험치곤 완벽한 파트너 같아서 차라리 마법처럼 느껴졌다. 만약 코키치가 곁에 있어준다면, 그렇다면 그는 자신이 배경 뒤편으로 사라지지 않을, 가치있는 사람이 될 이유가 될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서로의 팔다리를 엮은채 탐정의 방에서 잠들었다. 코키치가 곁에 있어서 기뻤다.


그렇지만 틀렸었다. 사건를 해결할 때의 수묘한 기량과 달리, 그는 사랑에 관해서라면 전적으로 서툴렀다.


“오마군, 어디가는거야?” 그에게서 받은 쾌감으로 인해 아직도 정신이 몽롱했다. 졸린 눈을 비비고선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소년을 바라보았다. 이미 옷을 완전히 차려입고 막 신발을 신던 참이었다.


“어디긴 어디야, 밖이지 바보 사이하라짱. 우리의 하룻밤 섹스는 너가 온 바로 그 순간에 끝났다고.” 처음부터 당연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비꼬는 듯한 말투였다. 슈이치를 등지고 있어서 거짓말이었는지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었다. 목소리 만으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코키치는 문으로 향하기 전 옷을 제대로 입었는지 확인했다. “뭐랄까 시시했어, 만년동정짱, 그래도 그렇게 나쁜 밤일 상대는 아니였어. 이제 네가 나에게 애착을 가지기 전에 떠날게.”


“하지만…오마군…” 슈이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자신이 그에게 그랬던 것처럼 코키치도 자신에게 감정을 품었다고 생각했는데. 만약 아무 조건 없이 섹스만 할거란걸 미리 알았더라면 원하는건 무엇이든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코키치는 문을 닫고 나가기 전 한마디도, 한마디조차 하지 않았다.


만약 그게 전부였다면 마음 아파하지 않았을 것이다. 코키치는 진정한 관계가 아니라 섹스 프렌드만을 원했던 거라고 생각해도 괜찮았다.


하지만 코키치는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가 기억할 가치가 없고 쉽게 잊혀져도 괜찮은 것처럼 행동했다. 그날밤 코키치에게 준 모든 감정이 거짓이 되어버린거 같아서 견딜 수 없었다.


그가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마치 그 순간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슈이치를 만족시킨채 떠난 것처럼 행동하고 자신과 농담하는걸 볼때마다 마음이 찢어지는것 같았다. 만약 코키치가 느낀 감정을 되돌려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졌다.


슈이치가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간직하고 싶었던 순간이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심장에 못이 박히는 것만 같았다.


뒤돌아보면, 자신을 이 지옥으로 내몰리게 한건 코키치와의 만남이었다. 만약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다시 시도할 필요도 없었겠지. 둘다 즐거운 시간을 보냈음에 만족했다는걸 기억했더라면 그만 멈추고 더이상의 비탄에 빠질 필요도 없었겠지.


아니, 삶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두번째로 만난건 란타로였다.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한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란타로는 코키치와 동일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를 탐정을 넘어서 그 이상의 무언가로 보던 눈으로 말이다.


혹시 란타로가 그 사람인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똑같은 방법으로 그를 방으로 초대했다. 코키치와는 달리, 란타로는 즉시 달려들지 않았다.  실제로 조심스럽게, 이미 그들이 쌓아온 걸 무너뜨릴까봐 두려워 하는 것처럼, 영역에 들어오고 있었다. 이건 슈이치가 희망을 품게 만들었다. 찾고 있던 사람이 란타로일거라는 희망을.


란타로는 겉보기와 다르게 코키치보다 서툴렀다. 어설픈 솜씨로 슈이치의 옷을 벗기고 그의 옷도 벗었다. 순수한 키스가 몇분 지나지 않아 욕망의 굶주림으로 변해, 며칠전 코키치와 나눈 순애의 키스라기보다는 오히려 서투른 애무에 더 가까워졌다.


란타로는 항상 슈이치는 어떤지, 깨물어도 괜찮은지, 키스마크를 남겨도 되는지,


자신이 너무 거칠거나 느린지.


자신과 해서 후회하지는 않는지 물어보았다.


란타로는 슈이치의 생각을 물었고 그건 그 나름대로 자극적이었다. 재판장 밖에서도 자신의 의견이 의미가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정말 해도 괜찮슴까, 사이하라군?” 그렇게 란타로가 슈이치의 다리를 벌리면서 다시한번 물어보았을때엔  마치 마음을 열면 그만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 시점에서 슈이치는 간절했기에 대답은 하지 않았고, 대신 자신의 다리로 란타로를 감싼 뒤 키스했다.


란타로는 완전히 박기 전에 그걸 승낙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이번 접촉에는 좀 더 잘 반응해서, 그가 자신 만큼이나 기분이 좋아지길 바랬다. 끝났을 때에는 둘다 엉망진창이었고, 란타로가 마지막 키스를 남겼을 땐 거친 숨만 내쉴수밖에 없었다. 그날밤 슈이치는 감금당한 학원에서의 나머지 나날을 란타로와 보내는 꿈을 꾸었다.


아침이 되었을 때, 슈이치는 홀로 일어났다. 바닥에 떨어진 사용한 콘돔과 란타로의 목걸이만이 그 모든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걸 알려주는 유이한 증거였다.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서둘러서 옷을 갈아 입어야 했던 걸꺼야. 그 가능성을 믿고 있었다.


하지만 란타로는 평소와 다름 없었다. 슈이치가 목걸이를 돌려주고 들릴들 말듯 한 목소리로 사랑한다고 말해도 얼굴이 붉어지는 기색조차 없었다. 녹차빛 머리 소년의 이름을 말하면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빨개지던 밤과 달리, 이번엔 조용히 선언하고 나니 그는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장난스럽게 툭 한대 쳤다. 자신의 상처입은 마음을 준 소년에게 마치 농담에 불과했던 것처럼 대해졌다.


이 일로 인해 우울해졌고, 조금 더 낙심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희망을 품었다.


그래서, 카에데가 관심을 보였을때, 다시한번 시도해보고 싶었다.


이성과는 처음이었고 그래서인지 어색했다. 전에 성관계를 가졌을 땐 두번 다 삽입당하는 역할이어서 두 소년이 자신을 마음대로 다루도록 내버려두었다. 카에데는 그러지 않을거란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 이번에는 자신이 리드해야한다는 압박을 받았다.


만약 그가 연애를 하게 된다면 사랑스러운 남자친구가 될거라고 카에데가 항상 말한것처럼, 부드러운 쪽을 택했다. 이번에는 기필코 이상적인 자신을 구현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전희에 오랜 시간 공을 들여서, 자신의 필요를 처리하기도 전에 금발의 소녀를 만족시켰다. 아마 그래서 잘못되었던 걸까.


그 순간동안만큼은 이기적이었다. 다른 사람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코키치와 란타로는 그가 초라하고 도움이 절실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카에데에게 인생 최고의 순간을 선사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슈이치군…” 쾌락에서 초래된 몽롱함 사이의 헐떡거림. 그녀의 눈은 내내 반쯤 감겨 있어서, 슈이치에게 어쩌면 정말 잘하고 있다는, 카에데는 계속 있을거라는 자신감을 주었다.


“제발, 서둘러줘. 난…” 카에데는 하려던 말을 마칠 필요 없었다. 슈이치가 원하는 걸 해줬으니까. 박력 넘치는 키스에 소녀의 신음소리가 커지고, 소리가 새어나가 남들을 깨울 가능성을 입으로 차단했다.


어차피 방은 방음이 되어있었으니 상관없었지만.


아침까지 카에데를 곁에 두겠다고 단단히 결심했건만, 코키치와 그랬던 것처럼 한밤중에 일어났을땐 카에데는 이미 옷을 차려입고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코키치에게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손을 뻗어 피아니스트의 손을 꼭 쥐었다. “카에데…” 있어줘.


“응? 왜그래 슈이치군?” 그녀는 궁금해하면서 답변을 들으려고 실제로 잠시 멈춰섰다. 그것이 아무 데도 가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를 간절히 바랬다.


“제발, 가지 말아줘.” 슈이치는 간청했고, 자신의 목소리에 배신당했다. 약하게 들리고 싶지 않았는데. 약하면 카에데가 싫어하니까. 처음 만났을 때처럼 유약한 탐정이면 떠나려는 이유를 더할 것 같아서 두려워했다.


“그냥 내 방으로 가는 거야 슈이치군. 아무 데도 안갈 거야.” 익숙해지기 시작한 카에데의 미소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달콤했다. “그냥, 다른 사람들이 아침에 네 방에서 나오는 걸 보게 되면, 너에 대해서 안좋은 소문이 뜰 것 같아서. 그건 싫거든.”


슈이치는 그녀의 말을 믿고 싶었다. 그순간에는 정말 그랬다. 카에데는 늘 한결같이 진실했고 진심 어렸으니까.  


카에데는 그가 항상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건 카에데의 거짓말 이었다.


결국 피아니스트가 문가에서 손을 흔들어 인사하도록 놔둘 수 밖에, 바깥 불빛이 서서히 희미해지는걸 바라볼 수 밖에,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마지막 희망을 접어둘 수 밖에 없었다.


몸을 전부 닦아내고 사용한 티슈를 모두 쓰레기통에 버렸다. 모노쿠마가 왜 항상 쓰레기통이 휴지로 넘처나는지 물어보지 않았을때 기뻐했다-아님 그냥 신경쓰지 않는 거일지도. 모노쿠마가 학생들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한다고 말할때 거짓말이란걸 알고 있었다. 친구들이 ‘슈이치는 성관계를 가지는데만 좋을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정례를 실행하도록 내버려둘때마다 곰인형이 면전에서 대놓고 키득거리는걸 목격한건 한두번이 아니였으니까.


만약 모노쿠마가 그동안의 섹스를 전부 촬영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학생들끼리 뜨는걸 보면서 가버리는 버러지에게 팔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지. 슈이치는 개인적으로 이 모든 사태에 대해 신경쓰는걸 오래전에 그만두었다. 자신에겐 소중한 모든 것들이 사실은 다른 사람들에겐 무의미하니까 남아있는 존엄성을 건져내려할 필요가 전혀 없잤아.  


샤워실에 들어가 물을 키니 뜨거운 물이 머리위에서 온몸으로 쏟아져 내렸다. 물이 피부를 타고 흘러내리며 클래스메이트들에게서 받은 멍 몇개를 건드렸다. 쓰라러셔 잘못 움직일 때마다 움찔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증거였다. 한때 그가 누군가에게 사랑받았고 필요했다는 증거.


물을 끄고선 클래스메이트들의 관심의 증거를 검사했다.


몇개는 보라빛으로 변해있었다. 허벅지나 손목에 있는 것처럼. 비교적 최근에 생긴 흔적이었다. 월요일에 코레키요에게서, 개인적으로 작업하고 있던걸 보여주기로 약속한 뒤 받았던 것임을 기억해냈다.


코레키요에게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슈이치가 이미 가장 좋아하는 밧줄로 묶여있는걸 봤을때 보는 것만으로도 자극되어 유별나게 거칠었다.


혼자서 밧줄을 그렇게 팽팽하게 묶는건 만만찮은 작업이었지만 해냈다. 해내기까지의 인내에 대한 보상은 평소보다 더 거친거 같았던 코레키요와의 섹스였다. 그가 원했던 것처럼.


코레키요에게 구속당하는건 곧 익숙해졌다. 그게 그들의 섹스의 대부분이었으니까. 본디지와 가끔은 SM 조금. 코레키요와 할땐 고통은 문제가 아니였다.


처음에는 그랬지만, 섹스 도중 고통보다도 견딜 수 없는게 있었다.


그를 물건처럼 다루는 사디스트 인간쓰레기였다고 해도 슈이치는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다. 실은 그랬다면 더 고마워했겠지만…하지만 코레키요는 아니였다. 슈이치를 신경쓰지 않는 사이코는 아니였다.


너무 막나가지 않게 실제로 신경써줬고, 실수로 너무 세게 당겨서 생긴 멍을 부드럽게 문질러 줬다.


코레키요는 끝나면 슈이치를 안아주고, 귓가에서 뜨거운 숨결을 느낄 때마다 그의 온기에 감싸이게 해줬다.


자극과 흥분 도중 한숨 돌려야 할땐 숨쉬게 해줬고, 슈이치가 원할때 키스해줬다.


연인 행세를 했던 것은 섹스 토이로 다뤄지는 것보다 최악이었다. 그 모든 고통과 쾌락이 일어나고 난 뒤엔 코레키요가 정말로 자신의 연인이라는 희망을 품게 만들어서. 몇번이고 다시 이용당하고, 밤에는 사랑받지만 아침이 되면 버러지게 될 연인.


샤워를 마치고 나와, 제공된 목욕가운을 둘렀다. 거울 앞에 서 컨실러를 꺼냈다. 모노쿠마에게 부탁했더니 박스채로 주었다. 이건 곰인형이 그의 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이론을 뒷받침했다.


슈이치는 멍과 키스마크에 조심스럽게 컨실러를 발랐다. 자칭 존재의 입증을 바라보는걸 좋아한 만큼 섹스 프렌드들의 미심쩍은 얼굴을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새겨진 온갖 멍이 걱정되는 것처럼 굴었지만 정작 그들이 그 멍을 들게 했다는건 절대 기억해내지 못했다.


언젠가 한번 모두 수영하러 갔을때, 미우가 비명을 삼키면서 그에게 흔적을 남긴건 바로 그녀였음을 완전히 잊어버린 채로 등 뒤를 가로지르는 생채기에 대해 물어본,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상처를 비웃은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슈이치가 거칠고 가학적일때-과장을 좀 보태자면-좋아 죽었다. 절정에 치닫기 바로 직전까지 가다가 완전히 멈추면 발명가는 훌쩍거리며 간청했다. 그가 했던 짓은 잔인했다. 그것에 대해 자주 생각했고 입 밖에 내기를 거부했지만 미우 본인은 정말 좋아했다. 그녀는 지배받는걸 좋아하였고 슈이치가 그걸 해주길 원했다. 심지어 발명가에게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까지 했는데, 허벅지를 세게 꽉 쥐고 목에 키스마크를 새겼다. 타인에게 자국을 남긴건 미우가 처음이었고 만족스러웠다.


만약 그들이 흉터를 본다면 전날 밤 탐정 덕분에 쾌락을 느꼈음을 기억할거라고 생각했다. 다시한번 그 흔적들이 누군가에게-어떤 사람이라도 좋으니까-슈이치가 그들의 육체를 보완했던것을, 그리고 그가 그때 어땠는지를 상기시켜 줄거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그건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그 흔적들은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숨겨저 있었다. 아니라면 어디서 얻은 흉터인지 확신할 수 없었던 거겠지. 범인이 그들 바로 옆에 있다는걸 알지 못한 채, 계속해서 슈이치의 모든 것을 등한시하였다. 슈이치가 씁쓸함을 느꼈음은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건 마치 관에 박힌 마지막 못과도 같은 치명타였다.


슈이치는 그들에게 있어 하룻밤 동침하는 상대에 불과했을 뿐, 그 외엔 아무 의미도 없었다.


컨실러를 마저 바르고 전부 가려졌는지 확인하려고 돌아보았다.


방을 나와 똑같은 교복으로 가득 차있고 뒤쪽엔 다른 옷들이 놓여진 옷장으로 향했다. 그들이 서로 함께 시간을 보낼때 츠무기가 입어달라고 한 옷이었다. 역할극의 팬답게 상대도 연기에 참여하기를 바랬다.


좋은 섹스 파트너 답게 당연히 따랐다. 츠무기는 누구를 연기하는지에 따라 분위기를 자주 바꾸는걸 좋아해서 가장 많은 사전 조사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둘이서 보낸 밤 동안 변하지 않은게 하나 있다면, 츠무기가 가까울 때면 속도를 늦춘 뒤 코스플레이어의 안경을 벗겨 자신이 쓴 다음 키스로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츠무기는 포옹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에, 캐묻지 않고 잠든 그녀에게 안경을 다시 씌워주기만 했다.


슈이치는 탐정 제복을 차려입었다. 몸에 꼭 맞는게 마음에 들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에게 미소지으려 하다 놀랍게도 해냈다. 몇분 전까지만 해도 떠오르지 않던 미소가 갑자기 나타났다. 어쩌면 오늘은 좋은 날일지도 몰라.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피부에 흠을 내는 흉터도 없고, 눈가에 고이는 눈물도 없고, 괜찮을거라고 말해주는 미소. 아아. 여기 나를 돌아보는 이 슈이치는 행복하구나.


그걸로 밖으로 나가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기에 충분했다. 책상 위 모노패드를 집어올렸다. 손가락이 자신의 믿음직한 모자의 안감을 훑었다.


오늘 모자가 필요할까? 모자 없이는 노출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몇년동안 자신의 피난처가 되어 주었으니까. 만약 쓰지 않는다면 이상하게 쳐다보겠지. 한숨을 내쉬었다. 바보같아.


“이제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이미 모두의 눈 앞에서 벌거벗어봤는데.”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농담인 것 마냥 키득거렸다. “어차피 아무도 신경쓰지 않잖아. 그러니까…”


모노패드만 한손에 든채, 문을 잠그지도 않고 방을 나섰다. 아침방송 직후였으니 복도는 텅 비어있었고, 다시한번 미소짓는다는걸 깨달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좋았다. 개인 시간이 정말 필요했다.


기숙사를 나오자 차가운 아침공기에 떨었지만 참을 수 있었다. 몇분 지나지 않아 곧 본관으로 갈테니까.


계단으로 향하는 도중 트레이드마크 웃음소리로 인사한 모노쿠마를 지나쳤다. 그렇지만 이번엔 이 살인적인 곰인형을 무시하지 않았다.


슈이치는 미소로 답하고는 곰인형과 함께 웃었다. 4층, 그의 연구교실로 향하기 전 사랑스럽다는듯이 인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유시간은 혼자 보내야겠지…


체육관으로 모이라는 모노쿠마의 방송이 모니터마다 울려펴질 때 그들은 잠이 덜 깬 상태였다. 평소보다 새되고 흥분한 목소리였지만 곰인형이 자신들의 인생에 간섭하려는건 더이상 원치 않았다. 보나마나 헛소리니까 무시해도 되겠지.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죽이지 않을 테니 시체발견 방송의 위험은 없었다.


“우푸푸. 내가 너라면 무시하지 않을거야. 안오면 후회할걸. 우푸푸푸.”


곰인형의 비웃음은 명백히 초고교급들에게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도전장을 내밀었다. 분노, 혼란과 전반적인 피곤함이 각 초고교급들 안에서 끓어올랐다. 마지못해 일어서서 아는 욕이란 욕을 모조리 모노쿠마에게 퍼부었다.


“5분안에 여기 오라고 할게. 서둘러야 될거야, 시곗바늘은 움직이고 있다구.” 그 말을 마지막으로 모든 모니터들이 꺼지고 학원은 다시한번 침묵에 잠겼다.


놀랍게도, 모노쿠마가 5분을 세기도 전에 모두 집합한데다, 역대 최단 기록이었다. 거의 모두가 출석했다. 여기서 빠진 사람은 딱 한명…


“잠깐, 사이하라는 어딨어?” 마키는 딱히 특정한 누군가를 골라서 물어본게 아니였다. 그말 그대로, 탐정을 제외한 모두가 있었다. 방송 못들었나? 그랬을 리가. 평소에 키루미와 같은 시간에 일어나는데.


“우푸푸, 걱정은 붙들어 매셔. 사이하라군은 오늘 조회에서 제외됐으니까. 다른 역할이 주어졌거든.”


어째서 곰의 웃음이 평소보다 냉혹하게 들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마치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어쨌든, 와줘서 고마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께. 우리는 게임을 할거야…”


“살인게임은 하지 않을검다, 모노쿠마.” 아마미의 선언에 다른 초고교급들은 와글대고 투덜거리는 소리로 동의를 표했다. 첫 두달동안 살인이 일어나지 않자 포기한거 아니였어? 살인은 안된다는 약속을 다들 환상적으로 지키고 있었다. 이 지옥의 구렁텅이에 빠진지 다섯달째, 예상보다 잘하고 있었다.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너희가 하고 싶지 않아해서 살인게임은 시시해졌거든. 그런 낡아빠진 게임은 하지 않을거야. 그으으래애서어….”


모노크롬 곰인형은 기억나라 라이트를 꺼내들었다. “숨바꼭질을 할거야!”


초고교급들은 불평을 내뱉었다. 숨바꼭질? 정말 유치한 게임이잖아. 심지어 게임을 좋아하는 코키치마저도 짜증이 났다. 글쎄, 만약 완전히 깨어있을때, 눈뜰려고 애쓰지 않을때 한다면 다른 이야기겠지만.


“자아 자. 내가 누구를 찾아야 하는지 말하면 다 참가하고 싶어할걸.”


그러고선 모노쿠마즈, 정확히 말하자면 모노파니, 모노키드, 모노타로와 모노스케를 불렀다. 에구이사르들은 커다란 텔레비전을 들고 와서 모든 초고교급들이 볼 수 있게 들어올렸다. 아직 모노쿠마의 게임에 완전히 집중하진 않았다.


“타겟은 바로…”


모니터는 정지 상태였다가 사이하라 슈이치, 초고교급 탐정을 보여주었다. 1인칭 시점처럼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똑바로 바라보는게 아니라, 마치 어린아이를 바라보는것처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이 보고있는 시점의 사람 위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마치 머리를 쓰다듬는 것처럼. 비디오는 삐소리와 함께 정지했다.


“게임은 숨바꼭질. 보다시피 타겟은 사이하라군이고 보다시피 이 학원 어딘가에 있어. 너희의 임무는 그를 찾는 거야.” 모노쿠마는 키득거리면서 두 발(손?)을 입가에 갖다대었다.


“누워서 떡 먹기네! 순식간에 슈이치를 찾을거라고!” 카이토는 주먹을 치켜올리며 선언했다. 그가 옳다는걸 알았기에 다른 이들도 동의했다.


“우푸푸, 글쎄, 물론 산 채로 찾아야 해.”


모노쿠마의 말을 듣자 모두의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산 채로? 살아있는 상태로 찾아야 한다고? 왜?!


“사이하라짱에게 무슨 짓이라도 한거야?!” 곰인형들에게 모독 세레를 퍼부으며 침묵을 먼저 깨뜨린 건 코키치였다. 곤타가 막아세우지 않았더라면 당장 달려들어 한대 쳤을 것이다.


“우리 학생들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잖아!” 카에데의 비난. 그녀는, 모두는 화가 났다. 어떻게 모두 잠들어 있었을 때 그런 짓을 했지? 슈이치가 무력할때 말야.


“아따, 아빠는 그 불쌍한 애한테 아무 짓도 안했당께요.” 모노스케가 끼어들었고 그의 목소리는 에구이사르를 통해 울러퍼졌다.


“우리는 따른다 교칙을!” 모노키드도 덧붙였다.


“대체 무슨 헛소리냐고?” 코키치의 조소는 눈에 띄게 가라앉아 있었다. 모노쿠마는 그저 웃기만 했다.


“나는 사이하라군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걸… 너희가 그랬지.”


“뭐?”


누군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모노쿠마는 기억나라 라이트를 꺼내어 작동시켰다. 초고교급들이 각자의 머리를 짚으니 기억이, 그와 보낸 밤의 기억들이 너무나도 많이 되돌아왔다.


기억해냈다. 이제서야 기억해냈다.




밤마다 그들이 슈이치를 붙들고 슈이치가 그들을 붙들었던 것을. 방을 떠날 때마다 슈이치가 짓밟힌 것처럼 보였지만 이유를 알지 못했던 것을.


인생 최고의 밤이 아닌 것처럼 굴때마다 슈이치의 눈에서 생기가 사라져 가던 것을.


어째서?!


어째서 잊어버렸던 거야?!


“그럼, 이제 게임을 할 마음이 들어?” 그렇게 물어보는 모노쿠마는 결국엔 초고교급들 각자의 얼굴에 드러난 절망을 즐기고 있었다.


“나…난 사이하라짱에게 끔찍한 짓을 했어.” 코키치는 흐느꼈고, 거짓 눈물이 아니었다. 자의로 멈출수도 없었고 당연히 자의로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사이하라짱을…아프게 했어.”


란타로의 정신은 모든걸 받아들일수 없었다. 관심있던 소년과 친밀한 만남을 가져왔다는게 정말 기뻤지만, 밤마다 그를 떠날 때의 자신의 행동에 격노했다. 대체 뭘 생각하고 있었던거야!? 제정신이었다면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곁에서 일어나는걸 상상했다. 그의 얼굴 주름을 하나하나 관찰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늘 그랬듯이 아름다웠다.


그는 성관계를 가지고선 그냥 사라지는 사람은 아니였다.


“이건 가ㅉ-.”


“이건 뻥이 아니라구. 너네가 아무도 안죽이고 빈둥거리던 지난 6개월동안 일어난 일이야.” 모노쿠마의 진술. "너희 모두 탐정군을 장난감마냥 가지고 놀았지. 머저리 냉혈한들 같으니라고. 너네가 얼마나 많은 절망을 안겨줬는지 봐."


“어째서 우리의 기억을 지운 건가?!” 그렇게 물어보는 코레키요의 목소리는 모노크롬 곰인형에 대한 혐오가 선명히 끓어오르고 있었다. "만약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럼 슈이치가 고통받지 않을 수 있었잖아. 다른 사람들도 그가 했던 것과 똑같은 짓을 슈이치에게 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가 자신을 모두의 스트레스 해소대상이라고만 여기지 않기를 바랬다는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곰인형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으응? 당연히 그러는 편이 더 재밌으니까. 내 플랜 B이기도 했고. 너희들을 이용하는건 생각보다 쉬웠지만."


“너희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보낼때 사이하라군은 자신을 너희에게 맡겼어. 최소한 한명만이라도 같이 보낸 밤을 기억하길 바라면서. 너희가 방에서 나올 때마다, 나는 밖에서 기다리다가 새로 만든 까먹어라 라이트를 비춰서 그와 보낸 소중한 밤을 훔쳤지.”


모노쿠마가 자신의 행적을 말하자 그들도 기억해냈다. 바로 밖에서 수상쩍게 행동하는 모노쿠마를 만났더니 빛에 눈이 멀어서 자신의 방에서 공허함 속에 깨어난 것을.


“하지만 사이하라군은 건드리지 않았어. 그런 거에 영향받기에는 너무 영리했으니까. 그리고, 너희들이 했던 음란한 짓을 모두 기억하게 하는 편이 더 효과가 좋았거든.” 모노쿠마는 모노쿠마즈의 웃음에 합류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체육관의 벽에 반사되어 울려퍼졌다.


“불쌍한 사이하라군…바보같은 클래스메이트들에게 놀아났을 뿐이었다니.”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만약 그들이 누군가에게 밤 내내 놀아나다가 다음날 아무 일도 없었던것처럼 대해진다면 단 하루라도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조수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단 한번도 화내지 않고 저 멀리서 웃어넘기기만 했다는게 카이토를 괴롭게 했다.


"조건이 뭐냐 모노쿠마?” 일행 중 가장 신중했던 료마가 물었다. 그딴 거에 놀아났다는걸 인정할 수 없었다.


모노쿠마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너희가 서로를 죽이게 할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쓰면 되지. 누가 죽기만 하면 되니까. 어떤 방법인지는 상관없어. 숨쉬지 않는 몸이 보고 싶었을 뿐이야. 그야말로 완벽한 절망이지, 그럼 내가 뭘 계획하고 있는지 알거같아?”


마키의 머릿속 톱니바퀴가 돌아가더니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안돼.”


“아하, 암살자양이 알아차렸나봐!” 모노타로의 코멘트. 에구이사르가 손을 들도록 조종하다가 TV를 떨어뜨렸다. "어이쿠 손이 미끄러졌네."


“너희가 더 화내기 전에, 그리고 내 아이들이 더 어지럽히기 전에, 나머지 지시를 전부 설명해줄게. 알았지?”


“사이하라군은 이 학원 어딘가에 있고, 뭘 하려는지 나는 알고 있어. 너희가 기억해냈다는걸 알리 없으니까 예정대로 진행하겠지. 너희들의 임무는 그가 떠나기 전까지 찾아내는것. 그 전에 먼저 찾아낸다면 그의 절망을 제거할께. 하지만 내가 이긴다며어어어어어언… 너희가 너무 늦었을때 만족하겠다고 할께.”


그의 말이 끝났을 때 무대에 가까이 있던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체육관을 뛰쳐나가면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잠들어있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를 찾아야 했다.


용서를 갈구하고 그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우쳐 주어야 했다.


그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희생할 것이다.


“이야기 맘에 들었니 모노담?” 슈이치는 무릎위에 앉은채 탐정의 말을 듣고 있는 초록색 모노쿠마즈에게 물어보았다. 도서관에서 빌린 이야기책을 읽으면서 연구교실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모노담은 대답 대신 소리를 냈지만 슈이치는 이해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 알았어. 좀더 행복한 결말을 원했구나.” 웃으면서 그를 들어올려 마주보았다. 아마도 모노쿠마가 모노담에게 그를 감시하라고 말했을 거란걸,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다는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누군가와 함께 있어서 기뻤다. “다른 이야기 못 읽어줘서 미안해, 시간이 안 되네.”


“아아, 시간은 충분히 낭비했어. 내가 여기에 온 이유가 있으니까. 모노담, 잠깐만.” 슈이치는 일어서서 조심스럽게 모노담을 내려놓았다. 곰인형은 그가 독약으로 가득한 선반을 향하는걸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이미 무얼 가져갈지 결정내렸다. 가장 약효가 빠른 것은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나같은 거에게 어울리는 최후야.”


그가 살아있고 숨쉬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목격하게 될 로봇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랑 같이 시간 보내 줘서 고마워. 괜찮다면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


모노담은 답했다. “무-엇-이-냐?”


로봇의 기계적인 음성에도 불구하고, 슈이치는 왠지 모노담이 진심이란걸 느꼈다. 그 순간까지 뿐이라 해도, 그를 걱정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그렇게 기쁠 수 없었다.




“제발 나를 잊지 말아줘.”




울음을 멈춰서 로봇에게 이 결심을 후회하지 않을거란걸 보여주었다.


한번에 병을 비워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벽난로의 자작거림만이 들리는 공간에서 모노담은 바닥에 누워있는 몸을 바라보았다. 미동도 없는 얼굴에는 미소가 잠들어 있었다.


ね-え-, 絶望しましたか-?


저는 사실 절망의 잔당이랍니다! 놀라셨나요? ......안놀랐어?

가님도 '절망시킨건 죄송하지만 준코는 고마워 할걸요. 번역해도 상관없어요. 절망을 퍼뜨리는건 추천하지 않지만 원하신다면^^' 이러셨으니까


직접적으로 섹스라는 단어를 쓰는건 최대한 자제했습니다. 몇몇 단어는 (불행히도) 모두 친숙할거 같지만서도. 대채할 수 있는 표현 떠올리다가, 그리고 쓰고싶진 않은 영어 표현 찾아보다가 좌괴감이 들어서 절망했습니다. 어쩌자고 번역러가 된거야 넌


정말 나쁜건 모노쿠마입니다. 모노쿠마만 나쁜 겁니다. 잊지 마세요. 이미 다들 아실거 같지만.


모두의 멘탈의 빠른 쾌유를 바라며 다음 연재일(5일)엔 휴재합니다 어이 잠깐


혹시 되풀이 한 방울의 가사 찾아보신분 있나요? 밑에 적어놓을게요. 한줄 한줄 곱씹으면서 절망하시길.


  1. Persona. 단간 팬들도 알고 있을 옆동네 게임 시리즈가 아니라, 보편적으론 ‘이미지 관리를 위해 쓰는 가면’을 일컫는 단어. 원래 고대 그리스 가면극에서 배우들이 썼다 벘었다 했던 가면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이후 라틴어와 섞이며 Person(사람)과 Personality(인격, 성격)의 어원이 되었고, 카를 융Carl Jung에 의해 ‘사회에서 요구하는 도덕, 질서, 의무 등을 따르고 자신의 본성을 감추거나 다스리기 위한 개념’을 의미하는 심리학 용어가 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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