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https://archiveofourown.org/works/12914505
Ao3의 Pantachan님, 감사합니다.
원제는 'I'll kill you if you let go'
날짜는 숫자에 불과합니다(당당)
시험기간이었다고 들었어요. 노력한만큼 아니 노력 안해도 좋은 결과 얻었길 바라고 아직 시험 안 보신 분들은 좋은 결과 얻으시길 바랍니다 이미 이 글을 읽고 있는 시점에서 망했지만!
지난번의 ‘작품’이 여러가지 의미로 무거웠던 관계로, 잠시 쉬어가는 셈치고 가볍게 치유물 한판 때리고 싶었습니다. 근데 분량은 결코 가벼운거 같지 않은데… 어 왜 눙무리 흐르지
Sickfic, 애를 아프게 해놓는 스토리 좋아해요! 중병이나 시한부 설정이 아니라 감기처럼 (상대적으로) 가벼운 질병. 공식에선 절대 아플지 않을거 같은 애가 약한 모습 보여주고 소울메이트가 상냥하게 간호해주는 치유물같은거. 아아 너무좋아
희망봉/비절망 AU에서 둘이 동거하는 설정이라고 행복회로 신명나게 돌려...볼려고 했지만 아직 살인게임 설정이란걸 깨닫고 절망
영원한 불공대천의 철천지원쑤 호칭문제… 이번엔 ‘슈이치짱’ ‘오마군’ 그리고 나레이션은 이름으로 고정했습니다. 딱 한번 '코키치군'을 썼는데 오타가 아닙니다. 그러나 나레이션과 오마의 생각이 헷갈리게 되는 참사가아아아아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태그에 Taking care of a sick grape가 있었습니다. 아픈 포도 돌보기라니 아 귀여워어어
코키치의 가슴이 격하게 두근거리고 목 뒷덜미에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진통제를 삼켰는데도 머리의 욱신거림은 전혀 멈추지 않은것 같았다. 심한 현기증 때문에 방이 빙글빙글 회전하는것 같아서 생각하는게 쉽지 않았다. 조용히 악담을 퍼부으면서, 종이와 연필을 내려놓았,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침대 옆 바닥에 떨어뜨렸다. 이제 더이상 개의치 않았다.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지난 몇년간 이렇게 심한 감기에 걸린적은 없었지만, 지금은 가장 비생산적인 순간이었다. 오마 코키치는 아프지 않았다. 의지력, 건강하고 동시에 허약한 몸, 많은 활동량과 좋아하는 음식으로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 아무 일이나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살인게임에 갇힌채 아픈건 인생에서 필요한 마지막 일이었다. 노려지기 쉬운 타겟이 된건 물론, 괜찮은 척 하는게 가면 갈수록 어려워졌다. 결국 여러 가지 약과 간식 잔뜩, 그리고 방에서 차를 끓일 재료와 도구를 가져오기로 했다. 그러나 당연하지만 계획에 집중하려고 아무리 애써도 몸이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이래 가지곤… 더이상 못해…! 한시라도 빨리 멈추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못할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머리에 손을 파묻었다. 두통 때문에 얼굴을 찡그렸다. 모든 것들이 전부 좋아질때까지 한숨 자라고 명령했지만,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할거야, 마음이 몇번이고 계속해서 속삭였다.
하지만 눈이 불처럼 화끈거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바꿀 수 없었다. 눈물의 장막 너머로 그리려고 하는건 어려웠다.
녹초가 된 채로 매트리스에 자신을 내던지자 길고 짜증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이딴 바보같은 병…정말 싫다고…아무것도 안되잖아…이젠 싫어…”
익숙한 무력감이 가슴을 메이게 했고 눈물이 눈을 떠나겠다고 위협했다. 팔로 재빨리 닦아내니까 너무나도 비참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아플때 혼자 있는건 싫었다. 돌봐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약간의, 어쩌면 많은, 애정과 그만 쉬고 자신을 돌보라고 강요해줄 사람을 갈망했을 뿐인데. 하지만 그럴 사람이 있을리 만무하고, 게다가, 정말 일해야 했다…
갑자기 노크소리가 들리자 움찔할 수 밖에 없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를 놀래키지 않게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노크하는 사람은 딱 한명밖에 없었다.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슈이치짱이라는걸 알고 있었다. 슈이치짱은 그가 자신을 고립시킨다는걸 깨달았을까. 슈이치짱이라면 틀림없이 걱정되었겠지, 슈이치짱이 도와주러 왔다, 슈이치짱, 슈이치짱, 슈이치짱. 적잖게 당황하면서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선 결국엔 문을 열거라는, 탐정을 들여보내면 처량한 기분이 들거라는 생각을 애써 억누르러 했다.
“오마군…? 잠깐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슈이치의 조용한 목소리가, 조심스럽고 걱정으로 가득 찬 목소리가 문 너머 그에게 닿았다.
“…뭔데 그래? 나 지금 바빠, 바보 탐정이랑 게임할 시간은 없어! 중요한 총통의 업무가 있단 말이야!” 그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혼란스러운듯 짜증난 목소리였지만 단호함이 결여되어 있었다. 슈이치는 몰랐더라도 최소한이나마나 진실이 일부 담겨져 있었다.
“진심… 처럼 들리지 않아. 나도 자물쇠 딸 수 있잖아, 기억나…?”
아, 맞다. 슈이치짱에게 탐정일에 도움이 될만한 기술을 알려주겠답시고 가르쳐줬으니까. 당연히 또다른 밀실 사건이 일어나면 1순위로 의심을 사지 않게 위해서라는 말 따위로 포장했지만, 그치만…
슈이치짱은 정말 필요하다면 자신의 거짓말을 논파할 수 있으니 저항은 무용지물이란걸 알고 있었다. 만약 걱정이 너무 커지면 엄청난 시간을 들여서라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낼 테니까. 결국 코키치는 일어나서 도중에 비틀거리다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문을 향했다.
“꼬…꼭 그래야 돼? 그냥 뭘 원하는지만 빨리 말해, 이럴 시간 없다니까….”, 지친 듯 신경질적으로 단어들이 튀어나왔다.
“…제발 문좀 열어주면 안될까? 며칠째 방에서 안나왔잖아, 걱정돼서 그래.”
코키치는 문고리를 쥔 채 멈췄다. 문을 열기 전에 옷매무새와 까치집을 조금이나마나 정돈하고, 눈을 비비고선 가능한 한 건강해 보이게 깊은 숨을 들이마쉬었다.
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드러난 슈이치의 표정으로 판단하건데, 예상보다 훨씬 나빴음이 틀림없었다. 코키치는 탐정을 바라보자 얼굴에 드러난 놀람과 걱정에 얼굴을 찡그렸다.
“ㅇ…오마군, 무슨 일이야? 너…”
“끔찍해 보인다고? 응, 알고 있어, 그러니까 기분이 백배는 나졌네, 고마워, 바보탐정”, 슈이치의 쓸데없는 해설에 짜증이 나서 딱딱거리듯이 대답했다. 정말로 존경하고 높게 평가하지만, 가끔 머리가 너무 둔해빠질 때가 있는 바보 탐정 같으니라고.
그 대답은 탐정의 의심을 약화시킨것 같았지만, 이제 작은 소년을 철저히 검사하는 그의 표정은 숨김없는 우려로 가득 찼다. 그 자각에 속이 뒤틀리는것 같았다. 예상했던 대로야. 물론 슈이치짱이라면 즉시 알았을 테지만. 문을 열지 말았어야 했어.
“아파? 왜 말 안했-“, 슈이치가 입을 열자마자 서둘러서 창백한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최선의 선택은 아니였겠지만, 입을 다물어주기만 한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쉿! 조용히 해줄래? 어서, 안으로 들어오고 계속 조용히 해줘”, 속삭이면서 조심성이라곤 한 줌도 없이 팔을 붙잡아 자비없이 방안으로 끌고가선 인간적으로 가능한 한 빨리 문을 닫았다. 머리가 지끈거려서 얼굴을 찡그렸지만, 그의 부주의함이 더욱 그를 화나게 했다. 물론 슈이치도 그의 행동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아서, 이맛살을 찌뿌린채 회의적인 태도로 그를 마주했다.
“왜? 왜 항상 모든걸 혼자서 하려고 하는거야…? 무슨 일이 있으면 날 믿고 도와달라고 말해도 된다고 했잖아, 오마군!” 가슴에 한 손을 얹은 채 진심을 담은 외침. 아주 조금, 조금뿐이지만, 그 말이 마음속의 스위치를 건드리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 한 구석이 아팠다. 평범한 상황이었더라면 분노로 반응했겠지만, 기력이 없어서 대신 입을 삐죽 내밀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화끈거리고 있었던 터라, 거짓눈물이 차오르는게 평소보다 쉬웠다.
“너-너무해…! 나는…정말 좋아하는 슈이치짱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착한 일 ㅎ-하려고 했던 건데…”, 떨리는 목소리. 조용한 훌쩍임과 울음. 슬픔과 비애로 찡그린 표정. 솔직함이 아예 없는건 아니었지만, 그중 대다수를 두개골을 울리는 고통을 감추는데 썼다. 슈이치의 눈에 걱정이 번쩍이자 시선을 피하고선 대답했다:
“지금… 이러지 마. 컨디션 안좋잖아? 도와줄게… 제발.”
코키치는 몇번 더 훌쩍이고선 가장 마음이 아파오는 표정을 지었다-오래 지나지 않아 밝은 미소를 짓자 눈물이 대부분 사라지긴 했지만. 있는 힘을 전부 짜내서 진이 빠지긴 했지만 슈이치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아직 거짓말같은 기교로 가면을 바꿔쓸 수 있다는걸 알아서 다행이었다,
“니시시! 헤, 재미없어! 조금만 더 장난쳐도 되지? 지난 며칠동안 컨디션 최악이었거든, 재밌게 해줘!” 평소의 장난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끝에 가선 목소리가 마지못해 포기하라고 협박했다. 슈이치는 고개를 젓고선 그의 손을 잡아 조심스럽게 침대까지 끌고 갔다.
“그냥… 누워, 내가 알아서 할게. 컨디션은 어때, 뭐 가져다 줄까?”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면서, 코키치는 순순히 침대에 앉아 이불을 끌어당기면서도 탐정을 향해 활짝 웃고 있었다.
“아이스크림! 그리고 판타도!”
“…아무것도 안 줄거야”, 슈이치는 한숨을 내쉬었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걱정이 점점 커지는것 같았다. 컨디션이 최악임에도 불구하고 가면을 벗으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를 걱정시킨다는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슈이치는 그를 비난할 수 없었다. 너무 비참한 기분이어서 조금만이라도 기꺼이 보여줄 리 없으니까. 심지어 그에게도. 그걸 눈치채야 했지만 코키치는 최소한의 골칫거리라도 억누르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를 내버려 두는 대신에 탐정은 그에게로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보랏빛 머리카락 몇가닥을 걷어내고선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 작은 손짓이 즉시 짜증을 덜어 주었다. 이 작은 행동이 다시 한번 누군가가 곁에 있어주면… 좋겠다는걸 떠올리게 해줬다. 슈이치짱이 곁에 있어줬으면 했다. 그 생각이 가슴을 조이게 했고 더없는 행복을 사라지게 했다. 하지만 안심… 이라 부를만한 것도 있었다. 특히 슈이치짱의 얼굴에 드러난 집중과 진심어린 걱정과 결합해서, 이상하게 마음이 이끌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몇초동안 숨이 평소보다 가빠지고 심장이 계속해서 두근거렸다. 무언가가 안에서 조금 녹아내렸고 잠시 후, 슈이치는 손을 떼고 입을 열었다.
“…이마가 불덩어리야. 내가… 이거저거 가져올게. 방 열쇠…?”
“침대 테이블에” 대답하려면 끝까지 들을 필요도 없었다. 슈이치는 마지막으로 그를 바라보기 전에 고개를 끄덕이고선 열쇠를 집었다.
“곧 돌아올게, 걱정하지마.”
상냥하고 친절한 목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끄덕이고 슈이치가 방을 떠나고 조용히 문을 닫는걸 보는 내내 기진맥진한 피로에 따라잡히는 것 같았다.
침묵에 집어삼켜져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좋으면서도 동시에 끔찍했다. 곁에 있어주기를 정말 바랬지만, 그건 효율성을 떨어뜨리겠지. 그리고 자신은 엉망진창 인데다가, 방은 훨씬 더 엉망진창 이지만 슈이치짱은 그래도 남아 있어 주겠다고 했다… 그 자각에 심장이 내려앉으면서 동시에 기록적인 수준으로 떨어졌다. 필사적으로 생각을 정리하려고 하다 신음과 함께 포기하고선 매트리스로 자신을 내던졌다. 아마 이번만은 슈이치짱에게 맡겨야 될거같아. 어차피 머리도 제대로 안돌아가니까.
게다가, 만약 자신에게는 정직하다면, 곁에 있어주겠다고 약속했고 증명해준, 신뢰하는 슈이치짱에게 의지하는건 두려웠지만, 오랬동안 필요했던 확신이기도 했다. 하지만, 누군가를 믿고 이 일을 맡긴다는건… 그 생각이 불편한 것처럼 몸을 떨었다. 이걸 할 수 있는건 나 뿐이야, 내 임무인걸. 하지만 생각이 마음대로 안됐다…
코키치는 눈을 감고선 침착하게 기다렸다.
잠시 꾸벅꾸벅 졸았다. 반은 잠들고 반은 깬 채, 몸도 마음도 휴식에 빠지고, 부글부글 끓는 열기, 마음 한 구석에서 딸각거리는 소리도 거의 눈치채지 못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한채, 그냥 베개로 파고들고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몇마디를 내뱉었다. 무언가가 어깨를 조심스럽게 건드리자 온몸이 동요해서 뒤를 돌아보아서 휘둥그레진 눈을 탐정에게 고정시켰다.
“ㅇ-아, 미안… 놀래키려던건 아니였어…”, 슈이치는 사과하면서 다시 손을 내려놓았다. 새로운 냄새가 폐를 채우자 코키치는 고개를 젓고 눈을 비볐다. 어리둥절 해져서 냄새의 근원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곧 침대 테이블 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거운 수프 한그릇과 과일 조금, 많은 물을 발견했다.
“…며칠동안 제대로 못먹었지? 어제 저녁도 안먹었으니까…”
정말이지 가정적이고 배려심이 넘쳐서, 그 행동에 심장이 벅차오르는게 느껴졌다. 시선을 피하면서 끄덕거렸다. 조금 부담스러웠다. 막 대답하려는 순간, 슈이치는 덧붙였다:
“살짝 맵게 했어…”
“ㄱ-그래… 그건… 조금 매운 음식 좋아해…”, 그렇게 더듬거리자 뺨에 열이 확 올랐다. 다른 말을 하거나 말로 감사를 나타내는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일어나 앉아 침대 끝머리로 다가가서 그릇을 집었다. 조심스럽게 먹기 전에 슈이치는 아직도 약간 뜨겁다고 경고했다.
맛있었다.
슈이치가 침대 위 바로 옆에 앉은 채 침묵 속에 시간을 보냈다. 때때로 그를 확인하면서, 탐정은 호기심에 방안을 둘러보았다. 슈이치를 처음으로 들여보낸지 조금의 시간이, 처음으로 슈이치짱을 이름으로 부른지 며칠이 지났다. 상황은 좋지 않았지만… 이제 와서 뒤돌아보면, 탐정은 그의 실수를 용서했고 의도는 좋았다는걸 알았다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지하겠다고 말해주었다. 그 말은 코키치가… 슈이치짱에게 자신의 계획을, 얻은 지식을 말해주는 선택지를 고려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감시당하고 있을 경우를 대비해서 말하는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
지속적인 감시 하에 있다는 생각은 극도로 불편해서 파라노이아가 폭발했다. 대부분의 시간엔 성공적으로 그런 생각들을 머릿속에서 치워버리곤 했다. 그냥… 지금은 어려웠다. 찰나의 순간, 슈이치가 완전히 믿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이제 정말 토하고 싶어졌다. 위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신뢰가 닿을 수 있는 한 그를 믿었다.
어떤 이유에선지는 모르지만, 갑자기 엄청난 피곤함을 느꼈다.
“…평소보다 더 지저분한데. 조금만이라도 청소해줄까…?”, 슈이치의 제안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맘대로 해. 중요한건 건드리지 말고.”
탐정은 끄덕거리고선 발걸음을 옮겼다. 먹을때는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치유되는 온기가 몸을 채웠고 파괴적인 의심이 머릿속을 흐렸다. 자신의 방을 정리하는 슈이치짱을 바라보고도, 관찰하고도 싶지 않았다. 간신히 전부 해낼수도 없는 상태였기도 했고. 오래 지나지 않아, 흩어진 휴지와 구겨진 종이들은 모두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다행히도 기진맥진 해서 음식을 입에 넣고, 삼키고, 깨어 있고, 깜박거리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릇의 바닥이 드러나자 갑자기 슈이치가 새 옷 한벌을 밀어넣기 전까지 시간이 얼마나 빨리 흘렀는지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잠들기 좋은 편안한 옷. 코키치는 빈 그릇을 옆으로 치우고선 어리둥절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국물의 짭조름한 냄새가 아직도 공기중에 맴돌았다.
“이제 뭘 할까?”, 물어봤다. 옷 갈아입는다고 뭔가 달라질 리는 없잖아?
“…샤워한 다음에 옷 갈아입어. 심부름하고 이것저것 처리하고 올게, 알았지?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 무슨 일 있으면 불러줘”, 슈이치의 한마디 한마디가 단호한 설명에 당황했다.
일어나고 싶진 않았지만…슈이치가 말하니까 자동으로 대답이 나왔다: “니시시! 기대하지 마! 어차피 안 미끄러질거니까.”
슈이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을지언정 그 대답을 받아들여, 옷을 건네고 그가 일어설 때까지 기다렸다. 일어서자마자 비틀거렸지만 간신히 욕실에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벽에 기대어 서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숨을 몇번 깊게 들이마시니까 목덜미와 이마에서 땀이 흘렀다. 이제 이걸 ‘작업’ 이라고 부른다는 유일한 사실은 어이없을 정도로 웃겼지만, 그것도 상관 없었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고 그게 싫었으니까. 짜증나서 벗은 옷을 구석으로 걷어찼다. 샤워기를 키고 뜨겁게 타는듯한 느낌이 고통을 녹여 없애버리길 바랬다.
그러지 않았다. 심각하게 어지러워졌지만 최소한 근육통은 가라앉은것 같았다.
다시한번, 시간이 흘러가자 불안해졌다. 몇초를, 몇분을, 몇시간을, 며칠을 낭비하고 있는데. 생각이 몸에서부터 저 멀리, 마치 연결이 끊긴 것처럼 떨어져 있는것만 같았다. 한순간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물을 느꼈고, 곧바로 뿌연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자신의 창백한 피부를 관찰했다. 달아오른 뺨, 새빨개진 눈. 전부 조금 볼품없었다.
옷을 갈아입자, 현기증에 거의 기절할 것만 같았다. 머리는 아직 축축하고 따뜻했다 - 착잡한 기분이었지만 깨끗함 덕분에 한결 편안해졌다. 더러운 침대로 돌아가는 생각이 그 긍정적인 느낌을 부수겠다고 협박했지만, 문을 열자 새로 정돈된 침대가 앞에 있었다. 깨끗한 이불, 더러운 접시도 바닥에 쓰레기도 없고, 상쾌한 공기가 방을 채웠다. 슈이치짱도 없는게 흠이지만. 작은 미소가 입가에 번졌고 침대에 무사히 착륙하자 만족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베개에선 새 빨래 냄새가 났다.
바로 그 순간, 문이 찰칵 열리고 슈이치의 발소리가 방을 채웠다. 어수선한 머리와 헐렁한 옷, 베개에 깊이 파묻은 얼굴에 칠해진 미소의 초고교급 총통을 발견하자 조용히 웃어야만 했다. 코키치는 절대 과소평가 해선 안될 위협이 될 수 있지만, 천진난만하고 귀여운 모습을 보여줄때는 반드시 간직해야할 순간이었다.
코키치는 그를 향해 돌아섰다. 베개를 꼭 껴안고 함박웃음을 지은 채.
“전부 깨끗하고 깔끔해서 맘에 들어!”
“어… 그래. 건강에 중요하니까… 조금 괜찮아 졌어?”, 대답하는 슈이치의 입가에 멋쩍어하는 미소가 피어났다. 모은 물건들을 빈 안락의자에 내려놓았다. 코키치는 그를 향해 끄덕거리다가 머리가 아파왔는지 살짝 찡그렸다.
“방이 빙빙 돌고 머리가 둘로 쪼개질거 같지만, 그걸 빼면 훌륭해! 너무 지쳤지만…”
그 문장에 밑줄쳐서 강조하려는 것처럼 긴 하품이 나왔다. 호기심에 슈이치가 가져온걸 빤히 처다보더니 미심쩍은 시선을 보냈다. “그게 뭐야?”
슈이치가 입을 만한 스타일로 보이는 또다른 편한 옷 한벌을 발견했다.
“아, 내가… 그-그러니까… 쓸쓸하지? 그래서 옆에 있어줄까… 라고 고민했는데, 만약 너가 원한다면…”
믿기지 않아서 눈썹이 곤두섰지만 곧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었다. 슈이치의 뺨이 새빨개지자 당황하고 불안한 것처럼 보였다. 한 다리에 체중을 옮겨 실으면서 시선을 피하더니 코키치의 대답을 기다렸다. 평소보다 대답을 이끌어내는데 오래 걸렸다. 왜냐면 특히… 그래, 슈이치짱을 당황스럽게 하는건 쉬웠으니까. 하지만 자신을 간호해주려는 단순한 의지에 안절부절 못하는건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이 광경이 마음속 스위치같은 걸 키자 심장이 따뜻하면서도 무거워졌다. 일어나 앉아 이불을 끌어당기고, 말투가 진지해 졌다. 동시에 사려 깊으면서도 까다로워 지려는 것이 섞인 이상한 심정이었다.
“가서 옷갈아입고 침대로 와줘. 그걸 원해.”
분명히 슈이치가 예상한 답은 아니였다. 가끔씩이지만 여전히 코키치의 예측 불가능함에 적응하는게 어려울 때가 있었다. 그렇지만 간단히 끄덕거리고 숨을 내쉰뒤 옷가지를 챙기고 욕실로 사라졌다.
코키치는 혼자서 웃다가 다시 털썩 드러누워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가끔 사람들이 자신의 명령에 따르는 데에서 상당한 만족감을 느꼈다. 말 뒤에 악의가 숨겨져 있었다는건 아니지만, 이 상황이 만족스러워졌다.
잠시 한숨을 돌리자 몇분후, 더 편안한 옷차림으로 나타난 슈이치는 껴안고 싶어지게 보였다. 탐정은 침대 옆 쑥쓰러운듯 옷매무새를 정돈하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뭘 해줬으면- “, 그렇게 입을 열었지만 코키치는 갑작스럽게 말을 끊었다.
“안아줘.”
“어-어어?”
명확한 이유는 딱히 없었지만, 코키치의 표정은 울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아이의 그것으로 녹아내렸다. 거짓 눈물이 차오르고 슬픔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게 느껴졌다. 훌쩍이면서, 낙담을 모조리 끌어올려 표정에 실었다. 전부 거짓말… 이 아니라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아픈데 며칠을 혼자서 보내니까 무력하고 허약해져서 평소보다 훨씬 쉬웠다.
“ㅈ-지금까지… 혼자서 외로웠는데… 아-안 안아주면 곧 죽을거 같아…! 딱 한번만 안아줘, 슈이치짱… 제발?”
그를 진정시키려는 것처럼 팔을 든 슈이치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잠-잠깐만! 오마군, 왜 그러는-“
“아-안 안아줄거야? ㄴ…너라면… 나-날 버리려는 거야? 내 약한 면을 보여줬는데도?”, 미묘하게 원망하면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별로 힘들이지 않아도 눈물이 쏟아졌다. 이상했지만, 연기였다고 하더라도 마음 한 구석에선 조금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슈이치는 완전히 속지 않았다.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이 상황에 압도당할것만 같았지만 이젠 침대에 걸터앉아 유념시키려는 듯이 어깨를 잡았다.
“가끔 안은 적 있지 않았어? 내가 여기 남아있는 것도 처음이 아니잖아… 너가 원한다면 그냥… 안는게 어때, 코키치군? 안된다고 말하지 않을게”, 자신의 마음을 말하는 슈이치의 목소리엔 진심과 단호함이 담겨져 있어서 기분이 조금 나아지면서도 나빠졌다. 그말에 안정되고 솔직히 도움이 되긴 했지만. 다시 훌쩍거리면서 눈을 비비고 기대하는 듯한, 그리고 어쩌면 도발적인, 표정으로 슈이치를 바라보았다.
“ㅁ-말로만 하지 말고 안아 주라고, 바보!”
슈이치는 이맛살을 찌뿌리더니 즉시 코키치에게 팔을 꼬옥 둘렀다. 그를 가까이 끌어당기더니 손바닥을 등에 대었다. 둘다 탐정의 갑작스러운, 그러나 단호한 행동에 깜짝 놀랐다. 감정을 가라앉히느라 입을 살짝 벌렸던 코키치는 슈이치를 껴안고선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보랏빛 머릿결을 쓰다듬자 눈이 감기고 환희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직도 젖어있었지만 슈이치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심장이 마구 뛰는걸 느꼈다. 아마 대부분은 열 때문이겠지만. 어쩌면 껴안는건 최선의 방책이 아닐지도 몰랐다. 슈이치를 오염시키고 싶지 않았고 자신의 몸이 이미 열을 발산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일어났는데도 그의 품 안에서 녹아내려서 놓아버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보 슈이치짱… 옮을 텐데…알고 있지?”
“신경 안써…”
코키치는 의심이 절절한 눈으로 그를 주시하기 위해 등을 기댔다. 눈썹을 치켜올린채 대답을 기다렸다.
“그… 글쎄… 지금 기운이 없고 컨디션 안좋잖아. 나한테선… 숨길 수 없어. 하지만 내가…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잖아, 기억나…?” 설명하기 시작한 슈이치의 목소리에 수줍음이 잠들었다. 그치만 그러고 나서 확신을 계속 유지하라고 상기시켜야 했다. ”너가 다시 좋아질 때까지 떠나지 않을게. 너도 나에게 그대로 해줘.”
혀끝에서 항의가 굴러떨어지겠다고 위협했지만, 제시간에 붙잡아서 진실로 대체했다.
“…응. 하지만 이유없이 건강을 해치라고는 절대 안했잖아!”
탐정은 어색한 미소와 함께 반론했다: ”방금 안아달라고 하지 않았어…?”
“…아…아마 그랬을지도. 그-그냥 안아주면 고맙겠는데.”
빠른 승리에 슈이치는 조용히 웃으면서 그를 껴안았다. 패배에도 불구하고, 그를 마찬가지로 껴안고선 조심스럽게 끌어당기는 코키치의 입가에도 미소가 피어났다. 등이 매트리스에 착지하고 슈이치가 반쯤 위에 눕게 되자 만족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온몸에서 슈이치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익숙한 향기가 폐를 채웠고 짧은 소매 덕분에 피부의 접촉을 만끽할 수 있었다. 슈이치의 팔은 정말이지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서로에게 더 깊숙히, 아늑하게 파고들었다. 그것만으로도 벌써 훨씬 많이 괜찮아졌다.
걱정에서 풀려나고 입가에서 행복이 춤추자, 슈이치의 밤하늘색 머리에 얼굴을 파묻고 다시한번 눈을 감았다.
“놓아버리면 죽여버릴거야, 슈이치짱.”
찰나의 순간 그가 움찔하자 코키치는 까르르 웃다가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엔 말을 못했지만 슈이치는 힘겹게 말을 꺼냈다.
“안 그럴게, 하지만… 그건 네 신조랑 어긋나지 않아?”
코키치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번졌다. “우와아, 나도 상식이 있다는걸 기억하고 있었구나! 대단해!”
슈이치가 깊은 한숨을 쉬자 키득거렸다. 탐정은 자세를 바꿔 똑바로 눕고선 코키치를 끌어당겨 그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기대게 했다. 그의 심장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뺨이 옅은 심홍색으로 물들었다. 확실히 낯설었지만 환영했다. 트릭스터는 침묵을 만끽하다가 탐정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슈이치의 손이 머리를 어루만지자 눈을 감고 몇번 심호흡을 했다. 그저 그의 심장소리를 듣기만 하면서.
몸이 마치 온기로 이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편안하고, 나른하고, 안전한 온기로만.
“안 그럴게…”
슈이치의 대답에 끄덕였다. 몇가지를 고려하더라도 이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숨 쉬어도 괜찮아. 슈이치짱 덕분에 곧 좋아질 거야.
너무 많이 신경 쓰지 않으면서 모든 느낌이 마음과 몸과 맞닿도록 내버려 두었다. 정말로 환영한 손끝의 부드러운 스침, 만족스러운 한숨과 함께 입술을 떠나는 슈이치의 이름, 포옹에서 느끼는 안도. 피로가 눈 깜짝할 사이에 따라잡았지만 더이상 맞서 싸우지 않았다. 무해한 어둠이 머릿속에 퍼지고 편안한 잠의 세계에 빠졌다. 슈이치는 그를 꼭 끌어안고선 살펴보다가 함께 잠에 빠졌다.
벌써 훨씬 좋아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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