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났다. 단간론파와의 싸움이 끝났다. 희망과 절망의 불협화음에서 진실을 찾아냈다. 이제 더이상 무의미한 유흥거리일뿐인 죽음은 없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서? 단간론파의 끝이 나를 제외한 모든 초고교급을 몰살할 정도로 가치있는 일이었던가? 초고교급이 단간론파의 참가자라면, 초고교급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단간론파가 끝난건가? 단간론파를 끝내기 위해 초고교급이 죽어야 했던건가? 그렇다면 왜 유일한 생존자는 내가 된걸까?
진실을 밝혀내는 탐정? 소설에서 마르고 닳도록 봐왔지만, 그것을 현실에 구현해 내려면, 돌이킬 수 없는 희생이 필요해. 그렇게 구현해낸 진실의 추구자가…바로 나. 돌이킬 수 없는 희생은…모든 것. 나의 청춘, 희망, 감정, 우정, 진심, 사랑.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선 감정을 버리고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선 인간의 모든것을 포기해라. 나는 이 ‘진리’를 최대최악의 방법으로 깨달았다.
죽고 싶은데 죽고 싶지 않아. 나도 따라가고 싶은데 모두의 몫까지 살아가고 싶어. 끝났는데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아. 신님, 나는 살아있는데 죽은 것보다 무의미해. 게임이 시작하기 전에도, 게임이 끝난 후에도 나는 외톨이잖아? 이러면 모든것이 무의미하잖아?
내가 살아간 이유가 진리를 찾기 위해서였다면, 그렇게 찾아낸 진리를 어떻게 써야 해?
-
“…하라 슈이치?”
고민하는 나를 누군가가 불렀다. 부스스한 머리와 바보털이…나에기씨나 히나타씨, 키보 같기도 하다. 초고교급 희망…이라 부를만한 존재다. 단간론파의 존재의의 ‘희망’의 상징…!
…희망도 절망도 미래도 부정한 내가 만나기에는 영 껄끄러운 사람이다.
“절망하는 거야?”
“아뇨, 절망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어째서?”
“진실을 알아냈는데 더 절망할 이유가 있나요?”
“과연 초고교급 탐정, 아니 초고교급 진리인가…”
초고교급 진리, 초고교급 희망대신 내가 부여받은 궁극의 타이틀. 희망과 절망에 현혹되지 않고 진리를 찾아내어 살인게임을 멈춘 공로를 인정받아, 단순히 진실을 찾아내는 탐정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명예를 얻었다. 다만 그런 영예마저도 나에게는 무의미할 뿐이란걸 아는 사람은 없겠지.
“사이하라 슈이치. 만약 모든 단간론파의 참가자가 다시 살아갈 수 있다면 너의 존재를 포기할 수 있어?”
이건 그럴싸한 거짓말이…아니다. 거짓말이었다면 그 말을 내뱉은 순간 세계가 보라색으로 물들었을텐데, 오히려 황금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허황된 거짓말이 아니란건 알거 같은데, 무슨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그런 거래를 하자는 걸까…
“너는, 우리는, 살인게임에서 살아남아 숭고한 희생을 대가로 희망과 절망의 인과율을 초월한 존재야. 보통 사람들이 찬양하는 얄팍한 희망 따위는 신경쓸 필요 없어. 이젠 희망과 절망, 과거와 미래, 진실과 거짓에 휘둘릴 필요가 없게 되어서, ‘너’가 진심으로 원하는 스토리를 선택할 수 있어.”
제 3자에게 조종당해 억지 선택을 강요당할 필요가 없단 건가? 내가 원하는 스토리라…
물론 모두가 살아갔으면 좋겠어! 이 모든걸 가능하게 한 사람들이 먼저 이 자유를 만끽해야지! 그래도…내가 존재하지 않게 될 정도로 가치 있는 걸까?
만약 나의 존재가 소멸함으로서,
누군가가 절망하지 않고, 누군가가 죽지 않고, 누군가가 사랑하고, 누군가가 진심을 말하고, 누군가가 희망하고, 누군가가 행복해하고, 누군가가 살아갈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가치있는 일이겠지.
그래, 선택하자. 내가 믿는 미래를. 내가 믿는 희망을. 내가 믿는 행복을. 내가 믿는 가치를. 내가 믿는 진리를.
괜찮아. 괜찮을거야!
나 하나의 삶보다는 800여명의 생명이 더 중요하잖아?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그게 단간론파의 생존주의잖아?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않게 되더라도, 내가 지키고 싶었던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다면, 나는 그걸로 만족해.
…그래도…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거, 조금 섭섭하네.
내 이름은 아카마츠 카에데. 사이슈 학원 2학년이다. 특별한건 없고…피아노전공 이란거 정도? 아, 최근 이상한 꿈을 꾸고 있다. 아니, 악몽은 아니지만 왠만한 악몽보다 기묘하다.
나를 포함한 16명이 어느 학원에 고립되고, 무슨 흑백 곰탱이가 나왔던거 같다. 학급재판…이란게 열렸던것 같고, 어쩌다 내가 살인범으로 몰려서 교살당하는 참 다이나믹하게 어이없는 스케일의 꿈이었다. 내 ‘처형’ 도중 배경음악으로 ‘고양이 춤’이 흘러나왔는데, 박자 음정 다 틀렸지만 정말 소름끼치도록 괴기하게 들렸다. 피아노를 처음 배우면서 친 그 곡이 어쩌다 왠만한 호러영화에 나와도 손색없을 수준의 곡이 됐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물론 만화를 너무 많이 본거라고(지난주에 본 꿈도 희망도 상실한 계약하는 마법소녀 애니처럼) 반론할 수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꿈 내내 목이 아팠다. 고개를 너무 숙여서 아픈게 아니라 올가미로 목을 조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모자를 쓰고 다니던 소년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내 처형이 시작되자 나를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잠깐 본 그 눈에는 죄책감(그렇지만 왜?)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이 기묘한 꿈이 2주내내 반복되자, 현재 금요일 오후 나는 친구 몇명을 모아서 4500원어치 팥빙수를 대가로 이 기묘한 꿈에 대한 상담(?)을 듣고 있다. 그리고-
“혹시, 전생의 기억이라던가, 더 생각나는거 없슴까?”
“아니 무슨 소리야! 소름끼친다고!”
“…시끄러워, 모모타.”
보다시피 성과는 없는것 같다.
팥빙수도 완벽하게 처치했겠다, 어쨌거나 우리는 거리로 나왔다.
금요일 오후여서 그런지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아, 방금 어떤 사람이랑 부딪힐 뻔했다.
방금 지나간 사람. 그 밤하늘색 머리를, 호박색 눈을, 전에 분명 본 것 같은데. 아니, 보았었는데-
…아.
……기억났다.
나는 달려나갔다. 금요일 오후의 인파도, 아마미군의 당황한 목소리도 나를 멈출 수 없었다. 이 희미한 기억을 놓치지 않아. 이내 모든것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월광. 트랩과 포환. 학급재판. 고양이춤. 그리고, 그리고-
그 이름. 뭐였지? 마지막까지 믿고 싶었던 그 이름. 그 이름은-
“사이하라군!”
그 이름이 트리거가 되기라도 한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나를 따라 사이하라군을 쫓기 시작했다.
사이하라군. 사이하라 슈이치. 초고교급 탐정. 학급재판을 이끌어간 사람. 살인게임을 끝낸사람. 초고교급 진리. 나를 사랑한 사람…!
“사이하라군! 사이하라-슈이치군! 슈이치군!”
목이 터져라 외쳤다. 안돼. 떠나지 말아줘.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평생 잃어버릴 것 같단 말이야. 그때 내가 너를 떠난 것처럼, 너도 나를 떠나는 거야? 싫어. 가지 말아줘…!
그리고 사이하라군은 뒤돌아봤다. 웃고 있었다…아니 울고 있었나? 오후의 햇빛에 눈물이 잠시 반짝이다가 그 미소마저도 아스라져 사라졌다.
“슈이치군…슈이치군!”
……고마워.
내 이름을 되찾았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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