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끝나신 분들, 노력 안해도 좋은 결과 얻었길 바라고 아직 시험 안보신 분들은 뭐하는 거야 빨리 창 닫고 공부해
고객의 숫자를 늘릴려면 컨텐츠의 가짓수를 늘리면 되겠지
문체에 변화를 꾀하고자 주어+동사->형용사의 기능을 하는 동명사+주어 위주의 서술, 현재형에서 카에데가 엮이면 과거형이 되는 서술의 시차 교차, 그리고 호칭 없이 요비스테(=그냥 이름으로 부르기) 위주로 번역해 보았습니다. 무슨 소리인지 1도 모르겠죠? 괜찮아요. 깔끔하게 무시하세요.
그리고 이제부턴 외래어 그대로 쓸거야. 플러팅을 플러팅이라 쓰지 못했던 과거 이젠 아디오스 사요나라 오르보와다!
항상 한결같았던 카에데. 기억을 싹 지워내도 잊을 수 없었던 명랑한 성격, 다른 사람들을 쥐고 흔들긴 했지만, 마음씨 고왔고, 항상 모두에게서 장점을 찾아낼 준비가 되어 있었지. 이제 마키는 기억한다. 한참 늦었을때 기억해낸다.
세명의 생존자들과 부서진 키보와 시로가네의 잔해를 회수하러 다가오는 팀 단간론파 스태프들. 저항하지 않고 따르는 마키. 바들바들 떠는 사이하라. 울음을 터뜨리는 유메노. 하지만 마키에게는 그 무엇도 상관 없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은 전부 죽었으니까. 마키는 퇴장 양식과 비공개 합의서에 서명하고선 운영진에게 심리치료는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진짜 세계에서의 기억을 복구하고 싶으신가요? 한명이 물어보자, 마키는 눈을 굴리면서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한다. 진짜 기억이라면 적어도 시로가네가 준 암살자 과거에서 한발 나아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되겠지. 지루하고, 평범할지도 모르지만, 고통스럽지 않고, 가혹하지 않고, 학대와 고문으로 이뤄져 있지 않겠지. 대신 더 최악의 것을 받게 된다.
처음으로 키스했을때, 카에데가 마키에게 허리를 숙이고 서로의 입술이 맞닿았을때 그들은 열두살이었다. 얼굴이 새빨개진채 소리지르는 마키. "방금 그거 뭐야!"
반면 꺄르륵 웃는 카에데. "미리 연습해야 하니까? 크면 남자애들한테 키스해야 할 때가 있지 않을까." 씩씩거리는 마키. 고아원 남자애들은 전부 징그러운걸. 수줍음을 많이 타서일지도 모르지만, 카에데는 마키가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마키의 기억에선 항상 함께였다, 마키의 내향적인 성격과 완벽히 상호보완적이었던 카에데의 외향적인 성격. 어느날 남자들 때문에 헤어지게 된다는 생각에 뒤틀려지는 속. "난… 그런거 관심 없어." 마키가 그렇게 말하자 카에데는 볼을 부풀리며 뒤돌아섰다. 둘중 그 누구도 두번 다시 그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밤, 카에데와 다른 여자애 3명과 같이 쓰는 비좁은 침실에 누워있을때, 머릿속에서 키스를 몇번이고 재생했다.
죽은 사람들을 생각할때마다 무언가가 마키의 가슴을 옥죄어온다. 카에데와의 기억이 정말로 일어났다는걸 확인하기 위해 몇번이고 팀 단간론파 소속 심리학자의 상담실 문을 두드리게 된다. 어느 대답이 더 나쁜지 모른다; 예 혹은 아니요. 의사가 단순히 살인 게임동안 끈겼던 기억을 복구하는 것뿐이라고 했을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녀와 유메노와 사이하라는 저명한 토크쇼, 잡지 인터뷰, 사진촬영, 파티에 초대된다. 인터뷰 진행자들은 항상 모모타에 대해 물어본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더이상 그런 행사에 가지 않는다.
처음이야.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건.
잠을 청할 수 없는 밤(자주 있는 일이다)마다, 낮에 비는 시간이 생길때(항상 있는 일이다)마다 머릿속에서 몇번이고 되풀이되는 그 한마디. 너무나도 생생해서 매번 다시 체험하는 것만 같다. 칼을 움켜쥐는 손. 눈물을 삼키자 메어 오는 목.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건 처음이라고 말하는 입. 하지만 그것마저도 거짓말이다. 그 역겨운 게임의 모든게 그랬듯이. 1~2주 동안 순식간에 피어난, 동경이란 이름의 그 감정은 카에데에게 느꼈던 감정-해가 지날수록 깊은 사랑으로 변한 어린 시절의 우정-과 비교하면 덧없기만 하다. 그냥 비극적인 커플이 좋더라고, 뭔지 알지? 열네살이었을때, 시즌 49 도중 초고교급 무녀가 초고교급 화가의 처형을 멈추러 하다 갈가리 찢어졌을때, 카에데는 그렇게 말했다. 이제 마키는 전부 이해한다. 전부 거짓이야, 전부 사람들의 목숨과 죽음을 엔터테인먼트로 소비하면서 심금을 울릴려고 만들어졌지. 누굴 가장 혐오하는지 마키는 모른다: 시로가네, 작가들, 아니면 자기 자신.
씁쓸하고 쌀쌀한 이월의 아침, 마키는 먼저 열일곱살이 되었다. 또 꺼진 고아원의 난방과, 얼음장 같았던 마키의 손발. 비몽사몽 옆에 있는 카에데의 이불을 걷어내고 최선을 다해 파고들었다.
"우웅... 생일 축하해," 눈뜨지도 않고 그렇게 말하던 카에데. 굴러오더니 마키에게 팔을 둘러, 서로의 몸을 밀착시켰다. 마키는 온기에 감사했다. "선물 준비했는데... 나중에 보여줄게." “으응." 손가락과 발가락 끝으로 퍼지는 온기에 집중하던 마키. 오래 지나지 않아 카에데의 품속에서 다시 잠들었다. 선물은 바로 카에데가 마키와 어린애들 몇명을 청중 삼아 고아원의 낡은 피아노로 연주한 오리지널 송이었다. 마키를 위해 박수치던 모두와, ‘생일 축하해’ 합창을 주도하던 카에데. 그러자 이번이 고아원에서 자란 것을 축하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란걸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서 웃던 마키. 3월의 끝이 가까워질 무렵, 덜 요란하게 찾아온 카에데의 생일. 하지만 마키는 선물을 직접 만드는 타입도 아니였거니와, 카에데의 피아노 솜씨도 없었다. 어느 날 밤 카에데에게 이 사실을 고백했지만 카에데는 웃어넘기면서 선물은 필요 없다고 말했다. "너랑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쁜걸!" 그 대답에 콩닥이는 마키의 심장. 그해 봄 단간론파 시즌 52가 방영되고, 계절은 순조롭게 여름으로 흘러갔다. 늘 그랬듯이, 일주일에 한번씩 방과후 PC방에서 어김없이 서로 껴안은 채 고아원에선 보지 못한 회차들을 마저 정주행하던 카에데와 마키. 여름이 가을에 가까워질 무렵 시즌 52에는 6명의 생존자들이 남겨졌고, 팀 단간론파는 시즌 53 참가자 오디션 공고를 올렸다. 단간론파 V3에 출연하고 싶으신가요? ...신청 마감 기간 12/1/20XX 20XX년 4월 1일 기준으로 18세에서 24세 사이여야 할 것... 외관상 16세에서 18세 사이처럼 보여야 할것. ...선택된 참가자들은 20XX년 1월 1일까지 추가 정보를 위해 연락... 소식지를 훑어 보자 마키의 눈에는 문장 몇개만 들어왔다. 전에는 그딴 쇼에 참가한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는데, 가능성이 아에 없는건 아니었다: 신청 마감일 거의 2달 전에 18살이 될거니까. 오래 지나지 않아 그 생각은 떨쳐 버렸다. 자신같은 소녀에겐 끔찍한 생각이니까. "있지, 우리 곧 고아원에서 나와야 할 나이잖아. 단간론파 참여 오디션 보지 않을래?" 카에데가 물었다. 마키는 손을 뻗어 꽁지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너가 한다면."
둘다 붙었다.
"세상에, 마키, 마키, 왔어," 고아원의 우체통에서 빨갛고 검은 편지봉투 두장을 꺼내면서도 흥분돼서 파르르 떨리던 카에데의 목소리. "아, 못기다리겠어, 지금당장 열어볼거야!" "일단 안에 들어가자," 칭얼거리면서 썩 내키지는 않지만 현관까지 카에데를 끌고 가려던 마키. "추워…" "아, 알았어," 그러자 서둘러 안에 들어가던 카에데. 들어가자마자 가방을 내던지고, 자신의 이름이 적힌 봉투를 열기 전까진 신발을 벗을 생각도 하지 않던 카에데. 마키는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이럴때 카에데를 관찰하는건 항상 즐거웠으니까. "세상에, 마키!" "너—" "붙었어! 초고교급 피아니스트! 세상에!" "내꺼도 열어봐." 그렇게 말했지만 마키는 자신의 봉투에 별로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간에 카에데를 축하해줄거지만. "확실해?" "으응." "알았어." 이번엔 더 우아하게 봉투를 열면서도 파르르 떨리는 카에데의 손가락. 그러자—"마키!" 신난 외침. "우린 단간론파에 나올거야!" "우리 둘다?" 마키는 믿겨지지 않는다. "우리 둘다! 넌 초고교급 보육사가 될거야! 세상에, 마키, 정말 기뻐!" 마키를 꼬옥 끌어안으면서 꺄르르 웃던 카에데. "우리가 해냈어!"
팀 단간론파 시설은 높은 철책으로 둘러쌓인 커다란 벽돌 건물이었다. 첫 시즌의 희망봉 학원이 그랬듯이. 카에데와 마키는 프론트 데스크에서 체크인했다. 비록 대부분의 말을 한건 카에데 였지만서도. "시즌 53 참가자들, 아카마츠 카에데와 하루카와 마키요," 자랑스럽게 말하던 카에데. 이름이 적힌 종이에 사인하면서 정갈한 글씨를 훑어보던 마키.
그날은 기다리고 문서를 확인하고 포기 서류를 작성하고 브리핑을 듣느라 순식간에 흘러갔다. 마키는 이번 시즌에서 계획된 자신의 역할과 희망 사항을 확인하기 위해 팀 단간론파 소속 심리학자에게 불러갔다. "하루카와양," 입을 연 의사. "이번 시즌의 다크 호스." "뭐라고요?" 호기심과 두려움에 똑같이 사로잡힌채 마키는 물어보았다. "보육사잖아, 그렇지? 애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 "글쎄요, 그냥 그런데." "그럼 그게 다른 재능을 위한 위장용 재능이라면 어떨거 같아?" 마키는 발끝만 바라본다. "그건… 괜찮을 거 같네요." 의사는 끄덕이더니 무언가를 끄적였다. 심장이 철렁 내려 앉았지만,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저기, 카에데?"
"으응?" 마키와 같이 잘 팀 단간론파 게스트용 침대에서 뒹굴거리던 카에데. 내일부터 시즌 53 촬영이 시작되고, 둘다 잠들 수 없었다. "할말이 있는데 괜찮아?" "응, 당연하지! 말해줘!" 마키의 가슴이 납덩이처럼 딱딱해졌다. "원래...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되지만, 그치만, 너라서 말해주는거야... 나는—나는 사실 초고교급 보육사가 되지 않을 거야." "어? 하지만 합격통지서에는—" "아니, 아는데, 그치만... 그건 위장용, 이랬어. 내가... 내가 실제로 될 건 바로—" 마지못해 입을 열자마자 눈물이 차오르던 마키의 눈. "초고교급 암살자야." 혼란스러워 보였던 카에데. "암살자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갈라져가던 마키의 목소리. "나는 너처럼—강하지 않아." "아, 마키..." 멈춰서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카에데. "너가 검정이 될까?" "모르겠어," 조용한 마키의 대답. "말이 안되는건 아닌데, 그치만..." 나에게는 피해자가 더 어울리는걸,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살아남지 못할거란건 확신했다. 애초에 그럴 계획도 없었는걸. 생존은 카에데처럼 그걸 누려야 마땅한, 강하고 용감한 참가자들의 것이니까. 지금 이 순간이 카에데와 보내는 마지막 밤이 될거란걸 갑자기 깨닫자 울음이 터지면서 몸이 떨리는걸 마키는 느꼈다. "저기, 괜찮아, 울지 마," 그렇게 말하면서 카에데는 재빨리 일어나 앉아, 마키를 꼭 끌어안았다. "나, 난 죽을거야," 카에데의 어깨 너머에서 말을 잇지 못하던 마키. "난 죽을거고, 너도 알잖아, 기억을 지우니까 넌—넌 나를 잊어버리겠지." "마키," 카에데는 말했다. 마키가 두 눈을 바라볼 수 있게 한발 뒤로 물러났다. "난 너를 절대 잊지 않을 거야, 알았지? 사랑해.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리고 내 마음은 너도 나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영원히 간직할 거야," 두 손으로 마키의 얼굴을 감싸면서 속삭이던 카에데. "카에데," 흐느끼는 마키. "카에데..." "쉿," 그렇게 말하면서 카에데는 마키의 이마에 키스를 남겼다. "울지마, 알았지? 오늘밤은 슬퍼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사랑해. 사랑해." "나도 사랑해," 마키는 눈물을 참으려 하면서 거의 흐느끼다시피 속삭였다. "정말 사랑해."
마키가 기억하는건 그게 마지막이다. 그 후 감옥 안의 교실 바닥에서 일어났다. 빨갛고 검은 세일러복 교복과 암살에 관한 기억과 아스라히 오래된 과거의 어렴풋한 기억속 소녀들과 함께.
이제 마무리되지 않은채 버려질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마키가 두번다시 되돌려받지 못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시험기간이었다고 들었어요. 노력한만큼 아니 노력 안해도 좋은 결과 얻었길 바라고 아직 시험 안 보신 분들은 좋은 결과 얻으시길 바랍니다 이미 이 글을 읽고 있는 시점에서 망했지만!
지난번의 ‘작품’이 여러가지 의미로 무거웠던 관계로, 잠시 쉬어가는 셈치고 가볍게 치유물 한판 때리고 싶었습니다. 근데 분량은 결코 가벼운거 같지 않은데… 어 왜 눙무리 흐르지
Sickfic, 애를 아프게 해놓는 스토리 좋아해요! 중병이나 시한부 설정이 아니라 감기처럼 (상대적으로) 가벼운 질병. 공식에선 절대 아플지 않을거 같은 애가 약한 모습 보여주고 소울메이트가 상냥하게 간호해주는 치유물같은거. 아아 너무좋아
희망봉/비절망 AU에서 둘이 동거하는 설정이라고 행복회로 신명나게 돌려...볼려고 했지만 아직 살인게임 설정이란걸 깨닫고 절망
영원한 불공대천의 철천지원쑤 호칭문제… 이번엔 ‘슈이치짱’ ‘오마군’ 그리고 나레이션은 이름으로 고정했습니다. 딱 한번 '코키치군'을 썼는데 오타가 아닙니다. 그러나 나레이션과 오마의 생각이 헷갈리게 되는 참사가아아아아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태그에 Taking care of a sick grape가 있었습니다. 아픈 포도 돌보기라니 아 귀여워어어
코키치의 가슴이 격하게 두근거리고 목 뒷덜미에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진통제를 삼켰는데도 머리의 욱신거림은 전혀 멈추지 않은것 같았다. 심한 현기증 때문에 방이 빙글빙글 회전하는것 같아서 생각하는게 쉽지 않았다. 조용히 악담을 퍼부으면서, 종이와 연필을 내려놓았,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침대 옆 바닥에 떨어뜨렸다. 이제 더이상 개의치 않았다.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지난 몇년간 이렇게 심한 감기에 걸린적은 없었지만, 지금은 가장 비생산적인 순간이었다. 오마 코키치는 아프지 않았다. 의지력, 건강하고 동시에 허약한 몸, 많은 활동량과 좋아하는 음식으로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 아무 일이나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살인게임에 갇힌채 아픈건 인생에서 필요한 마지막 일이었다. 노려지기 쉬운 타겟이 된건 물론, 괜찮은 척 하는게 가면 갈수록 어려워졌다. 결국 여러 가지 약과 간식 잔뜩, 그리고 방에서 차를 끓일 재료와 도구를 가져오기로 했다. 그러나 당연하지만 계획에 집중하려고 아무리 애써도 몸이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이래 가지곤… 더이상 못해…! 한시라도 빨리 멈추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못할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머리에 손을 파묻었다. 두통 때문에 얼굴을 찡그렸다. 모든 것들이 전부 좋아질때까지 한숨 자라고 명령했지만,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할거야, 마음이 몇번이고 계속해서 속삭였다.
하지만 눈이 불처럼 화끈거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바꿀 수 없었다. 눈물의 장막 너머로 그리려고 하는건 어려웠다.
녹초가 된 채로 매트리스에 자신을 내던지자 길고 짜증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이딴 바보같은 병…정말 싫다고…아무것도 안되잖아…이젠 싫어…”
익숙한 무력감이 가슴을 메이게 했고 눈물이 눈을 떠나겠다고 위협했다. 팔로 재빨리 닦아내니까 너무나도 비참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아플때 혼자 있는건 싫었다. 돌봐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약간의, 어쩌면 많은, 애정과 그만 쉬고 자신을 돌보라고 강요해줄 사람을 갈망했을 뿐인데. 하지만 그럴 사람이 있을리 만무하고, 게다가, 정말 일해야 했다…
갑자기 노크소리가 들리자 움찔할 수 밖에 없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를 놀래키지 않게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노크하는 사람은 딱 한명밖에 없었다.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슈이치짱이라는걸 알고 있었다. 슈이치짱은 그가 자신을 고립시킨다는걸 깨달았을까. 슈이치짱이라면 틀림없이 걱정되었겠지, 슈이치짱이 도와주러 왔다, 슈이치짱, 슈이치짱, 슈이치짱. 적잖게 당황하면서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선 결국엔 문을 열거라는, 탐정을 들여보내면 처량한 기분이 들거라는 생각을 애써 억누르러 했다.
“오마군…? 잠깐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슈이치의 조용한 목소리가, 조심스럽고 걱정으로 가득 찬 목소리가 문 너머 그에게 닿았다.
“…뭔데 그래? 나 지금 바빠, 바보 탐정이랑 게임할 시간은 없어! 중요한 총통의 업무가 있단 말이야!” 그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혼란스러운듯 짜증난 목소리였지만 단호함이 결여되어 있었다. 슈이치는 몰랐더라도 최소한이나마나 진실이 일부 담겨져 있었다.
“진심… 처럼 들리지 않아. 나도 자물쇠 딸 수 있잖아, 기억나…?”
아, 맞다. 슈이치짱에게 탐정일에 도움이 될만한 기술을 알려주겠답시고 가르쳐줬으니까. 당연히 또다른 밀실 사건이 일어나면 1순위로 의심을 사지 않게 위해서라는 말 따위로 포장했지만, 그치만…
슈이치짱은 정말 필요하다면 자신의 거짓말을 논파할 수 있으니 저항은 무용지물이란걸 알고 있었다. 만약 걱정이 너무 커지면 엄청난 시간을 들여서라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낼 테니까. 결국 코키치는 일어나서 도중에 비틀거리다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문을 향했다.
“꼬…꼭 그래야 돼? 그냥 뭘 원하는지만 빨리 말해, 이럴 시간 없다니까….”, 지친 듯 신경질적으로 단어들이 튀어나왔다.
“…제발 문좀 열어주면 안될까? 며칠째 방에서 안나왔잖아, 걱정돼서 그래.”
코키치는 문고리를 쥔 채 멈췄다. 문을 열기 전에 옷매무새와 까치집을 조금이나마나 정돈하고, 눈을 비비고선 가능한 한 건강해 보이게 깊은 숨을 들이마쉬었다.
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드러난 슈이치의 표정으로 판단하건데, 예상보다 훨씬 나빴음이 틀림없었다. 코키치는 탐정을 바라보자 얼굴에 드러난 놀람과 걱정에 얼굴을 찡그렸다.
“ㅇ…오마군, 무슨 일이야? 너…”
“끔찍해 보인다고? 응, 알고 있어, 그러니까 기분이 백배는 나졌네, 고마워, 바보탐정”, 슈이치의 쓸데없는 해설에 짜증이 나서 딱딱거리듯이 대답했다. 정말로 존경하고 높게 평가하지만, 가끔 머리가 너무 둔해빠질 때가 있는 바보 탐정 같으니라고.
그 대답은 탐정의 의심을 약화시킨것 같았지만, 이제 작은 소년을 철저히 검사하는 그의 표정은 숨김없는 우려로 가득 찼다. 그 자각에 속이 뒤틀리는것 같았다. 예상했던 대로야. 물론 슈이치짱이라면 즉시 알았을 테지만. 문을 열지 말았어야 했어.
“아파? 왜 말 안했-“, 슈이치가 입을 열자마자 서둘러서 창백한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최선의 선택은 아니였겠지만, 입을 다물어주기만 한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쉿! 조용히 해줄래? 어서, 안으로 들어오고 계속 조용히 해줘”, 속삭이면서 조심성이라곤 한 줌도 없이 팔을 붙잡아 자비없이 방안으로 끌고가선 인간적으로 가능한 한 빨리 문을 닫았다. 머리가 지끈거려서 얼굴을 찡그렸지만, 그의 부주의함이 더욱 그를 화나게 했다. 물론 슈이치도 그의 행동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아서, 이맛살을 찌뿌린채 회의적인 태도로 그를 마주했다.
“왜? 왜 항상 모든걸 혼자서 하려고 하는거야…? 무슨 일이 있으면 날 믿고 도와달라고 말해도 된다고 했잖아, 오마군!” 가슴에 한 손을 얹은 채 진심을 담은 외침. 아주 조금, 조금뿐이지만, 그 말이 마음속의 스위치를 건드리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 한 구석이 아팠다. 평범한 상황이었더라면 분노로 반응했겠지만, 기력이 없어서 대신 입을 삐죽 내밀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화끈거리고 있었던 터라, 거짓눈물이 차오르는게 평소보다 쉬웠다.
“너-너무해…! 나는…정말 좋아하는 슈이치짱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착한 일 ㅎ-하려고 했던 건데…”, 떨리는 목소리. 조용한 훌쩍임과 울음. 슬픔과 비애로 찡그린 표정. 솔직함이 아예 없는건 아니었지만, 그중 대다수를 두개골을 울리는 고통을 감추는데 썼다. 슈이치의 눈에 걱정이 번쩍이자 시선을 피하고선 대답했다:
“지금… 이러지 마. 컨디션 안좋잖아? 도와줄게… 제발.”
코키치는 몇번 더 훌쩍이고선 가장 마음이 아파오는 표정을 지었다-오래 지나지 않아 밝은 미소를 짓자 눈물이 대부분 사라지긴 했지만. 있는 힘을 전부 짜내서 진이 빠지긴 했지만 슈이치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아직 거짓말같은 기교로 가면을 바꿔쓸 수 있다는걸 알아서 다행이었다,
“니시시! 헤, 재미없어! 조금만 더 장난쳐도 되지? 지난 며칠동안 컨디션 최악이었거든, 재밌게 해줘!” 평소의 장난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끝에 가선 목소리가 마지못해 포기하라고 협박했다. 슈이치는 고개를 젓고선 그의 손을 잡아 조심스럽게 침대까지 끌고 갔다.
“그냥… 누워, 내가 알아서 할게. 컨디션은 어때, 뭐 가져다 줄까?”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면서, 코키치는 순순히 침대에 앉아 이불을 끌어당기면서도 탐정을 향해 활짝 웃고 있었다.
“아이스크림! 그리고 판타도!”
“…아무것도 안 줄거야”, 슈이치는 한숨을 내쉬었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걱정이 점점 커지는것 같았다. 컨디션이 최악임에도 불구하고 가면을 벗으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를 걱정시킨다는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슈이치는 그를 비난할 수 없었다. 너무 비참한 기분이어서 조금만이라도 기꺼이 보여줄 리 없으니까. 심지어 그에게도. 그걸 눈치채야 했지만 코키치는 최소한의 골칫거리라도 억누르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를 내버려 두는 대신에 탐정은 그에게로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보랏빛 머리카락 몇가닥을 걷어내고선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 작은 손짓이 즉시 짜증을 덜어 주었다. 이 작은 행동이 다시 한번 누군가가 곁에 있어주면… 좋겠다는걸 떠올리게 해줬다. 슈이치짱이 곁에 있어줬으면 했다. 그 생각이 가슴을 조이게 했고 더없는 행복을 사라지게 했다. 하지만 안심… 이라 부를만한 것도 있었다. 특히 슈이치짱의 얼굴에 드러난 집중과 진심어린 걱정과 결합해서, 이상하게 마음이 이끌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몇초동안 숨이 평소보다 가빠지고 심장이 계속해서 두근거렸다. 무언가가 안에서 조금 녹아내렸고 잠시 후, 슈이치는 손을 떼고 입을 열었다.
“…이마가 불덩어리야. 내가… 이거저거 가져올게. 방 열쇠…?”
“침대 테이블에” 대답하려면 끝까지 들을 필요도 없었다. 슈이치는 마지막으로 그를 바라보기 전에 고개를 끄덕이고선 열쇠를 집었다.
“곧 돌아올게, 걱정하지마.”
상냥하고 친절한 목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끄덕이고 슈이치가 방을 떠나고 조용히 문을 닫는걸 보는 내내 기진맥진한 피로에 따라잡히는 것 같았다.
침묵에 집어삼켜져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좋으면서도 동시에 끔찍했다. 곁에 있어주기를 정말 바랬지만, 그건 효율성을 떨어뜨리겠지. 그리고 자신은 엉망진창 인데다가, 방은 훨씬 더 엉망진창 이지만 슈이치짱은 그래도 남아 있어 주겠다고 했다… 그 자각에 심장이 내려앉으면서 동시에 기록적인 수준으로 떨어졌다. 필사적으로 생각을 정리하려고 하다 신음과 함께 포기하고선 매트리스로 자신을 내던졌다. 아마 이번만은 슈이치짱에게 맡겨야 될거같아. 어차피 머리도 제대로 안돌아가니까.
게다가, 만약 자신에게는 정직하다면, 곁에 있어주겠다고 약속했고 증명해준, 신뢰하는 슈이치짱에게 의지하는건 두려웠지만, 오랬동안 필요했던 확신이기도 했다. 하지만, 누군가를 믿고 이 일을 맡긴다는건… 그 생각이 불편한 것처럼 몸을 떨었다. 이걸 할 수 있는건 나 뿐이야, 내 임무인걸. 하지만 생각이 마음대로 안됐다…
코키치는 눈을 감고선 침착하게 기다렸다.
잠시 꾸벅꾸벅 졸았다. 반은 잠들고 반은 깬 채, 몸도 마음도 휴식에 빠지고, 부글부글 끓는 열기, 마음 한 구석에서 딸각거리는 소리도 거의 눈치채지 못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한채, 그냥 베개로 파고들고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몇마디를 내뱉었다. 무언가가 어깨를 조심스럽게 건드리자 온몸이 동요해서 뒤를 돌아보아서 휘둥그레진 눈을 탐정에게 고정시켰다.
“ㅇ-아, 미안… 놀래키려던건 아니였어…”, 슈이치는 사과하면서 다시 손을 내려놓았다. 새로운 냄새가 폐를 채우자 코키치는 고개를 젓고 눈을 비볐다. 어리둥절 해져서 냄새의 근원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곧 침대 테이블 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거운 수프 한그릇과 과일 조금, 많은 물을 발견했다.
“…며칠동안 제대로 못먹었지? 어제 저녁도 안먹었으니까…”
정말이지 가정적이고 배려심이 넘쳐서, 그 행동에 심장이 벅차오르는게 느껴졌다. 시선을 피하면서 끄덕거렸다. 조금 부담스러웠다. 막 대답하려는 순간, 슈이치는 덧붙였다:
“살짝 맵게 했어…”
“ㄱ-그래… 그건… 조금 매운 음식 좋아해…”, 그렇게 더듬거리자 뺨에 열이 확 올랐다. 다른 말을 하거나 말로 감사를 나타내는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일어나 앉아 침대 끝머리로 다가가서 그릇을 집었다. 조심스럽게 먹기 전에 슈이치는 아직도 약간 뜨겁다고 경고했다.
맛있었다.
슈이치가 침대 위 바로 옆에 앉은 채 침묵 속에 시간을 보냈다. 때때로 그를 확인하면서, 탐정은 호기심에 방안을 둘러보았다. 슈이치를 처음으로 들여보낸지 조금의 시간이, 처음으로 슈이치짱을 이름으로 부른지 며칠이 지났다. 상황은 좋지 않았지만… 이제 와서 뒤돌아보면, 탐정은 그의 실수를 용서했고 의도는 좋았다는걸 알았다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지하겠다고 말해주었다. 그 말은 코키치가… 슈이치짱에게 자신의 계획을, 얻은 지식을 말해주는 선택지를 고려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감시당하고 있을 경우를 대비해서 말하는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
지속적인 감시 하에 있다는 생각은 극도로 불편해서 파라노이아가 폭발했다. 대부분의 시간엔 성공적으로 그런 생각들을 머릿속에서 치워버리곤 했다. 그냥… 지금은 어려웠다. 찰나의 순간, 슈이치가 완전히 믿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이제 정말 토하고 싶어졌다. 위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신뢰가 닿을 수 있는 한 그를 믿었다.
어떤 이유에선지는 모르지만, 갑자기 엄청난 피곤함을 느꼈다.
“…평소보다 더 지저분한데. 조금만이라도 청소해줄까…?”, 슈이치의 제안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맘대로 해. 중요한건 건드리지 말고.”
탐정은 끄덕거리고선 발걸음을 옮겼다. 먹을때는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치유되는 온기가 몸을 채웠고 파괴적인 의심이 머릿속을 흐렸다. 자신의 방을 정리하는 슈이치짱을 바라보고도, 관찰하고도 싶지 않았다. 간신히 전부 해낼수도 없는 상태였기도 했고. 오래 지나지 않아, 흩어진 휴지와 구겨진 종이들은 모두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다행히도 기진맥진 해서 음식을 입에 넣고, 삼키고, 깨어 있고, 깜박거리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릇의 바닥이 드러나자 갑자기 슈이치가 새 옷 한벌을 밀어넣기 전까지 시간이 얼마나 빨리 흘렀는지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잠들기 좋은 편안한 옷. 코키치는 빈 그릇을 옆으로 치우고선 어리둥절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국물의 짭조름한 냄새가 아직도 공기중에 맴돌았다.
“이제 뭘 할까?”, 물어봤다. 옷 갈아입는다고 뭔가 달라질 리는 없잖아?
“…샤워한 다음에 옷 갈아입어. 심부름하고 이것저것 처리하고 올게, 알았지?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 무슨 일 있으면 불러줘”, 슈이치의 한마디 한마디가 단호한 설명에 당황했다.
일어나고 싶진 않았지만…슈이치가 말하니까 자동으로 대답이 나왔다: “니시시! 기대하지 마! 어차피 안 미끄러질거니까.”
슈이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을지언정 그 대답을 받아들여, 옷을 건네고 그가 일어설 때까지 기다렸다. 일어서자마자 비틀거렸지만 간신히 욕실에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벽에 기대어 서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숨을 몇번 깊게 들이마시니까 목덜미와 이마에서 땀이 흘렀다. 이제 이걸 ‘작업’ 이라고 부른다는 유일한 사실은 어이없을 정도로 웃겼지만, 그것도 상관 없었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고 그게 싫었으니까. 짜증나서 벗은 옷을 구석으로 걷어찼다. 샤워기를 키고 뜨겁게 타는듯한 느낌이 고통을 녹여 없애버리길 바랬다.
그러지 않았다. 심각하게 어지러워졌지만 최소한 근육통은 가라앉은것 같았다.
다시한번, 시간이 흘러가자 불안해졌다. 몇초를, 몇분을, 몇시간을, 며칠을 낭비하고 있는데. 생각이 몸에서부터 저 멀리, 마치 연결이 끊긴 것처럼 떨어져 있는것만 같았다. 한순간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물을 느꼈고, 곧바로 뿌연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자신의 창백한 피부를 관찰했다. 달아오른 뺨, 새빨개진 눈. 전부 조금 볼품없었다.
옷을 갈아입자, 현기증에 거의 기절할 것만 같았다. 머리는 아직 축축하고 따뜻했다 - 착잡한 기분이었지만 깨끗함 덕분에 한결 편안해졌다. 더러운 침대로 돌아가는 생각이 그 긍정적인 느낌을 부수겠다고 협박했지만, 문을 열자 새로 정돈된 침대가 앞에 있었다. 깨끗한 이불, 더러운 접시도 바닥에 쓰레기도 없고, 상쾌한 공기가 방을 채웠다. 슈이치짱도 없는게 흠이지만. 작은 미소가 입가에 번졌고 침대에 무사히 착륙하자 만족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베개에선 새 빨래 냄새가 났다.
바로 그 순간, 문이 찰칵 열리고 슈이치의 발소리가 방을 채웠다. 어수선한 머리와 헐렁한 옷, 베개에 깊이 파묻은 얼굴에 칠해진 미소의 초고교급 총통을 발견하자 조용히 웃어야만 했다. 코키치는 절대 과소평가 해선 안될 위협이 될 수 있지만, 천진난만하고 귀여운 모습을 보여줄때는 반드시 간직해야할 순간이었다.
코키치는 그를 향해 돌아섰다. 베개를 꼭 껴안고 함박웃음을 지은 채.
“전부 깨끗하고 깔끔해서 맘에 들어!”
“어… 그래. 건강에 중요하니까… 조금 괜찮아 졌어?”, 대답하는 슈이치의 입가에 멋쩍어하는 미소가 피어났다. 모은 물건들을 빈 안락의자에 내려놓았다. 코키치는 그를 향해 끄덕거리다가 머리가 아파왔는지 살짝 찡그렸다.
“방이 빙빙 돌고 머리가 둘로 쪼개질거 같지만, 그걸 빼면 훌륭해! 너무 지쳤지만…”
그 문장에 밑줄쳐서 강조하려는 것처럼 긴 하품이 나왔다. 호기심에 슈이치가 가져온걸 빤히 처다보더니 미심쩍은 시선을 보냈다. “그게 뭐야?”
슈이치가 입을 만한 스타일로 보이는 또다른 편한 옷 한벌을 발견했다.
“아, 내가… 그-그러니까… 쓸쓸하지? 그래서 옆에 있어줄까… 라고 고민했는데, 만약 너가 원한다면…”
믿기지 않아서 눈썹이 곤두섰지만 곧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었다. 슈이치의 뺨이 새빨개지자 당황하고 불안한 것처럼 보였다. 한 다리에 체중을 옮겨 실으면서 시선을 피하더니 코키치의 대답을 기다렸다. 평소보다 대답을 이끌어내는데 오래 걸렸다. 왜냐면 특히… 그래, 슈이치짱을 당황스럽게 하는건 쉬웠으니까. 하지만 자신을 간호해주려는 단순한 의지에 안절부절 못하는건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이 광경이 마음속 스위치같은 걸 키자 심장이 따뜻하면서도 무거워졌다. 일어나 앉아 이불을 끌어당기고, 말투가 진지해 졌다. 동시에 사려 깊으면서도 까다로워 지려는 것이 섞인 이상한 심정이었다.
“가서 옷갈아입고 침대로 와줘. 그걸 원해.”
분명히 슈이치가 예상한 답은 아니였다. 가끔씩이지만 여전히 코키치의 예측 불가능함에 적응하는게 어려울 때가 있었다. 그렇지만 간단히 끄덕거리고 숨을 내쉰뒤 옷가지를 챙기고 욕실로 사라졌다.
코키치는 혼자서 웃다가 다시 털썩 드러누워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가끔 사람들이 자신의 명령에 따르는 데에서 상당한 만족감을 느꼈다. 말 뒤에 악의가 숨겨져 있었다는건 아니지만, 이 상황이 만족스러워졌다.
잠시 한숨을 돌리자 몇분후, 더 편안한 옷차림으로 나타난 슈이치는 껴안고 싶어지게 보였다. 탐정은 침대 옆 쑥쓰러운듯 옷매무새를 정돈하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뭘 해줬으면- “, 그렇게 입을 열었지만 코키치는 갑작스럽게 말을 끊었다.
“안아줘.”
“어-어어?”
명확한 이유는 딱히 없었지만, 코키치의 표정은 울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아이의 그것으로 녹아내렸다. 거짓 눈물이 차오르고 슬픔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게 느껴졌다. 훌쩍이면서, 낙담을 모조리 끌어올려 표정에 실었다. 전부 거짓말… 이 아니라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아픈데 며칠을 혼자서 보내니까 무력하고 허약해져서 평소보다 훨씬 쉬웠다.
“ㅈ-지금까지… 혼자서 외로웠는데… 아-안 안아주면 곧 죽을거 같아…! 딱 한번만 안아줘, 슈이치짱… 제발?”
그를 진정시키려는 것처럼 팔을 든 슈이치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잠-잠깐만! 오마군, 왜 그러는-“
“아-안 안아줄거야? ㄴ…너라면… 나-날 버리려는 거야? 내 약한 면을 보여줬는데도?”, 미묘하게 원망하면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별로 힘들이지 않아도 눈물이 쏟아졌다. 이상했지만, 연기였다고 하더라도 마음 한 구석에선 조금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슈이치는 완전히 속지 않았다.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이 상황에 압도당할것만 같았지만 이젠 침대에 걸터앉아 유념시키려는 듯이 어깨를 잡았다.
“가끔 안은 적 있지 않았어? 내가 여기 남아있는 것도 처음이 아니잖아… 너가 원한다면 그냥… 안는게 어때, 코키치군? 안된다고 말하지 않을게”, 자신의 마음을 말하는 슈이치의 목소리엔 진심과 단호함이 담겨져 있어서 기분이 조금 나아지면서도 나빠졌다. 그말에 안정되고 솔직히 도움이 되긴 했지만. 다시 훌쩍거리면서 눈을 비비고 기대하는 듯한, 그리고 어쩌면 도발적인, 표정으로 슈이치를 바라보았다.
“ㅁ-말로만 하지 말고 안아 주라고, 바보!”
슈이치는 이맛살을 찌뿌리더니 즉시 코키치에게 팔을 꼬옥 둘렀다. 그를 가까이 끌어당기더니 손바닥을 등에 대었다. 둘다 탐정의 갑작스러운, 그러나 단호한 행동에 깜짝 놀랐다. 감정을 가라앉히느라 입을 살짝 벌렸던 코키치는 슈이치를 껴안고선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보랏빛 머릿결을 쓰다듬자 눈이 감기고 환희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직도 젖어있었지만 슈이치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심장이 마구 뛰는걸 느꼈다. 아마 대부분은 열 때문이겠지만. 어쩌면 껴안는건 최선의 방책이 아닐지도 몰랐다. 슈이치를 오염시키고 싶지 않았고 자신의 몸이 이미 열을 발산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일어났는데도 그의 품 안에서 녹아내려서 놓아버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보 슈이치짱… 옮을 텐데…알고 있지?”
“신경 안써…”
코키치는 의심이 절절한 눈으로 그를 주시하기 위해 등을 기댔다. 눈썹을 치켜올린채 대답을 기다렸다.
“그… 글쎄… 지금 기운이 없고 컨디션 안좋잖아. 나한테선… 숨길 수 없어. 하지만 내가…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잖아, 기억나…?” 설명하기 시작한 슈이치의 목소리에 수줍음이 잠들었다. 그치만 그러고 나서 확신을 계속 유지하라고 상기시켜야 했다. ”너가 다시 좋아질 때까지 떠나지 않을게. 너도 나에게 그대로 해줘.”
혀끝에서 항의가 굴러떨어지겠다고 위협했지만, 제시간에 붙잡아서 진실로 대체했다.
“…응. 하지만 이유없이 건강을 해치라고는 절대 안했잖아!”
탐정은 어색한 미소와 함께 반론했다: ”방금 안아달라고 하지 않았어…?”
“…아…아마 그랬을지도. 그-그냥 안아주면 고맙겠는데.”
빠른 승리에 슈이치는 조용히 웃으면서 그를 껴안았다. 패배에도 불구하고, 그를 마찬가지로 껴안고선 조심스럽게 끌어당기는 코키치의 입가에도 미소가 피어났다. 등이 매트리스에 착지하고 슈이치가 반쯤 위에 눕게 되자 만족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온몸에서 슈이치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익숙한 향기가 폐를 채웠고 짧은 소매 덕분에 피부의 접촉을 만끽할 수 있었다. 슈이치의 팔은 정말이지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서로에게 더 깊숙히, 아늑하게 파고들었다. 그것만으로도 벌써 훨씬 많이 괜찮아졌다.
걱정에서 풀려나고 입가에서 행복이 춤추자, 슈이치의 밤하늘색 머리에 얼굴을 파묻고 다시한번 눈을 감았다.
“놓아버리면 죽여버릴거야, 슈이치짱.”
찰나의 순간 그가 움찔하자 코키치는 까르르 웃다가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엔 말을 못했지만 슈이치는 힘겹게 말을 꺼냈다.
“안 그럴게, 하지만… 그건 네 신조랑 어긋나지 않아?”
코키치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번졌다. “우와아, 나도 상식이 있다는걸 기억하고 있었구나! 대단해!”
슈이치가 깊은 한숨을 쉬자 키득거렸다. 탐정은 자세를 바꿔 똑바로 눕고선 코키치를 끌어당겨 그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기대게 했다. 그의 심장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뺨이 옅은 심홍색으로 물들었다. 확실히 낯설었지만 환영했다. 트릭스터는 침묵을 만끽하다가 탐정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슈이치의 손이 머리를 어루만지자 눈을 감고 몇번 심호흡을 했다. 그저 그의 심장소리를 듣기만 하면서.
몸이 마치 온기로 이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편안하고, 나른하고, 안전한 온기로만.
“안 그럴게…”
슈이치의 대답에 끄덕였다. 몇가지를 고려하더라도 이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숨 쉬어도 괜찮아. 슈이치짱 덕분에 곧 좋아질 거야.
너무 많이 신경 쓰지 않으면서 모든 느낌이 마음과 몸과 맞닿도록 내버려 두었다. 정말로 환영한 손끝의 부드러운 스침, 만족스러운 한숨과 함께 입술을 떠나는 슈이치의 이름, 포옹에서 느끼는 안도. 피로가 눈 깜짝할 사이에 따라잡았지만 더이상 맞서 싸우지 않았다. 무해한 어둠이 머릿속에 퍼지고 편안한 잠의 세계에 빠졌다. 슈이치는 그를 꼭 끌어안고선 살펴보다가 함께 잠에 빠졌다.
처음 읽고 멘탈이 증발한 후 다시 보니까 Mature(성인등급) 태그가 있더라고요. 그것도 1순위로(...)
이래서 시험볼때 지문을 먼저 꼼꼼히 읽어보라는 겁니다. 단순히 멘탈이 나가는 것 이상으로 절망적인 대참사가 터지는 수가 있어요
열린 결말...인것 같지만, 해피엔딩 써달라는 작가님의 간청을 보면 언젠가 결말이 나올 가능성도 없진 않은듯 합니다. 근데 이 작가님의 다른 작품들로 추론하건데, Aㅏ, 아아......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배경음악은 되풀이 한 방울, 그중에서도 슈이치 인력론파 버젼(sm30981989)을 강력추천 합니다. 가사는 몰라도 슈이치의 목소리가 심금을 울리고 가사를 알게되면 눈물샘이 고장나고 거기에 본편에서의 슈이치의 행적을 떠올리면 이만한 절망고문이 따로 없어요
벌거벗은 몸 위 시트를 꽉 붙잡아, 놓아버린다면 제정신도 같이 놓아버리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잠든 척 하면서, 매우 조용히 있으면서, 또다른 어슴푸레한 그림자가 뒤돌아보지도 않고 방을 떠나는걸 지켜보았다. 더이상 그게 누구였는지, 성별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아는 것은 누군가가 자신과 몸을 섞었고, 자신은 거기에 기꺼이 찬성했고, 그렇게 자신을 내버려두었다는 것 뿐.
마지막으로 혼자 잔 게 언제일까? 아마 오래 전이겠지. 밤이면 항상 누군가가 침대 위, 바로 옆에 있었고 다음날 아침이면 떠나서, 이용당하고 버려졌다는 기분이 들게 했으니까.
이 시점에선 이미 정례적인 일이었다.
슈이치는 클래스메이트를이 원할 때마다 그와 섹스하는것을 허락했다. 자신의 몸을 바쳐서 자신의 가치를 대가로 그들의 환상을 이뤄주었다.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그의 생각엔 불결한 시트 뒤로 숨었다. 더이상 순결하지 않으니 상관없었다. 그것과는 이제 한참 거리가 멀었다. 모노쿠마만큼이나 더럽혀졌으면서 여전히 자신을 타인을 죽이고 싶어하는 존재보다 야비하고 추악하다고 여겼다. 최소한 그 곰인형은 순수하다고 여겨질만한 일부가 있었으니까.
슈이치는 이 일에 대해서 자기 자신 말고는 비난할 사람이 없었다.
사태가 이정도로 커지도록 내버려두지 말았어야 했다. 애초에 이걸 제안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랬다.
대놓고, 또는 노골적으로 자신을 성적 욕구를 위해 써도 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직접 말하는 대신 자신의 방으로 초대하면 모두 빈말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신의 스트레스를 해소해야 했기 때문이 아니였다. 절대로. 그게 자신이 쓸모있을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사이하라 슈이치가 존재한다는걸 기억할테니까.
그는 탐정이었다. 범죄의 영역에 조예가 깊은 자. 하지만 모두 살인을 하지 않는데 동의했으니, 해결해야할 범죄가 없었다. 수사해야할 시체가 없었다. 아무것도.
단지 누군가를 죽이려고 각오한 눈과는 달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들이 갇혀있는 동안 원하는건 아무거나 하게 내버려두는 빡친 모노쿠마가 있을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일어나서 개인실에 있는 소형 냉장고에서 물 한잔을 꺼내 마시려 하다 축축하고 끈적끈적한 무언가가 허벅지에서 흘러내리는걸 느꼈다. 아마 클래스메이트들 중 한명이겠지, 지난 밤의 파트너는 남자였다는걸 추가로 기억해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허리에서 통증을 느껴 자신의 무게에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몇초전 자신의 다리에서 미끄러져 흘러내리는게 무었인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더이상 보고 싶지 않아서 침대 머리맡 티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역겨웠다. 클래스메이트들을 더럽혀서. 그리고 자신을 더 소중히 여기지 않아서.
티슈로 다리에 들러붙은 정액을 전부 닦아내었다.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꼈지만 몇초 지나지 않아 다른 사람이 그의 안에 있을때 상대의 이름을 거의 애원하다시피 불렀던 것을 기억했다. 늘 그랬듯이 자신은 이걸 원했다고, 이걸 받아 마땅하다고 되새겼다. 애초에 이것밖에 안되는 사람이었으니까.
절대 바뀌지 않았다. 그의 야간 일과는.
아침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것처럼 어울렸다. 밤마다 새로운 사람에게 오르가슴을 느끼며 좀 더 세게 박거나 박혀달라고 간청하는 색정광은 아니였으니까. 누구와 밤을 보내느냐에 따라서 페르소나[각주:1]를 바꿨다. 도미넌트 탑부터 시작해서, 서브미시브 바텀, 그리고 원한다면 쑥스러워하는 연인까지. 남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 거짓말의 풍부에 자신을 내던졌다. 부스럭거리고 옷을 갈아입는 소리에 일어나, 문이 닫히면 후회만이 남겠지.
간직할 만한 여운도, 아침인사 키스도, 점심때까지의 나른한 포옹도 없었다.
원하는걸 받았으니 그를 버렸다. 홀로 쓸쓸하게 내버려두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물론 그도 노력했다. 단지 인간으로서의 슬프고도 구차한 변명이 아니라, 최소한 한명이라도 곁에 두려고 정말 노력했다.
코키치와 처음 잤을땐 이번 한번뿐만이라고 생각했었다. 친구와의 동침. 몸을 바친 첫 상대는 바로 그 키작은 소년이었다. 아마 이성보다 자신의 감정을 따랐던게 아니였을까. 코키치가 안뜰에 혼자 있는걸 보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행동했다.
코키치를 방으로 끌고 간건 그였다. 서로의 입술을 맞닿게 한건 바로 그였다. 그리고 둘이 침대에 쓰러지듯 넘어지게 한것도 역시 그였다.
코키치는 느리면서도 상냥하게 대해줘서, 육체적인 사랑을 나눌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부드럽고 친절해서 그에게 품은 작은 감정이 갑자기 폭발한 것처럼 느껴졌다. 입술이 한군데도 놓치지 않고 몸 구석 구석을 훑는 그의 키스 방법이,
예술 작품을 새기는 것처럼 몸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가락이,
몸을 떨면 그가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지 속삭이던 그의 목소리가 정말 맘에 들었다.
“사이하라짱…사랑해…” 열애로 가득 차 반짝거리는 눈과 함께 탐정의 얼굴을 부드럽게 애무하기 전의 속삭임.
코키치는 첫번째 경험치곤 완벽한 파트너 같아서 차라리 마법처럼 느껴졌다. 만약 코키치가 곁에 있어준다면, 그렇다면 그는 자신이 배경 뒤편으로 사라지지 않을, 가치있는 사람이 될 이유가 될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서로의 팔다리를 엮은채 탐정의 방에서 잠들었다. 코키치가 곁에 있어서 기뻤다.
그렇지만 틀렸었다. 사건를 해결할 때의 수묘한 기량과 달리, 그는 사랑에 관해서라면 전적으로 서툴렀다.
“오마군, 어디가는거야?” 그에게서 받은 쾌감으로 인해 아직도 정신이 몽롱했다. 졸린 눈을 비비고선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소년을 바라보았다. 이미 옷을 완전히 차려입고 막 신발을 신던 참이었다.
“어디긴 어디야, 밖이지 바보 사이하라짱. 우리의 하룻밤 섹스는 너가 온 바로 그 순간에 끝났다고.” 처음부터 당연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비꼬는 듯한 말투였다. 슈이치를 등지고 있어서 거짓말이었는지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었다. 목소리 만으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코키치는 문으로 향하기 전 옷을 제대로 입었는지 확인했다. “뭐랄까 시시했어, 만년동정짱, 그래도 그렇게 나쁜 밤일 상대는 아니였어. 이제 네가 나에게 애착을 가지기 전에 떠날게.”
“하지만…오마군…” 슈이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자신이 그에게 그랬던 것처럼 코키치도 자신에게 감정을 품었다고 생각했는데. 만약 아무 조건 없이 섹스만 할거란걸 미리 알았더라면 원하는건 무엇이든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코키치는 문을 닫고 나가기 전 한마디도, 한마디조차 하지 않았다.
만약 그게 전부였다면 마음 아파하지 않았을 것이다. 코키치는 진정한 관계가 아니라 섹스 프렌드만을 원했던 거라고 생각해도 괜찮았다.
하지만 코키치는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가 기억할 가치가 없고 쉽게 잊혀져도 괜찮은 것처럼 행동했다. 그날밤 코키치에게 준 모든 감정이 거짓이 되어버린거 같아서 견딜 수 없었다.
그가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마치 그 순간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슈이치를 만족시킨채 떠난 것처럼 행동하고 자신과 농담하는걸 볼때마다 마음이 찢어지는것 같았다. 만약 코키치가 느낀 감정을 되돌려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졌다.
슈이치가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간직하고 싶었던 순간이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심장에 못이 박히는 것만 같았다.
뒤돌아보면, 자신을 이 지옥으로 내몰리게 한건 코키치와의 만남이었다. 만약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다시 시도할 필요도 없었겠지. 둘다 즐거운 시간을 보냈음에 만족했다는걸 기억했더라면 그만 멈추고 더이상의 비탄에 빠질 필요도 없었겠지.
아니, 삶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두번째로 만난건 란타로였다.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한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란타로는 코키치와 동일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를 탐정을 넘어서 그 이상의 무언가로 보던 눈으로 말이다.
혹시 란타로가 그 사람인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똑같은 방법으로 그를 방으로 초대했다. 코키치와는 달리, 란타로는 즉시 달려들지 않았다. 실제로 조심스럽게, 이미 그들이 쌓아온 걸 무너뜨릴까봐 두려워 하는 것처럼, 영역에 들어오고 있었다. 이건 슈이치가 희망을 품게 만들었다. 찾고 있던 사람이 란타로일거라는 희망을.
란타로는 겉보기와 다르게 코키치보다 서툴렀다. 어설픈 솜씨로 슈이치의 옷을 벗기고 그의 옷도 벗었다. 순수한 키스가 몇분 지나지 않아 욕망의 굶주림으로 변해, 며칠전 코키치와 나눈 순애의 키스라기보다는 오히려 서투른 애무에 더 가까워졌다.
란타로는 항상 슈이치는 어떤지, 깨물어도 괜찮은지, 키스마크를 남겨도 되는지,
자신이 너무 거칠거나 느린지.
자신과 해서 후회하지는 않는지 물어보았다.
란타로는 슈이치의 생각을 물었고 그건 그 나름대로 자극적이었다. 재판장 밖에서도 자신의 의견이 의미가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정말 해도 괜찮슴까, 사이하라군?” 그렇게 란타로가 슈이치의 다리를 벌리면서 다시한번 물어보았을때엔 마치 마음을 열면 그만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 시점에서 슈이치는 간절했기에 대답은 하지 않았고, 대신 자신의 다리로 란타로를 감싼 뒤 키스했다.
란타로는 완전히 박기 전에 그걸 승낙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이번 접촉에는 좀 더 잘 반응해서, 그가 자신 만큼이나 기분이 좋아지길 바랬다. 끝났을 때에는 둘다 엉망진창이었고, 란타로가 마지막 키스를 남겼을 땐 거친 숨만 내쉴수밖에 없었다. 그날밤 슈이치는 감금당한 학원에서의 나머지 나날을 란타로와 보내는 꿈을 꾸었다.
아침이 되었을 때, 슈이치는 홀로 일어났다. 바닥에 떨어진 사용한 콘돔과 란타로의 목걸이만이 그 모든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걸 알려주는 유이한 증거였다.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서둘러서 옷을 갈아 입어야 했던 걸꺼야. 그 가능성을 믿고 있었다.
하지만 란타로는 평소와 다름 없었다. 슈이치가 목걸이를 돌려주고 들릴들 말듯 한 목소리로 사랑한다고 말해도 얼굴이 붉어지는 기색조차 없었다. 녹차빛 머리 소년의 이름을 말하면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빨개지던 밤과 달리, 이번엔 조용히 선언하고 나니 그는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장난스럽게 툭 한대 쳤다. 자신의 상처입은 마음을 준 소년에게 마치 농담에 불과했던 것처럼 대해졌다.
이 일로 인해 우울해졌고, 조금 더 낙심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희망을 품었다.
그래서, 카에데가 관심을 보였을때, 다시한번 시도해보고 싶었다.
이성과는 처음이었고 그래서인지 어색했다. 전에 성관계를 가졌을 땐 두번 다 삽입당하는 역할이어서 두 소년이 자신을 마음대로 다루도록 내버려두었다. 카에데는 그러지 않을거란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 이번에는 자신이 리드해야한다는 압박을 받았다.
만약 그가 연애를 하게 된다면 사랑스러운 남자친구가 될거라고 카에데가 항상 말한것처럼, 부드러운 쪽을 택했다. 이번에는 기필코 이상적인 자신을 구현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전희에 오랜 시간 공을 들여서, 자신의 필요를 처리하기도 전에 금발의 소녀를 만족시켰다. 아마 그래서 잘못되었던 걸까.
그 순간동안만큼은 이기적이었다. 다른 사람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코키치와 란타로는 그가 초라하고 도움이 절실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카에데에게 인생 최고의 순간을 선사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슈이치군…” 쾌락에서 초래된 몽롱함 사이의 헐떡거림. 그녀의 눈은 내내 반쯤 감겨 있어서, 슈이치에게 어쩌면 정말 잘하고 있다는, 카에데는 계속 있을거라는 자신감을 주었다.
“제발, 서둘러줘. 난…” 카에데는 하려던 말을 마칠 필요 없었다. 슈이치가 원하는 걸 해줬으니까. 박력 넘치는 키스에 소녀의 신음소리가 커지고, 소리가 새어나가 남들을 깨울 가능성을 입으로 차단했다.
어차피 방은 방음이 되어있었으니 상관없었지만.
아침까지 카에데를 곁에 두겠다고 단단히 결심했건만, 코키치와 그랬던 것처럼 한밤중에 일어났을땐 카에데는 이미 옷을 차려입고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코키치에게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손을 뻗어 피아니스트의 손을 꼭 쥐었다. “카에데…” 있어줘.
“응? 왜그래 슈이치군?” 그녀는 궁금해하면서 답변을 들으려고 실제로 잠시 멈춰섰다. 그것이 아무 데도 가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를 간절히 바랬다.
“제발, 가지 말아줘.” 슈이치는 간청했고, 자신의 목소리에 배신당했다. 약하게 들리고 싶지 않았는데. 약하면 카에데가 싫어하니까. 처음 만났을 때처럼 유약한 탐정이면 떠나려는 이유를 더할 것 같아서 두려워했다.
“그냥 내 방으로 가는 거야 슈이치군. 아무 데도 안갈 거야.” 익숙해지기 시작한 카에데의 미소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달콤했다. “그냥, 다른 사람들이 아침에 네 방에서 나오는 걸 보게 되면, 너에 대해서 안좋은 소문이 뜰 것 같아서. 그건 싫거든.”
슈이치는 그녀의 말을 믿고 싶었다. 그순간에는 정말 그랬다. 카에데는 늘 한결같이 진실했고 진심 어렸으니까.
카에데는 그가 항상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건 카에데의 거짓말 이었다.
결국 피아니스트가 문가에서 손을 흔들어 인사하도록 놔둘 수 밖에, 바깥 불빛이 서서히 희미해지는걸 바라볼 수 밖에,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마지막 희망을 접어둘 수 밖에 없었다.
몸을 전부 닦아내고 사용한 티슈를 모두 쓰레기통에 버렸다. 모노쿠마가 왜 항상 쓰레기통이 휴지로 넘처나는지 물어보지 않았을때 기뻐했다-아님 그냥 신경쓰지 않는 거일지도. 모노쿠마가 학생들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한다고 말할때 거짓말이란걸 알고 있었다. 친구들이 ‘슈이치는 성관계를 가지는데만 좋을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정례를 실행하도록 내버려둘때마다 곰인형이 면전에서 대놓고 키득거리는걸 목격한건 한두번이 아니였으니까.
만약 모노쿠마가 그동안의 섹스를 전부 촬영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학생들끼리 뜨는걸 보면서 가버리는 버러지에게 팔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지. 슈이치는 개인적으로 이 모든 사태에 대해 신경쓰는걸 오래전에 그만두었다. 자신에겐 소중한 모든 것들이 사실은 다른 사람들에겐 무의미하니까 남아있는 존엄성을 건져내려할 필요가 전혀 없잤아.
샤워실에 들어가 물을 키니 뜨거운 물이 머리위에서 온몸으로 쏟아져 내렸다. 물이 피부를 타고 흘러내리며 클래스메이트들에게서 받은 멍 몇개를 건드렸다. 쓰라러셔 잘못 움직일 때마다 움찔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증거였다. 한때 그가 누군가에게 사랑받았고 필요했다는 증거.
물을 끄고선 클래스메이트들의 관심의 증거를 검사했다.
몇개는 보라빛으로 변해있었다. 허벅지나 손목에 있는 것처럼. 비교적 최근에 생긴 흔적이었다. 월요일에 코레키요에게서, 개인적으로 작업하고 있던걸 보여주기로 약속한 뒤 받았던 것임을 기억해냈다.
코레키요에게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슈이치가 이미 가장 좋아하는 밧줄로 묶여있는걸 봤을때 보는 것만으로도 자극되어 유별나게 거칠었다.
혼자서 밧줄을 그렇게 팽팽하게 묶는건 만만찮은 작업이었지만 해냈다. 해내기까지의 인내에 대한 보상은 평소보다 더 거친거 같았던 코레키요와의 섹스였다. 그가 원했던 것처럼.
코레키요에게 구속당하는건 곧 익숙해졌다. 그게 그들의 섹스의 대부분이었으니까. 본디지와 가끔은 SM 조금. 코레키요와 할땐 고통은 문제가 아니였다.
처음에는 그랬지만, 섹스 도중 고통보다도 견딜 수 없는게 있었다.
그를 물건처럼 다루는 사디스트 인간쓰레기였다고 해도 슈이치는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다. 실은 그랬다면 더 고마워했겠지만…하지만 코레키요는 아니였다. 슈이치를 신경쓰지 않는 사이코는 아니였다.
너무 막나가지 않게 실제로 신경써줬고, 실수로 너무 세게 당겨서 생긴 멍을 부드럽게 문질러 줬다.
코레키요는 끝나면 슈이치를 안아주고, 귓가에서 뜨거운 숨결을 느낄 때마다 그의 온기에 감싸이게 해줬다.
자극과 흥분 도중 한숨 돌려야 할땐 숨쉬게 해줬고, 슈이치가 원할때 키스해줬다.
연인 행세를 했던 것은 섹스 토이로 다뤄지는 것보다 최악이었다. 그 모든 고통과 쾌락이 일어나고 난 뒤엔 코레키요가 정말로 자신의 연인이라는 희망을 품게 만들어서. 몇번이고 다시 이용당하고, 밤에는 사랑받지만 아침이 되면 버러지게 될 연인.
샤워를 마치고 나와, 제공된 목욕가운을 둘렀다. 거울 앞에 서 컨실러를 꺼냈다. 모노쿠마에게 부탁했더니 박스채로 주었다. 이건 곰인형이 그의 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이론을 뒷받침했다.
슈이치는 멍과 키스마크에 조심스럽게 컨실러를 발랐다. 자칭 존재의 입증을 바라보는걸 좋아한 만큼 섹스 프렌드들의 미심쩍은 얼굴을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새겨진 온갖 멍이 걱정되는 것처럼 굴었지만 정작 그들이 그 멍을 들게 했다는건 절대 기억해내지 못했다.
언젠가 한번 모두 수영하러 갔을때, 미우가 비명을 삼키면서 그에게 흔적을 남긴건 바로 그녀였음을 완전히 잊어버린 채로 등 뒤를 가로지르는 생채기에 대해 물어본,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상처를 비웃은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슈이치가 거칠고 가학적일때-과장을 좀 보태자면-좋아 죽었다. 절정에 치닫기 바로 직전까지 가다가 완전히 멈추면 발명가는 훌쩍거리며 간청했다. 그가 했던 짓은 잔인했다. 그것에 대해 자주 생각했고 입 밖에 내기를 거부했지만 미우 본인은 정말 좋아했다. 그녀는 지배받는걸 좋아하였고 슈이치가 그걸 해주길 원했다. 심지어 발명가에게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까지 했는데, 허벅지를 세게 꽉 쥐고 목에 키스마크를 새겼다. 타인에게 자국을 남긴건 미우가 처음이었고 만족스러웠다.
만약 그들이 흉터를 본다면 전날 밤 탐정 덕분에 쾌락을 느꼈음을 기억할거라고 생각했다. 다시한번 그 흔적들이 누군가에게-어떤 사람이라도 좋으니까-슈이치가 그들의 육체를 보완했던것을, 그리고 그가 그때 어땠는지를 상기시켜 줄거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그건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그 흔적들은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숨겨저 있었다. 아니라면 어디서 얻은 흉터인지 확신할 수 없었던 거겠지. 범인이 그들 바로 옆에 있다는걸 알지 못한 채, 계속해서 슈이치의 모든 것을 등한시하였다. 슈이치가 씁쓸함을 느꼈음은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건 마치 관에 박힌 마지막 못과도 같은 치명타였다.
슈이치는 그들에게 있어 하룻밤 동침하는 상대에 불과했을 뿐, 그 외엔 아무 의미도 없었다.
컨실러를 마저 바르고 전부 가려졌는지 확인하려고 돌아보았다.
방을 나와 똑같은 교복으로 가득 차있고 뒤쪽엔 다른 옷들이 놓여진 옷장으로 향했다. 그들이 서로 함께 시간을 보낼때 츠무기가 입어달라고 한 옷이었다. 역할극의 팬답게 상대도 연기에 참여하기를 바랬다.
좋은 섹스 파트너 답게 당연히 따랐다. 츠무기는 누구를 연기하는지에 따라 분위기를 자주 바꾸는걸 좋아해서 가장 많은 사전 조사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둘이서 보낸 밤 동안 변하지 않은게 하나 있다면, 츠무기가 가까울 때면 속도를 늦춘 뒤 코스플레이어의 안경을 벗겨 자신이 쓴 다음 키스로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츠무기는 포옹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에, 캐묻지 않고 잠든 그녀에게 안경을 다시 씌워주기만 했다.
슈이치는 탐정 제복을 차려입었다. 몸에 꼭 맞는게 마음에 들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에게 미소지으려 하다 놀랍게도 해냈다. 몇분 전까지만 해도 떠오르지 않던 미소가 갑자기 나타났다. 어쩌면 오늘은 좋은 날일지도 몰라.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피부에 흠을 내는 흉터도 없고, 눈가에 고이는 눈물도 없고, 괜찮을거라고 말해주는 미소. 아아. 여기 나를 돌아보는 이 슈이치는 행복하구나.
그걸로 밖으로 나가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기에 충분했다. 책상 위 모노패드를 집어올렸다. 손가락이 자신의 믿음직한 모자의 안감을 훑었다.
오늘 모자가 필요할까? 모자 없이는 노출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몇년동안 자신의 피난처가 되어 주었으니까. 만약 쓰지 않는다면 이상하게 쳐다보겠지. 한숨을 내쉬었다. 바보같아.
“이제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이미 모두의 눈 앞에서 벌거벗어봤는데.”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농담인 것 마냥 키득거렸다. “어차피 아무도 신경쓰지 않잖아. 그러니까…”
모노패드만 한손에 든채, 문을 잠그지도 않고 방을 나섰다. 아침방송 직후였으니 복도는 텅 비어있었고, 다시한번 미소짓는다는걸 깨달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좋았다. 개인 시간이 정말 필요했다.
기숙사를 나오자 차가운 아침공기에 떨었지만 참을 수 있었다. 몇분 지나지 않아 곧 본관으로 갈테니까.
계단으로 향하는 도중 트레이드마크 웃음소리로 인사한 모노쿠마를 지나쳤다. 그렇지만 이번엔 이 살인적인 곰인형을 무시하지 않았다.
슈이치는 미소로 답하고는 곰인형과 함께 웃었다. 4층, 그의 연구교실로 향하기 전 사랑스럽다는듯이 인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유시간은 혼자 보내야겠지…
체육관으로 모이라는 모노쿠마의 방송이 모니터마다 울려펴질 때 그들은 잠이 덜 깬 상태였다. 평소보다 새되고 흥분한 목소리였지만 곰인형이 자신들의 인생에 간섭하려는건 더이상 원치 않았다. 보나마나 헛소리니까 무시해도 되겠지.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죽이지 않을 테니 시체발견 방송의 위험은 없었다.
“우푸푸. 내가 너라면 무시하지 않을거야. 안오면 후회할걸. 우푸푸푸.”
곰인형의 비웃음은 명백히 초고교급들에게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도전장을 내밀었다. 분노, 혼란과 전반적인 피곤함이 각 초고교급들 안에서 끓어올랐다. 마지못해 일어서서 아는 욕이란 욕을 모조리 모노쿠마에게 퍼부었다.
“5분안에 여기 오라고 할게. 서둘러야 될거야, 시곗바늘은 움직이고 있다구.” 그 말을 마지막으로 모든 모니터들이 꺼지고 학원은 다시한번 침묵에 잠겼다.
놀랍게도, 모노쿠마가 5분을 세기도 전에 모두 집합한데다, 역대 최단 기록이었다. 거의 모두가 출석했다. 여기서 빠진 사람은 딱 한명…
“잠깐, 사이하라는 어딨어?” 마키는 딱히 특정한 누군가를 골라서 물어본게 아니였다. 그말 그대로, 탐정을 제외한 모두가 있었다. 방송 못들었나? 그랬을 리가. 평소에 키루미와 같은 시간에 일어나는데.
“우푸푸, 걱정은 붙들어 매셔. 사이하라군은 오늘 조회에서 제외됐으니까. 다른 역할이 주어졌거든.”
어째서 곰의 웃음이 평소보다 냉혹하게 들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마치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어쨌든, 와줘서 고마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께. 우리는 게임을 할거야…”
“살인게임은 하지 않을검다, 모노쿠마.” 아마미의 선언에 다른 초고교급들은 와글대고 투덜거리는 소리로 동의를 표했다. 첫 두달동안 살인이 일어나지 않자 포기한거 아니였어? 살인은 안된다는 약속을 다들 환상적으로 지키고 있었다. 이 지옥의 구렁텅이에 빠진지 다섯달째, 예상보다 잘하고 있었다.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너희가 하고 싶지 않아해서 살인게임은 시시해졌거든. 그런 낡아빠진 게임은 하지 않을거야. 그으으래애서어….”
모노크롬 곰인형은 기억나라 라이트를 꺼내들었다. “숨바꼭질을 할거야!”
초고교급들은 불평을 내뱉었다. 숨바꼭질? 정말 유치한 게임이잖아. 심지어 게임을 좋아하는 코키치마저도 짜증이 났다. 글쎄, 만약 완전히 깨어있을때, 눈뜰려고 애쓰지 않을때 한다면 다른 이야기겠지만.
“자아 자. 내가 누구를 찾아야 하는지 말하면 다 참가하고 싶어할걸.”
그러고선 모노쿠마즈, 정확히 말하자면 모노파니, 모노키드, 모노타로와 모노스케를 불렀다. 에구이사르들은 커다란 텔레비전을 들고 와서 모든 초고교급들이 볼 수 있게 들어올렸다. 아직 모노쿠마의 게임에 완전히 집중하진 않았다.
“타겟은 바로…”
모니터는 정지 상태였다가 사이하라 슈이치, 초고교급 탐정을 보여주었다. 1인칭 시점처럼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똑바로 바라보는게 아니라, 마치 어린아이를 바라보는것처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이 보고있는 시점의 사람 위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마치 머리를 쓰다듬는 것처럼. 비디오는 삐소리와 함께 정지했다.
“게임은 숨바꼭질. 보다시피 타겟은 사이하라군이고 보다시피 이 학원 어딘가에 있어. 너희의 임무는 그를 찾는 거야.” 모노쿠마는 키득거리면서 두 발(손?)을 입가에 갖다대었다.
“누워서 떡 먹기네! 순식간에 슈이치를 찾을거라고!” 카이토는 주먹을 치켜올리며 선언했다. 그가 옳다는걸 알았기에 다른 이들도 동의했다.
“우푸푸, 글쎄, 물론 산 채로 찾아야 해.”
모노쿠마의 말을 듣자 모두의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산 채로? 살아있는 상태로 찾아야 한다고? 왜?!
“사이하라짱에게 무슨 짓이라도 한거야?!” 곰인형들에게 모독 세레를 퍼부으며 침묵을 먼저 깨뜨린 건 코키치였다. 곤타가 막아세우지 않았더라면 당장 달려들어 한대 쳤을 것이다.
“우리 학생들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잖아!” 카에데의 비난. 그녀는, 모두는 화가 났다. 어떻게 모두 잠들어 있었을 때 그런 짓을 했지? 슈이치가 무력할때 말야.
“아따, 아빠는 그 불쌍한 애한테 아무 짓도 안했당께요.” 모노스케가 끼어들었고 그의 목소리는 에구이사르를 통해 울러퍼졌다.
“우리는 따른다 교칙을!” 모노키드도 덧붙였다.
“대체 무슨 헛소리냐고?” 코키치의 조소는 눈에 띄게 가라앉아 있었다. 모노쿠마는 그저 웃기만 했다.
“나는 사이하라군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걸… 너희가 그랬지.”
“뭐?”
누군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모노쿠마는 기억나라 라이트를 꺼내어 작동시켰다. 초고교급들이 각자의 머리를 짚으니 기억이, 그와 보낸 밤의 기억들이 너무나도 많이 되돌아왔다.
기억해냈다. 이제서야 기억해냈다.
밤마다 그들이 슈이치를 붙들고 슈이치가 그들을 붙들었던 것을. 방을 떠날 때마다 슈이치가 짓밟힌 것처럼 보였지만 이유를 알지 못했던 것을.
인생 최고의 밤이 아닌 것처럼 굴때마다 슈이치의 눈에서 생기가 사라져 가던 것을.
어째서?!
어째서 잊어버렸던 거야?!
“그럼, 이제 게임을 할 마음이 들어?” 그렇게 물어보는 모노쿠마는 결국엔 초고교급들 각자의 얼굴에 드러난 절망을 즐기고 있었다.
“나…난 사이하라짱에게 끔찍한 짓을 했어.” 코키치는 흐느꼈고, 거짓 눈물이 아니었다. 자의로 멈출수도 없었고 당연히 자의로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사이하라짱을…아프게 했어.”
란타로의 정신은 모든걸 받아들일수 없었다. 관심있던 소년과 친밀한 만남을 가져왔다는게 정말 기뻤지만, 밤마다 그를 떠날 때의 자신의 행동에 격노했다. 대체 뭘 생각하고 있었던거야!? 제정신이었다면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곁에서 일어나는걸 상상했다. 그의 얼굴 주름을 하나하나 관찰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늘 그랬듯이 아름다웠다.
그는 성관계를 가지고선 그냥 사라지는 사람은 아니였다.
“이건 가ㅉ-.”
“이건 뻥이 아니라구. 너네가 아무도 안죽이고 빈둥거리던 지난 6개월동안 일어난 일이야.” 모노쿠마의 진술. "너희 모두 탐정군을 장난감마냥 가지고 놀았지. 머저리 냉혈한들 같으니라고. 너네가 얼마나 많은 절망을 안겨줬는지 봐."
“어째서 우리의 기억을 지운 건가?!” 그렇게 물어보는 코레키요의 목소리는 모노크롬 곰인형에 대한 혐오가 선명히 끓어오르고 있었다. "만약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럼 슈이치가 고통받지 않을 수 있었잖아. 다른 사람들도 그가 했던 것과 똑같은 짓을 슈이치에게 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가 자신을 모두의 스트레스 해소대상이라고만 여기지 않기를 바랬다는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곰인형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으응? 당연히 그러는 편이 더 재밌으니까. 내 플랜 B이기도 했고. 너희들을 이용하는건 생각보다 쉬웠지만."
“너희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보낼때 사이하라군은 자신을 너희에게 맡겼어. 최소한 한명만이라도 같이 보낸 밤을 기억하길 바라면서. 너희가 방에서 나올 때마다, 나는 밖에서 기다리다가 새로 만든 까먹어라 라이트를 비춰서 그와 보낸 소중한 밤을 훔쳤지.”
모노쿠마가 자신의 행적을 말하자 그들도 기억해냈다. 바로 밖에서 수상쩍게 행동하는 모노쿠마를 만났더니 빛에 눈이 멀어서 자신의 방에서 공허함 속에 깨어난 것을.
“하지만 사이하라군은 건드리지 않았어. 그런 거에 영향받기에는 너무 영리했으니까. 그리고, 너희들이 했던 음란한 짓을 모두 기억하게 하는 편이 더 효과가 좋았거든.” 모노쿠마는 모노쿠마즈의 웃음에 합류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체육관의 벽에 반사되어 울려퍼졌다.
“불쌍한 사이하라군…바보같은 클래스메이트들에게 놀아났을 뿐이었다니.”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만약 그들이 누군가에게 밤 내내 놀아나다가 다음날 아무 일도 없었던것처럼 대해진다면 단 하루라도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조수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단 한번도 화내지 않고 저 멀리서 웃어넘기기만 했다는게 카이토를 괴롭게 했다.
"조건이 뭐냐 모노쿠마?” 일행 중 가장 신중했던 료마가 물었다. 그딴 거에 놀아났다는걸 인정할 수 없었다.
모노쿠마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너희가 서로를 죽이게 할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쓰면 되지. 누가 죽기만 하면 되니까. 어떤 방법인지는 상관없어. 숨쉬지 않는 몸이 보고 싶었을 뿐이야. 그야말로 완벽한 절망이지, 그럼 내가 뭘 계획하고 있는지 알거같아?”
“너희가 더 화내기 전에, 그리고 내 아이들이 더 어지럽히기 전에, 나머지 지시를 전부 설명해줄게. 알았지?”
“사이하라군은 이 학원 어딘가에 있고, 뭘 하려는지 나는 알고 있어. 너희가 기억해냈다는걸 알리 없으니까 예정대로 진행하겠지. 너희들의 임무는 그가 떠나기 전까지 찾아내는것. 그 전에 먼저 찾아낸다면 그의 절망을 제거할께. 하지만 내가 이긴다며어어어어어언… 너희가 너무 늦었을때 만족하겠다고 할께.”
그의 말이 끝났을 때 무대에 가까이 있던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체육관을 뛰쳐나가면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잠들어있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를 찾아야 했다.
용서를 갈구하고 그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우쳐 주어야 했다.
그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희생할 것이다.
“이야기 맘에 들었니 모노담?” 슈이치는 무릎위에 앉은채 탐정의 말을 듣고 있는 초록색 모노쿠마즈에게 물어보았다. 도서관에서 빌린 이야기책을 읽으면서 연구교실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모노담은 대답 대신 소리를 냈지만 슈이치는 이해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 알았어. 좀더 행복한 결말을 원했구나.” 웃으면서 그를 들어올려 마주보았다. 아마도 모노쿠마가 모노담에게 그를 감시하라고 말했을 거란걸,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다는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누군가와 함께 있어서 기뻤다. “다른 이야기 못 읽어줘서 미안해, 시간이 안 되네.”
“아아, 시간은 충분히 낭비했어. 내가 여기에 온 이유가 있으니까. 모노담, 잠깐만.” 슈이치는 일어서서 조심스럽게 모노담을 내려놓았다. 곰인형은 그가 독약으로 가득한 선반을 향하는걸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이미 무얼 가져갈지 결정내렸다. 가장 약효가 빠른 것은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나같은 거에게 어울리는 최후야.”
그가 살아있고 숨쉬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목격하게 될 로봇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랑 같이 시간 보내 줘서 고마워. 괜찮다면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
모노담은 답했다. “무-엇-이-냐?”
로봇의 기계적인 음성에도 불구하고, 슈이치는 왠지 모노담이 진심이란걸 느꼈다. 그 순간까지 뿐이라 해도, 그를 걱정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그렇게 기쁠 수 없었다.
“제발 나를 잊지 말아줘.”
울음을 멈춰서 로봇에게 이 결심을 후회하지 않을거란걸 보여주었다.
한번에 병을 비워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벽난로의 자작거림만이 들리는 공간에서 모노담은 바닥에 누워있는 몸을 바라보았다. 미동도 없는 얼굴에는 미소가 잠들어 있었다.
Persona. 단간 팬들도 알고 있을 옆동네 게임 시리즈가 아니라, 보편적으론 ‘이미지 관리를 위해 쓰는 가면’을 일컫는 단어. 원래 고대 그리스 가면극에서 배우들이 썼다 벘었다 했던 가면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이후 라틴어와 섞이며 Person(사람)과 Personality(인격, 성격)의 어원이 되었고, 카를 융Carl Jung에 의해 ‘사회에서 요구하는 도덕, 질서, 의무 등을 따르고 자신의 본성을 감추거나 다스리기 위한 개념’을 의미하는 심리학 용어가 되었다. [본문으로]
속편답게 FTM 트랜스젠더 슈이치 설정. 자세한 설명은 전편을 참고해 주세요. 지금까지 목격한 LGBTQ 설정중에서도 가장 흔한게 FTM트랜스 슈이치+논바이너리[각주:1] 오마 더라고요. 어느 금손님의 뇌피셜인데 시나브로 퍼진거 같아요. 정말 잘하셨습니다
호칭문제. 아 호칭문제. 성으로 부르는 일본식과 이름으로 부르는 미국식때문에 미치겠어요... 언젠가 얘도 정리해서 가이드라인(?) 올려야지
슈이치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을까. 게임상에서 보여준 거로 봐선 패러디한 그분과는 달리 썩 좋은 관계는 아니였을거 같아. 배우와 각본가라는게 수상하기 짝이 없기도 하고... 아니 애초에 발매 전엔 숙부님이 의혹을 샀잖아? 그렇다고 슈이치가 전혀 의심스럽지 않았던것도 아니고. 배우, 각본가, 탐정... 뭐야 이 집안? 아주 대놓고 노리기라도 한것처럼 수상하잖아...
화이트데이를 노리고 오매불망 기다려오던 작품은 거짓말같이 장렬하게 4일이나 지각하게 됩니다. 결국 원문 업로드 후 정확히 369일이 지났다고 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자기관리 실패라는 변명밖에 없습니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인생을 바쁘게 삽니다... 애초에 5일/15일/25일마다 이 블로그가 업뎃되기를 기다리시는 분이 있을리 없잖아? UTC -5(서머타임 반영시 UTC -4)의 시차를 감안하면 14~16일 중 어느 순간이고 한영번역도 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일주일 뒤 25일이면 역대급 작품을 올리겠습니다. 분량도 몰입감도 절망도 역대 기록을 갱신할 정도에요. 이거만 올리고 지금당장 작업 재개할게요. 그때까지 기대해주세요...라는 말은 차마 못하겠고, 기다려주세요, 아니 잊지 말아주세요...
코키치에게서 지나치게 단 초콜릿 한무더기를 받은지 대략 한달 후, 슈이치는 어쩔 줄 몰랐다. 전에는 화이트데이라고 아무것도 살 필요 없었는데. 충분히 쉬웠다. 이론상으로는. 코키치는 자신이 주는 거라면 아무 사탕이나 장신구를 좋아하겠지만, 그치만, 그건 너무 쉬워 보였다. 코키치는 발렌타인 초콜릿을 만들려고 최선을 다했는데, 그럼 자신도 두손으로 직접 뭔가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왜그렇게 걱정하는건지 모르겠슴다. 오마군은 설탕이 있는 거라면, 특히 사이하라군이 만든 거라면 아무거나 먹을거라고요.” 란타로는 슈이치가 직접 만든 컵케이크에 조그만 마시멜로를 올려놓는걸 바라보기만 했다. 바닐라맛에, 순백색 프로스팅(크림), 그리고 아몬드 추출물 조금. 화이트데이의 ‘화이트’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최소한 사이하라군의 남친은 먹을 수 있잖슴까, 전통적인 선물을 주려면 제겐 선택지가 별로 없슴다.”
자기 자신의 고민을 걱정하기보다는 란타로를 도와줘도 괜찮았기에 슈이치는 생각에 잠겼다.
“키보군이 네 장신구 좋아하던거 같던데?” 키보가 란타로의 귀걸이에서 부서져 내리는 햇빛을 바라보는걸 적어도 한번 이상은 눈치챘다. “키보군 꺼도 하나 사주면 되지 않을까? 커플팔찌라던가? 그런거라면 맘에 들어할거야.”
란타로는 매우 조용해지더니 강렬한 표정을 지었다. 거의 일년동안 친구로 지내왔지만, 그 무서운 표졍을 볼때마다 움찔할 수 밖에 없었다.
“…사이하라군, 천재임다. 문 닫기전에 가봐야 겠슴다, 감삼다, 그럼 이만!”
란타로는 슈이치가 한마디 꺼내기도 전에 조리실을 나갔다. 아 이런. 얘기할 사람이 있어서 좋았는데, 하지만 어차피 거의 다 끝났으니까—
“찾았다! 뭐하는—” 등 바로 뒤에서 들린 들뜬 외침에 마시멜로 봉지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거 내꺼야?”
아, 깜짝선물 이었어야 하는데.
“코키치, 오늘은 토죠양을 도와서 교실 청소하는거로 알고 있었는데?” 추가로 설명하자면, 수업에 집중하지 않아서 받은 벌이란 뜻이었다.
“그랬지, 하지만 토죠짱이 나는 더 어지럽히기만 한다고 나머지는 자신이 다 할테니 그만 너를 찾으러 가래. 재밌지!” 슈이치는 조금도 속지 않았다—코키치는 방을 어지렵혀 놓을지 몰라도 쓰레기장 수준까지는 아니였다. 키루미가 인내심을 잃을 정도로 터무니없는 일을, 그게 뭐든 간에, 일부러 벌여놓았겠지. “그리고 여기 찾았지! 저기, 지금 하나 먹어도 돼?”
약하게 손을 쳐내면서 코키치의 눈에 차오르는 눈물은 자연스럽게 무시했다. 그게 먹힐 리 없잖아.
“너께 아닐 수도 있잖아. 나한테 초콜릿 준 예비학과 여학생 주려고 만든 거일 수도 있고.”
“거짓말은 내 담당이라구, 슈이치짱. 너한테 초콜릿 준 여자애 6명은 넘어. 아 진짜, 그거 여기 있는 내꺼잖아. 딱 하나만 먹으면 안될까? 제바아알?” 풀죽은 아기고양이 같은 표정에 슈이치는 한숨쉬면서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코키치는 환호하면서 완전히 장식된 컵케이크 하나를 집더니 종이껍질을 벗기고 크게 한입 베어물었다. 얼굴은 온통 크림범벅이 되었고, 환한 미소를 지었을 땐 사랑스럽다라는 말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진짜 맛있어! 빵 굽는거 정말 잘한다 슈이치짱!”
“ㄱ-고마워. 나… 연습 많이 했어.” 코키치의 표정은 진지해졌지만 지저분한 얼굴 때문에 오히려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신경 쓰지 마. 중요한거 아니야.”
“중요한게 아닌거야, 아니면 말하기 불편한 거야?” 코키치는 컵케이크를 내려놓고 입술에 묻은 크림을 핥았다. “말할 필요는 없지만, 하고 싶으면, 내가 여기 있어.”
과거에 여러번 받았던 제안이기도 했다. 코키치와 오래 있을 수록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었다. 아, 그리고, 이제 자신의 부모님에 대해서도 알았으니까, 그럼…
“내가 어렸을때, 어머니가 요리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기로 했어. 상상할 수 있는 모든걸 만드는 법을 배웠지. 여기 오기 전 숙부님 댁에 있을 때에도 요리 담당은 나였어. 꽤 잘하는 편이야.” 자신이 무언가를 잘한다는걸 인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자신의 능력에 꽤 자신감이 있었다. “반의 남자애들 모두에게 초콜릿 만드는거 도와주와셨을때 난 열살이었어.”
“…말하기 싫으면 여기서 끊어도 괜찮아.” 코키치는 마시멜로 봉지를 조리대에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손이 떨리는걸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부모님 상대한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부모님으로부터 해방된 방문이 지난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 오랫동안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고, 이제 이야기 시작할 시간이라고, 치유를 시작할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괜찮아. 너에게 말해주고 싶어.” 코키치는 계속하라고 끄덕였다. “반에 좋아하던 여자애가 있어서, 걔한테도 하나 만들어주고 싶었어. 특별한 거로. 그치만 어머니가, 어…” 아직도 지나치게 달콤한, 특히나 잔인한 말을 할때 항상 쓰던 그 목소리를 들을수 있어서 공허한 웃음만 나왔다. “이렇게 말하셨어, 하지만 메이, 여자애에게 초콜릿을 준다면 모두 너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거야. 그건 싫지? 그렇고선 초콜릿을 정말 잘 만든다고, 모든 여자애들은 요리할 줄 알아야 한다고, 정말 착한 딸이어서 자랑스럽다고, 뭐 그런 말들을 계속 하셨어…”
목 안에서 단어 하나하나가 불타오르는것만 같았다. 불쾌감을 토해내고 싶어졌다.
“끔찍해…”
“응. 정말 그랬어.” 기억을 떨쳐내려는듯 고개를 저었다. 할 수 만 있다면, 어머니에 대해서 두번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발렌타인 데이때 아무거나 못 만들어주는거야. 미안해. 사탕 좋아하는거 아는데, 근데—”
“하지만 너가 편안하다고 느끼는게 초콜릿 받는것보다 중요하잖아. 그리고 나 사랑하는거 알고 있으니까, 사과할 필요 없어.”
“고마워…” 클래스메이트중 대다수는 매일 장난만 치는 아이가 둘이서만 있을땐 이렇다는걸 절대 믿지 않을거란 느낌이 들었다. 코키치의 장난만 치는 어린애 같은 페르소나가 아니라 이런 면을 볼 수 있는건 그야말로 특권이었다. “그치만 아직도 기분이 좋지 않은걸. 그래서 다음날 너가 제일 좋아하는 카페에 데려간 거야. 왠지 죄책감이 들어서. 내 말은, 여성적인걸 피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가끔 다른 사람이 나한테 한 말이나 강요한게 기억나서, 전부 멀리하고 싶어져.”
코키치가 정말로 이해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않았지만, 실은 이해하지 않기를 바랬다. 적어도 개인적인 수준에서는. 옷장의 80퍼센트는 여성복이었지만 코키치는 그의 남성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증명할 필요는 없었다. 어쩌면 자기 자신도 그렇다는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래야 할것만 같았다.
처음엔 코키치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서히, 그는 손을 뻗어 슈이치의 손을 잡고선 꼬옥 쥐었다.
“기분 나빠하지 말라고 말해줄 수 있으면 좋을텐데, 하지만 쉽지 않다는거 알고 있어. 넌 나보다 훨씬 안좋은 일을 겪었는데도 계속 강하게 버텨냈잖아! 슈이치짱, 넌 진짜 대단한 사람이야. 그런 너가 내 남자친구여서 정말 기뻐.”
코키치를 변호할 수 있는 말은 많았다—이유는 다를지더라도 코키치가 괴롭힘을 당해보지 않은건 아니니까. 둘다 서로만의 짐을 짊어져왔다…
하지만 한번의 대화를 나누기에는 충분히 격심한 주제라고 슈이치는 결론내렸다.
“뺨에 크림 묻었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닦아내려는걸 슈이치는 계속 잡고 있던 손을 쥐고선 허리를 숙여, 코키치의 얼굴에서 달콤한 아몬드 크림을 핥아내었다. 그러고선 코키치의 입술을 붙잡고선 이 키스가 말로 나타낼 수 없는 모든 감정을 전달하길 바랬다. 키스가 끝난 후 멍한 미소를 봤을때 최소한 조금이라도 먹혔다는걸 알 수 있었다. “나도 너가 내 남자친구여서 기뻐. 정말 사랑해, 코키치.”
코키치는 슈이치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는 팔을 둘렀다. 슈이치는 웃으면서 얼굴이 새빨개진 남자친구를 껴안았다.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좋게 흘러갔다.
물론, 이제 화이트데이 깜짝선물이 없지만…
다음날 화이트데이가 되었고, 79기생 B반은, 스트레이트[각주:2] 커플이 한 쌍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 따위는 신경쓰지 않았다. 텐코와 히미코는 사탕을 나눠먹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비몽사몽한 여자친구에게 사탕을 먹이고 있었다. 키루미와 카에데는 학교가 끝난 뒤 어디로 놀러갈지 얘기하고 있었다. 키보는 란타로의 선물이 하늘에서 내려오기라도 한것처럼 장식된 손목을 바라보았다.
슈이치는 전날 나머지 컵케이크를 전부 코키치에게 주었고, 놀랍게도 아직 두개나 남아있었다. 아니, 지금 책상에서 하나 먹고 있으니까, 하나하고 반개. 아침부터 단걸 먹는다고 설교하고 싶었지만 정신이 다른데 팔려 있었다. 가방 안에 있는 상자에 대해 생각했다. 정말 지금 해도 될까? 아님 둘만 남을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하지만 코키치는 관심받는걸 좋아했으니까…
“오마군?” 혀끝에 남자친구의 성을 담는게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가 되었다. 그래도 클래스메이트들 주변에서 평소대로 행동하는건 조금 부끄러웠다. “그… 그거 말고도 또 다른거 줄게 있어.”
원래 코키치의 생일선물이었지만, 그때까지 보충기간이 세달이나 남아있었으니까, 그렇게 걱정되진 않았다.
“응? 사이하라짱 다른거 준비 안해도 되는데!” 컵케이크 마지막 한입을 삼킬때 눈이 반짝거렸다. “그래도 정말 기뻐!”
클래스메이트들 주변에서 사용하는 페르소나를 연기할때 쓰는 어린아이같은 말투였지만 슈이치는 눈에 서린 진심어린 감사를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있게 가방에서 상자를 꺼내 코키치에게 건내줄 수 있었다. 기대감에 가득찬 웃음과 함께 코키치는 상자를 열었다.
“…사이하라 슈이치, 계속 이렇게 우주 최고의 남친이 되면 졸업하기 전에 프로포즈 해버린다.”
반의 대다수가 둘을 바라보자 슈이치의 얼굴은 새빨개졌다. 한편 코키치는 상자에서 스웨터를 꺼내 감탄하느라 바빠서 신경쓸 여유는 없었다. 어느날 캠퍼스 밖 상점 쇼윈도에서 발견하자마자 자신의 옷장 절반과 어울릴 거라면서 한눈에 사랑에 빠졌었다. 그래서 수술비를 위한 돈을 모두 저축해두자 값비싼 분홍색 시폰 가디건을 위한 돈을 따로 모으기 시작했다. 코키치가 이렇게 기뻐하는걸 보니 그 모든 것이 충분히 가치있었다.
점원이 여자친구를 위한건지 물어보지 않아도 할수 있었겠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남자친구거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을때 그 표정은 좀 웃기긴 했다.
“오늘밤 입어도 될거 같은데? 그러니까, 같이 저녁 먹고 싶으면…” 코키치가 가지고 있는 라일락색과 자두색 체크무늬 치마가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다. 여성 패션은 그의 특기가 아니였을지 몰라도, 코키치가 뭘 입으면 귀여워 보이는지는 알고 있었다. “너무 화려한건 말고, 그치만 놀러나가면 좋을것 같아서.”
코키치는 조심스럽게 가디건을 다시 개어 상자 안에 집어넣었다. 신나서 끄덕이는 내내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좋아! 정말 좋아하는 슈이치랑 놀러가는건 항상 재밌는걸!” 반의 누군가의 숨이 막히는 소리를 들었다. 슈이치는 츠무기일거라고 확신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한건지 깨닫자마자 불안하게 킥킥 웃었다. “내 말은, 정말 좋아하는 사이하라짱!”
슈이치는 고개를 젓더니 작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괜찮아. 나 때문에 사이하라라고 부르는거 알고 있어. 하지만 공공장소에서 슈이치라고 불러도 괜찮아.” 잠시 멈춰서 그의 허를 찌를 때마다 코키치가 얼마나 멋져보이는지 감상했다. 비록 그를 놀래키는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였지만. “선물 맘에 들어해서 기뻐, 코키치. 해피 화이트 데이.”
과거의 기억이라던가, 설레발치는 교우들이라던가, 그 무엇도 상관 없다. 코키치는 가장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고, 슈이치는 ‘축복받았다’라는 말밖에 떠올릴 수 없다.
일단 dove는 비둘기. Pigeon도 비둘기이긴 하지만, 그쪽은 새대가리 닭둘기등 영 좋지 않은(...) 이미지가 강하고, dove-특히 올리브 가지를 물고 있는 하얀색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에서 노아가 날려보낸 비둘기가 올리브 가지를 물고온 데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Release는 ‘풀어주다, 방출하다, 개봉하다’ 정도로 해석되고, surrender는 ‘넘겨주다, 항복하다, 포기하다’ 라는 뜻입니다. ‘해방’과 ‘양도’를 고른건 순전히 제 취향.
즉 ‘평화를 위해 사랑을 포기해라’ 비슷한 뜻의 제목입니다.
'열정도 목적도 없는 여행'의 프리퀄. 팀 단간론파 이전의 슈이치와 코키치의 관계. 라는것 같아...
작가님 왈: 달달하고 꽁냥꽁냥한 이야기(fluff)를 써보려 한 결과입니다. 알고 있으니까 닥쳐. 듣고싶지 않아
이 장르에서 달달함은 있을 수 없는거 다 아시죠?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그래도 이번화만큼은 달달해요. 레알 참트루 마지데 진짜로(전 오마가 아닙니다.) 작업 전에 한번 자세히 훑어보다가 심장이 나대고 입꼬리가 승천하고 자동적으로 꺄아ㅏㅏ아가ㅏㅇ아ㅏ하아ㅏ악 괴성이 나오려는걸 겨우 삼켰어
알파벳 수로 따지면 50글자는 거뜬히 넘어가는 문장이 어째서 한글로는 20글자 내외밖에 되지 않는 건가요? 세종대왕님 해명이 절실합니다
그들의 첫 만남은 별 아래에서였다.
인류사상 최대최악의 절망적 사건이 한창일 때였다. 그날 오후 슈이치는 절망에 합류한 폭도에게 부모님을 잃었다. 그들은 슈이치를 로커 안으로 밀쳐서 외동아들로부터 폭도를 떨어뜨리려 했다. 로커 안에서 부모님이 맞아 죽는걸 무력하게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밤이 되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사라지기까지 기다렸다가 로커에서 나왔다. 부모님의 시체는 약탈당해서 유품으로 간직할만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결혼반지도(안쪽에는 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어머니의 목걸이도(결혼 10주년때 아버지가 주신 것). 부모님의 최후를, 폭도가 그들의 머리를 내리친것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폭도가 훼손하는걸 막으려면 부모님의 시체를 매장해야 했다. 그렇지만 슈이치는 이미 주변을 수색했었다. 삽을 찾으려고 몇 마일을 돌아다닐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그 다음으로 최선인 방식을 택했다.
공터까지 시체를 끌고 갔다. 그러고는 웅크려 맨손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보이는 것보다 힘든 작업이었다. 땅은 처음에는 단단했지만 깊이 팔수록 촉촉해졌다. 손톱 밑에 흙과 진흙이 파고들었지만 신경쓸 여유는 없었다. 몇시간동안 땅만 판것 같은데 구덩이는 아무리 파도 커지지 않았다.
위에서 그림자가 나타났다. 무시하고선 계속해서 땅을 팠다.
"이렇게 늦은데 밖에 있으면 위험해," 그림자는 말했다.
슈이치는 계속해서 땅을 팠다. 이 낯선 사람이 자신의 재산을 약탈하거나 죽이고 싶어했다 하더라도 상관하지 않았다. 최소한 효성스러운 아들로서 죽을테니까.
"도와줄게," 소년은 손을 건냈다. 슈이치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 옆에 웅크려 손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한마디도 나누지 않는 대신 가능한 한 빨리 땅을 파는데 집중하는 쪽을 선택했다.
어떤 면에서는 무언의 동반자의 존재에 안심이 되는듯 했다.
무덤은 슈이치가 바랬던 것보다 약간 얕았지만, 그래도 충분했다. 폭도가 다시 돌아와 그들을 발견할 가능성이 여전히 있을때 꾸물거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슈이치는 부모님의 시체를 무덤까지 끌고 가 (손을 잡은채 나란히. 죽을때까지도 함께하고 싶어할 정도로 서로를 사랑했기에) 흙을 그 위에 덮었다. 무덤을 마지막으로 토닥여 다지고 일어나면서 손에 묻은 흙을 털었다.
그의 작업은 이제 끝났다. 돌아서서 떠나려 했다.
"잠깐만," 그가 불렀다. 슈이치는 도중에 멈처섰다. "내 이름은 오마 코키치야. 너는?"
"...사이하라 슈이치."
"사이하라군. 아니면 사이하라 선배?"
"아무렇게나 불러도 상관없어," 슈이치의 답변이었다.
"사이하라짱?"
슈이치는 대답하지 않았다. 최소한 이름으로 부른건 아니었으니까.
"저기, 사이하라짱. 만약 갈 곳 없으면, 따라와도 괜찮아," 오마의 권유, 사실상 강요였다.
"숙부님 찾으면 돼," 슈이치는 말했다.
"한밤중에 그럴 수는 없지." 슈이치가 여전히 대답하지 않자 오마는 화난듯 한숨을 푹 쉬었다. "아니, 딱 하룻밤 뿐이라니까. 하룻밤 묵고, 쉬고, 재충전하라고. 다음날 아침에 떠나면 되니까."
슈이치는 결국 포기했다. "알았어," 그렇게 말하고선 자신을 이끌고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오마의 손은 흙과 먼지투성이였지만 깜짝 놀랄 만큼 따뜻했다.
같이 보낸 그날 밤, 그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아지트에서 지내는 어린이들은 그들을 DICE라고 자칭한다는걸 알았다. 절망적 사건[각주:1] 전에는 그들은 단순히 장난꾸러기 집단이었다. 오마는, 이유는 불명이었지만, 그들의 대장이었다. DICE는 절망적 사건이 일어나기 한참 전부터 거리에서 노숙해와서 생존을 위한 은신과 도둑질에 능하다는걸 배웠다.
오마는 자신보다 한참 어리다는걸 알았다(열다섯살. 자신은 열일곱살). 그럼 '사이하라 선배'라고 불러야 하냐고 물어봤을때, 1분 내내 미친듯이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나 작은 소년이 말하니까 뭔가... 이상하게 들렸다.
이상했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여성적인 호칭으로 불려서 최소한 기분나빴을텐데, 오마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말투가 맘에 들어서 별 신경쓰지 않았다. 사실은, 그렇게 불려져서 반가웠다.
다음날 아침, 기분이 한결 좋아진 채 아지트를 떠났다. 비탄은 여전히 남아있었고 가라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오마의 존재가 조금이나마 고통을 덜어주었다.
(울지 않았다. 울 수 없었다.)
슈이치는 숙부님을 찾은 뒤에도 DICE의 비밀기지에 몇번이고 되돌아온다는걸 깨달았다.
그날 밤에 보여준 친절에 대한 보답일 뿐이야, 슈이치는 자신에게 말했다. 하지만 한번의 방문은 또다른 방문으로 이끌었고, 슈이치가 이틀에 한번씩 DICE를 방문하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나마 가장 낯익은 오마에게 들러붙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표정으로 판단하건데 그들은 그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면 알고는 있었지만, 인정하기는 싫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들은 별 아래에서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 그들은 서서히, 열명의 다른 십대들에게 둘러쌓여, 어째서인지 안식처처럼 느껴진 비밀기지에서 사랑에 빠졌다. 천천히 진행된 사랑이었지만, 오마가 친구였다가 하룻밤 사이에 더이상 아니게 되니까 슈이치는 갑작스럽다고 느꼈다.
"사이하라짱, 좋아해," 그는 슈이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오마는 가끔 거짓말한 전과가 있었지만, 슈이치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걸 마음으로 알 수 있었다. "내 감정에 보답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거 알고있어. 하지만 너한테 말해야 돼. 왜냐면..." 오마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어느날 일어나서 내 마음을 고백하지 못한걸 후회하고 싶지 않거든."
"오마군..." 슈이치는 입을 열었지만 곧 침묵에 빠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국가 단위의 아포칼립스 상황 때엔 말할 필요도 없고, 한번도 고백 받아 본 적은 없었다. 맞는 단어를 찾느라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길고 어색한 침묵이 그들 사이에 퍼졌다. 오마는 무리해서 주먹을 피고 씩 웃었다. "알았어! 그럼 안녕, 사이하라군. 만나서 반가웠어." 그는 재빨리 돌아섰지만 슈이치는 그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참으려 한 것을 눈치챘다.
슈이치는 생각하기도 전에 손을 뻗어 오마의 손목을 잡았다. "잠깐만!"
심장 고동 소리 한번. 그리고 두번. 오마의 답답하게 들리는 숨소리가 숨이 차는 것처럼 들린다는걸 깨닫자 오마는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으려 하고 있다는걸 눈치챘다. 슈이치에게 자신의 진정한 감정을 말할 모든 용기를 짜내었는데, 대답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게 해서 마음아프게 했다.
시간을 끌수록 오마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자각에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한마디를 내뱉었다. "미안, 그냥 놀랐을 뿐이야. 나... 나도 너 좋아해, 오마군."
천천히, 오마는 고개를 들어 슈이치를 바라보았다. 눈이 그렁그렁 해졌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슈이치는 그의 뺨에 손을 대어 엄지손가락으로 오마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첫 눈물을 닦아내었다.
입술이 서로 맞닿았다. 한발 뒤로 물러나 슈이치는 입술을 핥았다. 오마에게서 달콤한 맛이 났다.
오마의 얼굴이 구겨졌다. "정말 기뻐, 사이하라짱. 절망적 사건을 살아남을거라곤, 내가 좋아하는 만큼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찾을거라곤 생각도 못했어." 이 시점에서 눈물이 한없이 그의 얼굴을 적시고 있어서, 슈이치는 작은 소년을 꼭 껴안아, 오마의 얼굴을 가슴에 파묻었다.
잠시 뒤, 슈이치는 오마를 놓아준뒤 손을 꼭 쥐었다. "우리는 이 절망을 같이 살아남을 거야. 그리고, 슈이치라고 불러줘."
오마는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를 돌렸다. 달빛 아래에서 새빨개진 얼굴이 정말 귀엽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아-알았어. 그럼 너도 코키치라고 불러. 남자친구끼리는 서로 이름으로 부르는 거니까, 그치?"
저는 슈이치만을 파는 주의고 얘가 행복하기만 하면 다 잘 받아먹는 잡식이지만, 꼭 메이저 커플링을 골라야 한다면 단연 오마사이입니다.
누구보다 달랐고 동시에 닮았던 진실과 거짓. 둘이 함께한다면 슈이치는 거짓이 가진 힘을, 오마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방법을 배울수 있잖아. 서로에 대해 더 잘 알아갈 수 있잖아. 그게 베니샤케단이 증명한 해피엔딩이고.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 대체 왜 그런 파멸을 맞이하게 한거야, 설명해, 코다카!
그러니까 여러분, 제발 2차창작에서라도 둘이 행복하게 해주세요 (오열
키보는 바닥으로 추락하고 몇초동안 발작하더니 곧 행동을 멈췄다. 오마의 두 손이 일으킨 또다른 죽음. 하지만 모든 것이 계획대로 간다면, 다른 사람들은 살 수 있으리라.
천장이 굉음을 내며 흔들리더니 무너져 내렸다.
됐다.
정의의 전당의 폭탄은 참가자들을 비껴나가게 설치되었다. 모두 가능한 한 빨리 오마와 유메노의 연단으로 달려가야 했다. 거기가 은신처로 지정된 장소였으니까. 그들과 시로가네 사이에 돌무더기의 벽이 쌓일 거고, 그거면 슬쩍 빠져나갈 수 있을 연막이 되겠지.
단 한가지, 오마는 거짓말했다. 돌덩이가 시로가네 위에 떨어져 즉사시킬거란걸 확신했다.
잘못 계산했다. 커다란 돌이 그들과 하루카와 사이에 떨어져 성공적으로 갈라놓았을 뿐만 아니라 돌덩이가 유메노와 오마에게 떨어졌다. 유메노는 제시간에 피했지만, 오마는 질병 때문에 반응 속도가 느렸다. 돌덩이가 배에 떨어져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고통. 모든 곳이 고통스럽기만 하다. 벌린 입 사이로 소리없는 비명과 더 많은 피가 흘러나왔다.
"오마!" 유메노의 비명. 달려와서 돌무더기를 치우려 했지만 그녀의 손목을 잡고선 고개를 저었다. 사이슈 학원은 그의 희생자들이 잠들 장소. 그도 죽음으로서 그들을 따라갈 것이다.
"내 주변에 틈이 있어. 도움 찾아올께," 하루카와는 그렇게 말하자마자 뛰쳐나갔다.
일어선 유메노는 눈물을 참으려고 얼굴을 꼬집었다. "어째서 이래야만 하는 게냐?"
오마는 자신이 처량해 보일거란걸 알고 있었다. 뺨을 따라 피가 흘러내렸고, 복부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고인 참상. 눈물이 차올랐다. 사실은 죽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살아남지 못하리라.
"오마군, 괜찮아," 사이하라가 그를 달랬다. 그는 오마를 안정시킬려고 머리를 쓰담드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오마의 호흡이 진정되었고 심박도 느려졌다.
"사이하라쨩...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오마는 간청했다.
사이하라는 오마의 손을 잡고선 꽉 쥐었다. "무엇이든 괜찮아, 오마군. 그냥 나하고 있어줘, 알았지? 하루카와양이 도움을 찾아올 거야."
"거짓말해줘. 말해줘-" 기침을 동반한 발작에 잠시 멈춰야 했지만 계속했다. "죽지 않을거라고 말해줘. 나는 네 친구였다고 말해줘. 마지막으로 한번만, 날 위해 웃어줘."
"거짓말 아니야, 오마군. 정말로 너를 내 친구라고 생각해. 너의 곁을 떠나지 않을거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사이하라는 울기 시작했다.
"사이하라쨩," 오마는 헐떡였다. 온갖 힘을 다 짜내서 피투성이가 된 손을 사이하라의 뺨에 갖다 대었다. "부탁이야. 점점 보는게... 힘들어져."
처음엔 사이하라는 오마를 바라보기만 했다. 눈물이 뺨을 따라 흘러내렸다. 오마의 손을 놓지 않은채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었다. 오마의 손을 꽉 잡고선 수줍은 소년에게서 본것중 가장 환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질거야, 알았지? 하루카와양이 도움을 찾아올 거야. 꼭 그럴 거야."
숨쉬는게 점점 힘들어졌다. 더이상 다리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은 아무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는걸 막 깨달았다. "이루마짱하고 곤타... 모모타짱하고... 키보... 시로가네짱... 모두 날 용서... 했을까?"
사이하라는 열렬히 끄덕였다. "물론이지. 오래 전에 너를 용서했을 거야. 네 친구들이니까."
답변하려 입을 열었지만 나오는 것은 목메인 울음 뿐이었다. 눈을 떴지만 보이는 것은 어둠 뿐이었다. 아스란히 유메노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사이하라의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는것을 느꼈다. 자신의 축축한 손을 감싼 사이하라의 손의 온기를 느끼며. 그에게 미소짓는 사이하라를 마지막으로 떠올렸다(16년간의 인생동안 목격한 것중 가장 아름다웠고 빛났다). 기억했다-
오디션 비디오에 나온 검은 가쿠란을 차려입고 슈이치와 손을 잡았던 것을 기억했다. 별 아래에서, 첫 키스를 나눈 바로 그 별 아래에서 슈이치에게 고백한 것을 기억했다. 다른 고등학교를 다닌다는게 참을 수 없어서, 같은 대학에 붙을 수 있도록 같이 공부했던것을 기억했다-
본인의 집에서 습격당하자 슈이치의 집으로 달려가, 슈이치가 상처를 치료하고 손을 꼭 잡은채 잠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다음날 고등학교는 달라도 슈이치와 같이 등교했던 것을, 그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을 알았기에 사람들이 있는 데서 손을 잡을 용기를 내지 못했던 것을 기억했다. 기억했다-
슈이치가 사라진 날을 기억했다. 절망에 찌든 세계에서 팀 단간론파를 쫓아, 이 포스트 아포칼립스 같은 세상에서 시체에게서 훔친 총으로 네 명을 무자비하게 살해한 후 붙잡혀 살인게임의 열여섯번째 학생으로 참가하게 된 것을 기억했다.
"오마군, 날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제발, 내 곁에 있어줘. 가지 마- 가지 말아줘, 제발. 나를 위해서라도 해주면 안될까?" 슈이치는 간청했다.
대체 왜 캐릭터마다 말투가 다른 겁니까... 이 문장을 말하는게 과연 얘일까 아니면 얘가 이렇게 말할까 혹시 캐붕일까 고민하다 피말려 죽는줄 알았어
ㅅㄹㄱㄴ가 연속 33명의 성대모사를 해냈을리 없어. 현실에서도 토가미이시다 아키라 또는 슈이치하야시바라 메구미 아님 모노쿠마즈야마데라 코이치 레벨의 어지간한 레전드 베테랑 초광역계가 아니면 불가능에 가까운걸. 그렇게 가상현실 au에 한표.
그러므로 이 세명이 주역으로 나오는 쇼와 겐로쿠 라쿠고 심중을 꼭 봐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귀가 매우 즐겁습니다.
특히 메구상이 직접 부르신 오프닝 살얼음 심중과 사신의 임종은 귀르가즘 그 자체.
각하 특유의 허스키함이 옅게 깔린 사극 분위기가 매우 엑설런트. 신구지가 좋아합니다
슈이치와 동일한 성우라는걸 아는 순간 입이 저절로 벌어질 것이야.
사이하라의 도움과 함께, 모모타의 죽음에서 아카마츠의 억울한 처형으로 주제를 전환했다. 시로가네를 몰아붙여 주모자임을 자백하게 했다. 시로가네의 말실수를 지적해서 다른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는걸 시인하게 함으로서 그들이 남아있는 유일한 인류가 아니란걸 증명했다.
시로가네는 그들이 단간론파라는 게임 쇼에 있다고 말했다. 아카마츠, 모모타와 사이하라의 오디션 영상을 보여 주었다. 모두-특히 사이하라와 하루카와-의 사기를 뚝 떨어뜨리기 충분했다. 오마는 기억이 전부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했었고 그걸 이야기했지만, 그래도 재능을 부여받기전의 그들이 어땠는지 보는건 충격적이었다.
모두가 전부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시로가네는 또 하나의 테이프를 꺼냈다. 검은 가쿠란을 차려입고, 카메라 앞에서 우물쭈물 하는 오마 코키치였다.
화면에 비친 오마는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주먹을 계속 쥐락펴락했다. "아-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해독불가]입니다. 이 게임에 참가하는 이유는... 그게... 제 자신이 싫기 때문입니다."
오마는 연단을 움켜쥐었다. 목이 더 간지러워졌다.
"자신감이 없다는게 싫습니다. 저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 모두가 싫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요. 단간론파 참가자는 기억이 지워지고 새로운 성격을 부여받는다는거 알고 있어요. 지금의 제가 사라지기를 원해요. 게임에서 죽더라도 상관 없어요. 괜찮아요. 합격하지 않더라도, 어차피 자살할 거니까."
한숨을 내쉬니 입술에서 피가 뿜어져 나와, 때묻지 않은 옷을 붉게 물들였다.
"오마군!" 사이하라는 외쳤다.
"제게 심어진 성격이 거짓이라 해도... 그 순간부턴 그게 진실이 되길 원해요."
오마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오마의 오른쪽에 서있던 유메노가 서둘러서 부축했다.
시로가네의 미소가 어째서인지 너무 커 보였다. "오마 코키치는 애초에 메인 악당이 될 캐릭터가 아니였어. 재능이 알려지지 않은 초고교급 학생 아마미 란타로가 아카마츠 카에데의 라이벌이 됐어야 했지. 그런데 이럴 수가? 둘다 첫번째 챕터에서 죽어버렸네! 사이하라군이 아카마츠양을 대체하려는건 계획된 일이었지만 그렇게 빨리는 아니였어. 무언가를 했어야 했지. 이 게임의 흑막을 정할 시간이 없었거든. 그래서, 안지양을 선택했어. 하지만 안지양은 기억나라 라이트를 파괴하기 시작했지. 그런거 허용할 리 없잖아? 그래서 신구지군이 그녀를 죽이게 했어."
히미코는 오마의 허리를 더욱 단단히 붙잡았다. "안지는... 너 때문에 죽은 것이냐?"
시로가네는 혀를 찼다. "아니 아니. 안지양을 죽인건 신구지군이잖아. 하지만 신구지군의 살인이 탄로나지 않는다면 게임이 끝났겠지. 그래서 차바시라양도 죽이게 했어."
"너..." 히미코의 화난 목소리.
"그리고 네번째 기억나라 라이트로 절망병을 부여했을때 말인데, 오마군, 우리 예상을 뛰어넘었지 뭐야! 각본에서 완전히 벗어났어! 너... 너는 원래 누군가를 죽이고 넘어감으로서 살인게임을 계속되게 했어야 했어. 자신이 흑막임을 인정하고 최대한 오래 학급재판을 연기하지 말았어야 했지. 나를 절망으로 가득 채웠어. 내가 만들어낸 캐릭터가 나를 파괴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넌 정말이지.. 내 최고의 창작물이야." 군침을 흘리는 시로가네의 눈은 반짝였고 꿈꾸는 듯 표정이 멍해졌다.
오마는 이를 갈았다. 자신은 그 누구의 창작물도 아니다. 자신은 그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다. 자신은 그 자신 자체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시로가네의 말이 이해가 갔다.
신구지의 처형 전까지만 해도 그는 단순히 짖궂은, 제일 나쁘게 평가하자면 속임수에 능한 사람이었다. 모두에게 장난을 거는 골칫덩어리. 하지만 네번째 기억나라 라이트 이후로 안의 무언가가 바뀌었다. 그 전까지는 살인은 안된다는 철칙을 고수하고 있었지만, 이루마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걸 알았을때,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대신 그녀를 죽이는 거였다. 또다른 선택지를 무수히 찾을 수 있었다; 가상세계에 접속하길 거부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이루마의 계획을 폭로해서 그녀를 피하라고 하거나, 아무거나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죽여버렸다. 그리고 그가 그녀를 죽였기 때문에 곤타도 죽어야 했다.
어째서 조종당하는거란걸 깨닫지 못한걸까?
"아 그리고, 게임을 더 재미있게 할려고 모모타군에게 바이러스를 투여했어. 오마군에게 이식된 것처럼 정신적인게 아니라 진짜 말이야. 절망한 소녀에게 희망을 준 소년이 죽어버려서 떠나게 된다! 그게 널 위해 작성된 이야기야, 하루카와양. 비록 병약 속성은 모모타군에게만 주어졌지만. 다른 사람이 감염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 시로가네의 속삭임. "그러게 몇주동안 시체랑 있겠다고 고집 피우지 말지!"
"그럼... 너가 모모타를 죽인거네," 하루카와가 조용히 내뱉었다.
"에노시마" 깔깔거리는 웃음소리. "내가 죽음을 촉진시켰다고 해서 내가 원인이 되는게 아냐. 기억 못하는 거야? 모모타군을 죽인건 바로 너잖아." 하루카와의 입술이 오므라졌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만약 당신이 살인게임을 계획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죽지 않았을 겁니다!" 키보의 비난.
"토가미" 팔짱을 낀 모습. "그리고 너... 키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작성된 캐릭터였을지 몰라도, 너는 모든걸 긁어모아서 만들어낸, 유일무이하게 진실된 존재다."
"뭐-뭐라고요?"
"코마에다" 머리를 가리키며 자신을 낮추는 듯한 표정. "너는 이 게임의 목적을 구현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야. 눈치채지 못한거야? 너덕분에 시청자들이 참여할 수 있었지. 너가 들었던 마음 속 소리? 그건 팀 단간론파 공식 사이트의 시청자 투표 결과야."
시로가네의 조소. "저건 틀림없는 너라고. 나라면 알고 있어, 너희의 오디션을 평가한건 바로 나니까."
"아니, 틀렸어. 사이하라짱은 영상에서도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모자를 똑바로 쓰고 있었다고. 사이하라짱은 모자를 쓸때면 항상 왼쪽 눈을 가리게 기울여서 쓰거든."
사이하라의 눈이 커졌다. "그-그건 맞아. 난 항상 모자를 왼쪽으로 돌려 썼어."
시로가네는 눈알을 굴렸다. "그게 어쨌는데? 아마 오디션 때에는 똑바로 쓰고 싶었나 보지."
"사이하라짱은 모자가 중심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면 항상 왼쪽 눈을 가리게 돌리거든. 이걸 아는 이유는..." 오마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더이상 거짓말은 없이, 오직 진실만을. "이걸 아는 이유는 이 게임의 그 누구보다도 그를 가장 많이 관찰했기 때문이야. 사이하라짱처럼 보이더라도 그건 사이하라짱이 아니야."
"그래서? 사이하라군을 짝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너를 믿어야 하는 거야?"
"응," 오마는 동의했다. 핀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고요했지만 오마는 굳게 서 시로가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누군가를 바로 눈앞에서 완벽히 연기할 수 있는 능력을 선보였잖아, 시로가네짱. 우리의 기억을, 재능을, 인생 전부를 조작했지. 그럼 그 비디오도 조작했을 가능성이 있잖아?"
시로가네는 옅게 미소지었다. "...맞췄네. 대단해. 응, 너희중 아무도 살인게임에 자의로 참가하지 않았어. 너희 전부 일본 방방곳곳에서 납치당한거야."
오마는 심호흡했다. 연단에 기대다시피 해서 다시 똑바로 섰다. 놓으면 다시 쓰러질 거란걸 알고 있었으니까. "시로가네짱, 우리 기억은 전부 조작된 거지? 너는 기억 조작을 피했다는 증거는 없잖아? 팀 단간론파에 이용당하고 있는거야. 제발, 그만해. 이 살인 게임을 멈춰. 이제 내보내줘."
잠시 동안, 오마는 시로가네가 망설이는것 같다고 생각했다. 짧은 시간동안 시로가네가 구원받고 모두와 같이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 그 망설임은 사라졌다. "그건 불가능해. 이건 모모타군의 죽음에 대한 재판인걸. 검정에 투표한 시간이야."
"안돼!" 사이하라는 소리쳤다. 그의 건너편에서 하루카와는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아니야, 사이하라. 정의의 심판을 받아야지. 이 재판이 일어나기까지 3주나 걸렸지만, 이제 시간이 다됐어."
"내가 도와줄 수 있다면 아니지," 오마는 속삭였다. 등 뒤에서 마지막 일렉트밤을 작동시켰다.
'이걸 아는 이유는...'의 원문은 ‘I know because’. 그대로 번역하면 ‘…하기 때문에 알고 있어.’가 되겠지. 한국어는 영어와 정반대로 동사가 문장 마지막에 오니까. 이걸 센스있게 번역한 나 아주 칭찬해줘
저 모자 가설의 증거사진을 위키아에서 찾아보시길. 이미지 업로드가 죽어도 안돼서 링크로 대체할게요.
잘 관찰하면 슈이치는 항상 모자가 왼쪽 눈을 가리게 돌려쓴다는걸 알 수 있을 겁니다. 오죽하면 프로필 사진도 모자를 조정하는 포즈라고?
그걸 유념하면 오디션 영상은 확실히 수상해. 오마가 지적한 것처럼 모자를 똑바로 쓰고 있다고.
익숙하고 편안한 침묵이었다. 박자에 딱딱 맞춰서 몇분동안 땅을 파다가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멈췄다. 이마에서 땀이 방울방울 떨어져 옷을 적셨다. 삽에 기대어서 균형을 유지해야 했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어?"
"응? 무슨 뜻이야, 하루카와짱?" 오마는 천진난만하게 되물었다.
하루카와는 그를 노려보았다. "은근슬쩍 넘어가려 하지마. 소매에 묻어있는 핏자국 봤어. 3주까지는 아니더라도 흘린지 며칠은 지난 피야. 모모타의 피는 아니니까, 너일 수 밖에 없어. 그러니까, 다시 물어볼게: 시간이 얼마나 남았어?"
암살자니까, 혈흔을 흘린뒤 경과한 시간과 색상의 관계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 그에게서도 죽음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을 거다. 팔다리와 정신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그 모든것이 약해져 있었으니까.
거짓말할수 있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피곤했다. 서있는 것만으로도 피곤해졌다. 숨쉬는 것만으로도 피곤해졌다. 그냥 누운채로 쉬고 두번다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바깥 세계의 진실’을 본 뒤로 피곤했었다. 불치병까지 합류하니 완전히 기진맥진했다. 그냥 자고 싶었다.
"...몰라. 난 의사가 아니거든, 하루카와짱. 아마도 며칠, 아무런 치료 없이는 몇주가 한계겠지."
"증상을 말해봐." 하루카와는 재촉했다.
"어지러워. 시야가 가끔 흐려지고.가끔은 아예 보이지 않아. 기침하면 피를 토하게 돼. 오랜 시간동안 서있는게 힘들어."
하루카와는 눈쌀을 찌뿌렸다. "그럼 땅을 파고 있으면 안되지. 그만 가, 오마. 나와 모모타를 위해 해준건 이제 충분하니까."
몇 주 전이었더라면, 오마는 기발한 감상을 남기거나 떼쟁이처럼 굴거나 남아있겠다고 고집을 피웠을 것이다. 이젠 그냥 피곤하기만 하다. "알았어. 그럼 가서 샤워할게." 기숙사로 돌아가려 했지만, 하루카와의 마지막 말에 잠시 멈춰섰다.
"...오마? 고마워. 내 목숨을 구했어. 모모타도 고마워 할거야."
오마는 기숙사로 돌아갔다. 자기 자신의 목숨밖에 구하지 않았는데.
오마는 상처가 다시 벌어져 피가 흐를 때까지 자신의 몸을 벅벅 문질렀다. 그래도 죽음의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사이하라는 샤위실에 들어와 그를 끌어낸 뒤 상처를 닦아내고 다시 치료했다. 사이하라가 이렇게 호들갑 떠는걸 보는게 아마도 마지막이 될거란 자각에 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삼켰다.
모모타가 그랬듯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오마는 연단에서 안절부절 못했다. 철같이 비릿한 피를 맛볼때까지 엄지손톱을 물어뜯었다.
이건 모든 학급재판을 끝내는 최후의 학급재판이다. 사이하라와 하루카와가 나머지 생존자들을 집합시키게 한뒤 에구이사르에서 모모타의 시체를 던져 모노쿠마가 학급재판을 확실히 열도록 했다. 이 학급재판에서 주모자를 밝혀내지 못하면, 하루카와가 검정이 되어 처형당한다. 하루카와나 모두의 목숨을 건 도박을 하려는 이상 실패는 용납할 수 없다.
(안뜰에 메아리치는 비명의 합창이 귓가에 울려퍼진다. 모모타의 시체가 그녀 바로 옆에 떨어지자 유메노는 기절했다. 하루카와마저 부풀어 오르고 모든 구멍에서 액체가 흐르는 모모타의 시체를 보자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게 그렇게 호들갑떨 일인가? 그 좁은 장소에서 모모타짱이랑 같이 앉은채 3주를 보낸거도 아니면서. 겁쟁이야, 전부.)
모노쿠마는 학급재판을 설명하는 평소의 멘트와 함께 학급재판을 열었다. 오마는 심호흡했다. 이제 진실을 마주할 시간이다.
중간에 연재중단되는건 아침드라마 절단신공이나 슈뢰딩거 결말만큼이나 괴롭다고 코다카 보고있나?
이 자리를 빌어 지금까지 번역을 허락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지금까지 모든 작가분들이 혼쾌히 허락하거나 역으로 감사해주셨는데, 아마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여줄 수 있어서일까?
애초에 번역 요청을 받았단건 그만큼 필력이 대단했거나 이 장르 한정으로 원작 이상으로 절망적이었다는 간접적 칭찬일 테니.
물론 저처럼 직접 번역하는 번밀레돋는(...) 케이스도 있습니다. 섣부른 판단은 금물.
주석을 달아 설명해야만 했던 세가지 관용어가 있습니다. 이런거까지 정성스럽게 번역하는 내가 참 싫다
야 초고교급 발명가 언젠가 나좀 보자. 넌 제발 그냥 숨만 쉬고 다녀
에구이사르 안에서, 썩어가는 모모타의 시체와 함께, 오마는 생각에 잠겼다.
순진한 성격이었을지 몰라도 모모타는 바보가 아니었다. 절대로. 우주비행사라는 것은 문무겸비를 의미했다. 공학과 기계수리에 능해야 했고, 우주에서 실험을 진행할 수 있을 지식이 필요했다.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 쉽게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주비행사가 배워야 할 것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의사소통이다.
우주비행사는 일본어와 영어뿐만이 아니라 러시아어에도 능통해야 한다. 품위있고 호감상이어야 한다. 동료 우주비행사들과 소통하는데 최소한의 이해가 필요해야 한다. 우주에서 의지할 수 있는건 동료뿐이니까.
그것이 모모타와 오마의 근본적인 차이였다.
모모타는 그들이 살인게임에서 가진건 서로뿐이란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야기할때 모두를 통합하려 했다. 신뢰에 조금만이라도 금이 간다면 깨지기 쉬운 평화가 산산조각 나는 건 시간문제일테니. 한편 오마는 말할때 냉정하고 무자비한 진실을 내뱉었다. 거짓말할 때에도 대화를 자신이 이득을 보는 쪽으로 유도하려는 직설적인 목적을 가지고 말했다. 무엇보다도, 감정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감정을 약점이라며 떨쳐냈지만 ,그건 자기 자신을 마주할 수 없어서 였다.)
모모타를 다혈질이고 예민하다고 단정지은 것은 오마의 실수였다. 그의 예민함은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었다. 그의 재능이 그는 보이는 것보다 더 지적이란걸 증명했으니. 시한부였기 때문에 모모타는 오마의 뒤엉킨 계획보다 살인 게임을 더 잘 망쳤다.
"저기, 모모타짱," 오마는 그를 불렀다. 어두컴컴한 조종석 안에선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모모타의 손이 있는 곳을 찾아 꽉 쥐었다. 끈적거렸지만 오마는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만약 내가 직접 이루마짱을 죽이고 시체를 은폐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그러면 곤타는 죽지 않았겠지?"
모모타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마는 키득거렸다. "응, 알고 있어.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지."
"오마군. 이제 그만 에구이사르에서 나와도 되지 않아?"
에구이사르는 무기였으니까. 그를 죽이고 싶어하는 아무나로부터-예를 들면 주모자라던가-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다. 경호하는 사람 없이 에구이사르에서 나오는 순간, 사이하라가 자신과 모모타의 죽음에 관한 학급재판을 맞이하게 될거란걸 확신했다. 그럼 하루카와는 죽게 되겠지. 모모타에게 살인게임을 끝내겠다고 약속했는데도.
(무엇보다도, 이건 이루마와 곤타 모모타마저 무자비하게 죽인 벌이다. 에구이사르 안에서 혼자 썩어도 싸다.)
"내가 왜? 모모타짱이 있는데. 사이하라짱보다는 백배천배 낫다고!" 오마는 노래하듯 말했다. 그건 거짓말이었다. 내가 에구이사르에서 나오려면 무엇이든 해줄 거라고, 시체와 하루에 24시간 일주일에 7일[각주:1]동안 시체랑 있다면 누구라도 그렇지 않겠어?
"오마군, 모두에게서 모모타군의 시체를 숨기고 싶어하는거 알아. 하지만 거기에만 매번 있을 필요는 없잖아."
오마의 조롱. "바보야 사이하라짱? 넌 탐정인줄 알았는데. 내가 에구이사르를 떠나기만 하면 모노쿠마는 다른 세명에게 시체를 보여줄 방법을 찾을 거라고."
사이하라는 망설였다. "교대... 할 수 있어."
용납할 수 없다. 하루카와와는 달리, 그는 죽음의 현장에 익숙하지 않았다. 탐정이더라도 펫 찾기나 불륜 조사 같은 사소한 사건만 맡아왔으니까. 차마 그렇게 친애하는, 순진한 탐정을 더럽힐 수 는 없었다. 사이하라가 단서를 위해 급우들의 시체를 검시했던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이건 다른 경우다. 오마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부패한 시체와 악취-
"너가 없어진다면 다른 사람들이 눈치챌거야. 아무도 나에 대해선 신경쓰지 않으니까." 아팠지만 이 게임에서 자신이 가장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란건 틀림없는 진실이었다. 이루마와 곤타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일행이 자신을 받아들일리는 만무했다. 한편 사이하라는 학급재판을 매번 하드캐리하는 사람이었다. 유용하고 예민하고 친절하고 오마는 아닌 모든 것이었다. 그건 사이하라를 오마보다 근본이 착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곤타군의 유언은 모두와 사이좋게 지내달라는 거였잖아. 그리고 넌 거기에 동의했지. 그것도 거짓말이었던 거야?" 사이하라는 압박을 가했다.
사이하라는 결정타를 먹였다. 사실은, 오마는 모두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었다. 토죠한테서 요리하는 법을 배우고 싶었고 아마미의 진짜 재능을 알아내고 싶었다(초고교급 생존자의 재능이 아니라 본래 재능을). 안뜰에서 곤타가 곤충을 찾는걸 돕고 싶었고 이루마가 드디어 떡칠[각주:2] 방법을 찾고 싶었다. 키보도 ㅈ[각주:3]이 달려 있는지(이루마가 하나 만들었는지) 확인하고 하루카와와 트레이닝 하고 (그럼 키가 좀더 커질까) 모모타의 지병의 치료법을 찾고 싶었다.
사이하라의 손을 잡고 싶었고 안뜰에서 별빛 아래 같이 눕고 아마도 사이하라의 부드럽고 약간 튼 입술에 진한 키스를 남기고 싶었다. 사이하라의 품안에 파고들어 그의 조용한 코골이를 듣다가 잠에 빠지고 싶었다. 사이하라가 진정한 자신을 보기를, 거짓말의 가면을 벗기고 자신의 선함을 보기를 원했다.
하지만 결국엔, 오마 코키치는 추악한 거짓말쟁이였다.
"당연하지, 사이하라짱. 내 몸은 70%의 거짓말로 이루어져 있다고! 아니면 그것도 거짓말이라던가?" 오마는 에구이사르를 조종해서 기기의 주먹으로 사이하라의 가녀린 몸을 움켜쥐었다. "내가 이루마짱과 곤타 둘다 죽인걸 잊어버린거야? 너도 손쉽게 죽일 수 있다고."
"넌 그러지 않을 거야," 사이하라는 자신있게 말했다.
"응?" 오마는 진심으로 놀랐다. 사이하라가 이렇게 자신있어 한적은 학급재판을 포함해서도 처음이었다. 그는 로봇의 거대한 주먹에 압사하기 직전이면서도 한점의 의심 없이 오마의 눈을 바라보았다. 오마는 겁주려는 의도로 사이하라를 에구이사르의 조종석으로 가까이 들어 올렸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것마저도 예상에 어긋났다.
"넌 그러지 않을거야. 확신해. 너는 이 모든걸 우리 모두를 위해서 한다는걸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어. 좀더 일찍 알아차리지 못해서 미안해. 하지만 너는 내 친구잖아, 오마군. 그리고 마음속으로는 나와 친구가 되고 싶어한다는거 알고 있어."
오마는 입을 열고 무슨 말이든, 아무 말이든 하려 했다. 할 수 있는 말은 무수히 많았다. 명백한 거짓말을 믿을걸 비웃거나, 주모자 행세를 계속하고 사이하라에게 어디까지나 자신은 이루마와 곤타를 죽인 사람이란걸 일깨울수도 있었다. 사이하라와 친구가 되고 싶어한다는 암시를 남긴 뒤 거짓말이었다고 웃어넘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사이하라를 내려놓을 뿐이었다.
24/7. 하루에 24시간 일주일에 7일, 즉 휴일 없다고. 24/7 오픈하는 가게라면 연중동안 오픈한다는 소리. 직역하는 못난 번역러를 둔 구독러분들에게 정말 미안하다아아아아!
[본문으로]
원문은 get laid. 섹뜨는 것보단 돌려 말하는 표현이지만, 그거나 그거나. [본문으로]
오마는 주모자가 아니라는 모노쿠마의 자폭성 확인사살 덕분에, 살해당하는 위험에서 많이 벗어난채 에구이사르를 떠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계획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들이 놀라는 일이 없도록, 한밤중에 방으로 급하게 뛰어가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남아서 모노쿠마가 학급재판을 열지 못하게 모모타의 시체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하루카와가 자원해서, 오마는 교대하고 정말 필요한 샤워를 위해 방으로 뛰어갔다. 몇주동안 시체와 곪아가는 자상과 함께 갇혀 있었던건 오마의 위생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이하라는 피로 얼룩진 오마의 옷과 상처를 보자마자 한번만이라도 침대에서 제대로 된 잠을 청하기를 강요했다. 오마는 저항했지만(거의다 내 피가 아니라 모모타짱 피라구!) 사이하라에겐 통하지 않았다. 그는 오마의 웃옷을 벋기더니 소독제와 붕대를 가져와, 오마의 팔과 등을 씻어내고 감쌌다.
사이하라가 자신의 맨살을 만지자 환희에 몸을 떨었고, 거기에 쾌감을 느꼈다는데서 올라온 자기혐오를 삼켰다.
"모모타군의... 시체와... 벌어진 상처와 함께 혼자 앉아있었다니, 아직도 믿기지 않아."
오마의 웃음은 공허했다. "쩔지 않아? 아직까지도 죽지 않았다는게 신기해. 두명이나 날 죽이려 했는데 아직도 살아 있어. 하하, 아마도 난 초고교급의 행운인가봐."
사이하라는 이를 갈았다. "그런거로 농담 하지 마. 죽을 수도 있는데."
"상냥도 하셔, 내가 죽으면 신경쓸 것처럼 굴지마. 나는 어쨌든 모모타짱을 죽였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학급재판이 없도록 시체를 숨겼지. 참 겁쟁이같지 않아?" 오마는 트레이드마크 웃음소리를 냈지만 사이하라는 거기에 속지 않았다.
"...아니, 넌 모모타군을 죽이지 않았어." 사이하라의 손가락이 오마의 등의 상처를 문질렀고, 오마는 고통에 찬 비명을 삼키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화살에 맞은 상처야. 이 학원에서 화살과 연관된 것이라면 하루카와양의 연구교실에 있는 크로스보우밖에 없어. 크로스보우를 사용하러면 먼저 어떻게 조립해야 하는지 알아야 해. 너와 하루카와양은 적대 관계였으니까 그녀가 너에게 방법을 가르쳐 주었을리는 만무해. 그래서 너가 크로스보우를 발사했다 하더라도 불가능했을거야. 그리고 넌 내내 격납고에 있었잖아. 너가 내 연구교실까지 뛰어가서 독약뿐만이 아니라 해독제도 집어왔을 시간이 있었을리 없어."
사이하라는 심호흡하더니 계속했다. "나는... 하루카와양이 널 죽이려 했지만 모모타군이 막아섰고 대신 죽었던 거라고 생각해."
오마의 입술이 어두운 미소로 일그러졌다. 역시 초고교급 탐정.
모모타가 옆에 없으니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오마대신 망을 보고 있던 사이하라는 부상을 입은 소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좀 쉬지 그래, 한숨도 못 쉬었잖아," 사이하라는 말했다.
오마는 비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당연히 그건 알고 있었다. 단지... 모모타의 손가락이 썩어갔다 하더라도 누군가의 손을 잡은채 잠들수 있다는건 오마에게 큰 위안이었다. 하지만 시체의 손을 잡았다는건 그에게도 징그럽고 소름끼치는 악몽을 꾸게 해서 그는 거짓말을 계속했다.
"사이하라짱이 여기 있으니까!" 불평했다. "만약 사이하라짱의 못생긴 얼굴을 안본다면 아기처럼 곤히 잘 수 있을텐데!"
당연히 거짓말 이었다. 사이하라는 잘생기고 매력적이었고, 오마 자신은 그러지 못한 모든 방면에서 아름다웠다.
사이하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오마의 침대로 걸어가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니, 오마의 머리를 껴안았다. 심지어 오마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는 섬세함을 발휘하기까지 했다.
오마의 심장이 잠시 멈줬다.
"자. 이러면 내 얼굴 보지 못하지?" 그렇게 말하면서 사이하라는 오마가 모모타에게 그랬던 것처럼 손을 뻗어 오마와 깍지를 꼈다.
오마는 몇분 지나지 않아 잠들었다.
이제 주모자가 여자인 것이 밝혀진 이상(사이하라는 작전팀에 합류했고 키보는 주모자의 도구이니, 유메노와 시로가네밖에 남지 않았다), 오마는 방에서 가져온 벌레 청소기를 하루카와에게 건네 여성에게만 제한된 모든 공간을 구석구석 수사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자연히, 음식과 물을 조달하는 담당은 하루카와에서 사이하라에게로 넘어왔다.
하루카와때와는 달리, 오마는 경계를 늦추게 되었다. 처음에는 살인게임에 대해서, 왜 이루마와 곤타를 죽였는지 얘기했다. 사이하라에게 막대한 죄책감을, 심지어는 모노쿠마가 자신을 곤타와 함께 처형시키기를 원했다고 고백하기까지 했다. 며칠 뒤, 사이하라에게 살인게임 외에도 다른 것들에 대해 얘기하게 되었다. 학원 밖에서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마는 DICE에 대해서, 사이하라는 숙부와 학교 친구들에 대해서.
사이하라는 정말 흥미로운 사람이었다. 모순과 거짓말로 가득 찾으면서도 자신이 그렇다는걸 알지 못했다. 모모타가 그랬던 것처럼 타인을 믿고 싶어했지만 탐정으로서의 의무감이 모두를 의심하도록 명령했다. 진실을 갈구했지만 재판 도중 원하는 결과를 위해 거짓말하는걸 주저하지 않았다. 오마를 오마인 채 그대로 내버려 두면서도 거짓말의 가면 뒤에 숨겨진 부서지기 쉬운, 고통스러워하는 소년을 보러 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오마는 사이하라의 손길을, 자신의 유연한 몸이 사이하라의 마른 몸매와 다시 맞닿기를 갈망했다. 사이하라의 따뜻한 손이 자신을 만지길 원했다. 실수로 칼로 손을 찍었을 때 사이하라가 치료해 준 것과 모모타의 죽음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에구이사르에서 나왔을때 정연히 상처를 닦아준 것을 회상했다. 그리고 물론, 사이하라의 품안에서 잠든채 같이 보낸 밤도.
하지만 그러는 대신, 불가능한 약속을 한 소년의 썩어가는 시체와 함께 비좁은 공간에 갇혔었다. 산 채로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가망은 볼 수 조차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