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보랏빛 머리의 소년이 있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어차피 동네 자체도 좋은 동네는 아니었다. 강도, 강간, 사기, 살해 그 모든것이 침묵당하는 마경이었으니까.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로, 최하위 계급으로 낙인찍힌 이상 소년은 죽지못해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언젠가 자신을 구원해줄 영웅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겨우 버틸수 있었다. 어린시절, 조금 더 행복했던 시절에 텔레비전에서 봤던, 항상 악당들을 물리치던 그런 영웅을.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술에 취한 아버지는 늘 그래왔듯 어머니를 때리기 시작했고, 아무 힘도 없는 어머니는 저항-아니, 저항이라 부를수도 없을 정도로 가냘픈 몸부림만 칠 뿐이었다. 어릴때 한번 직접 ‘히어로 흉내’를 낸 적이 있었다. 어머니를 향해 날아오는 주먹을 막으려 했다가, 벽에 내동댕이 쳐지고 기억이 끊긴 이후에는 그런 작은 용기마저도 잃어버렸다.


그렇지만 그날은 폭력의 정도가 심했다. 어머니의 움직임은 점차 느려지더니 완전히 정지해버렸다.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듯, 마지막으로 고통스럽게 그를 향해서 손을 뻗다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 눈이, 원망을 담아서, 그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다. 원망, 원망이라…내가 난입해서 멈췄어야 하는건데…! 아버지를 잠시만이라도 방해했더라면 어머니는 도망칠 수 있었을 텐데-내가, 내가 죽인거야. 내가 어머니를 죽인거야…! 항상 나타나서 나쁜 사람을 물리치는 히어로는 없는거야? 왜 나는 이렇게 처절할 정도로 약한거야? 왜 나는 영웅이 될 수 없는거야? 왜 나는…


하나의 사냥감의 숨통을 성공적으로 끊은 괴물은 곧 제 2의 희생양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물론 다음 희생양은 바로 그 소년. 나같은건 차라리 죽는게 나을거야. 죽여줘. 아니야, 죽기 싫어…! 이렇게 살다 죽고싶지 않아…!


괴물의 주먹이 날아오기 직전, 괴물의 목 언저리에서 붉은 꽃이 피더니 축축한 액체가 소년의 얼굴에 쏟아졌다. 희미해진 시야 사이로 또다른 인간의 형체가 난입해서 아버지였던 괴물의 시체를 난도질하는것을 언뜻 본 것 같았다. 그 형체는 소년의 존재를 자각하자마자 소년의 창백하고 가냘픈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소년의 기억은 다시한번 끊겼다.


소년은 새하얀 방에서 눈을 떴다. 피로 얼룩지고 찟겨진 옷대신 조명만큼 창백한 가운을 입고 있었다. 침대 주변에서 어른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년은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그가 깨어났음을 인식하자 한 어른이 그에게 다가갔다.


곧 장황한 설명을 들었다. 그 형체는 아버지에게 사기당한 사람이었고, 가족들이 자살하게 되자 분노에 휩싸여 복수했던 것. 갑자기 쏟아지는 해설의 홍수에서 한 정보가 그의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그 형체를, 범인을 잡은 사람은 그 또래의 탐정 지망생이었던것. 자신을 구해준 영웅. 몇년동안 기다렸던 히어로. 그를 직접 만나서, 진실된 감사를 전하고 싶다.


소년은 그의 ‘히어로’의 이름을 물었다.


물결같은 청발의 소녀가 있었다.


소녀의 재능은 화면에 나오는 휘황찬란한 옷들과 헤어스타일, 화장을 현실세계에 구현해내는 패션에 관련된 재능이었다. 텔레비전으로 봐왔던 어린 시절의 우상들처럼 변신할 수 있다는 것은 꽤나 큰 기쁨이었다. 소녀의 세심한 손재주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곧 ‘초고교급 코스플레이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어느날 소녀는 살인게임에 납치당했다. 살해당하거나, 아니면 누군가를 죽이고 처형을 받거나. 그런 죽음의 공포속에서도 태연해 보였던 날라리같은(이라 쓰고 잘생긴 이라고 읽어라) 소년이 있었다.


첫 만남은 피어스와 반지, 목걸이에 대해 물어보는 것이었다. 소년은 웃으면서 ‘여동생의 선물’이라고 대답했다.


두번째 만남은 여동생에 관해 물어보는 것이었다. 소년은 쓴웃음과 함께 그의 과거를 얘기해줬다. 이야기의 후반부쯤 소년은 그의 여동생의 작품이라는 네일아트 사진을 보여주었다. 예뻤다.


그 다음 만남과 질문의 주제는 네일아트였다. 답변 대신 직접 네일아트를 받는 영예를 누렸다. 답례로 소녀는 소년의 길고 아름다운 속눈썹을 정리해줬다.


그후에도 계속 그와 만나 치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와 함께 자신이 인생의 반평생을 바쳐 연구한 분야에 대해 열정을 불태우다보면 죽음에 대한 공포도 잊을 수 있었다. 어느날, 평소처럼 그와 얘기하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을때, 갑자기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날밤 소녀는 ‘어느날 모르는 곳에 끌려와 그곳에서 잘생긴 꽃미남을 좋아하게 됐다’라는 만화같은 현실에 흐뭇해 하며 잠들었다.


다음날, 소녀는 고백했다.


“아무래도, 너를 좋아하게 된거같아!”


소년은 대답했다.


“…나도.”


기뻤다. 죽을수도 있단 현실을 싹 잊어버릴 정도로.


그와 함께라면, 죽어도 좋아.


그가 없는 세상을 살아갈 바엔, 차라리 그와 함께.


순정만화에서나 나오는 느끼한 문장들을 눌러적으면서 소녀는 부끄러움에 애꿎은 이불을 걷어찼다. 삶과 죽음이 갈리는 상황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다. 다음날 그가 살해당한채로 발견될수 있으면서도, 바보같게도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아니, 다섯번의 학급재판이 지나도 두사람은 살아있었다. 둘다 살아남아 나갈수 있을 것이다. 소녀는 미약한 희망을 품었다.


살인게임이 거의 끝났다. 마지막 학급재판이었다. 누군가가 희생하면 다른 두사람은 살 수 있다. 소년은 희생양을 자청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진 투표시간. 소녀는 투표를 포기했다.


당연히 소년은 놀란듯한 표정을 지었다. 소년이 뭐라 하기도 전에 소녀는 말했다.


“…너가 없이 살아가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단 말이야! 차라리 너랑 함께 죽을래!”


그렇게 두사람은 마지막 벌칙을 받아들였다.


최후의 최후까지 소녀는 소년의 손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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