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https://archiveofourown.org/works/16354460/chapters/38268896

Happy birthday, Karoru!! Hope you have the best day ever!! Will this be an acceptable B-day gift?

Also credits to Shao; your magnificent pieces of art couldn't do better job to capture the atmosphere!

원제는 Wisteria-Loss. 


위스테리아-등나무의 꽃말은 '사랑에 취하다'! 크으으

등나무 등藤자는 일본 성씨에서 자주 볼수 있는 한자인데, 예를 들면 사이토斉藤라던가......정답입니다. 겐타로 성우분 사이토 소마斉藤壮馬님의 성과 똑같아요. 혹시 여기서 영감을 얻으신 건가요 작가님!!! 

작가님 왈, 불신의 기색을, 특히 어느 특정...한 장면에서, 놓치지 말고 읽어주세요. 무슨 의미인진 직접 확인해보세요! ^^ 


반점남발 만연체 꼭 써보고 싶었어요! 가독성은 희생당한 겁니다 유메노 작가님의 평소 문체가 궁금한 사람 1호. 물론 작가님은 챕터마다 문체를 바꿔써도 가독성에 전혀 문제가 없는 금손님이시겠죠......

이번에는 기나긴 수식어+반점+(수식어 곱빼기+주어+동사) 형태, 현재:과거=7:3 비율로 섞인 시제 정도...라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만약 브금을 깔고 읽으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중간에 걸린 링크를 클릭하 우타프리 미카제 아이의 Winter Blossom 피아노 버젼이 나옵니다.

자연스럽게 기사를 찾아 봤는데... 그런 짓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전 그걸 몰랐지... 호기심으로 죽인 고양이만 몇마리일까......

작가님?????작가니이이이이임?!??!!???!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선사하신 거죠?!!??!!!??

히 가사를 여기 실어서 맴찟을 공유한건 정말 유감스럽게 생각하지만 전혀 죄송하지 않지 않지 않습니다

저는 작업 도중 나카무라 유이치中村悠一의 벚꽃을 들었고...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앵슷 분위기를 연성해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독제독以毒制毒!


보통 ‘아이’라는 이름은 여성형 이름이지만,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청년군 이미지에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하셨어요

'아이'가 이름 アイ, 사랑 愛, 슬픔 哀, 희미함 曖, 어린아이 할때의 아이, 인공지능 AI 등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어서 언어덕후는 신나게 고통받았습니다

‘아이’시테루와 ‘다이스’키와의 말장난도 노렸다고… ((막간 치명타


용한 방 안, 하얀 커튼에 스며드는 노을은 회색 벽을 밝힌다.

안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져 있다: 두꺼운 커튼으로 나눠진, 형형색색의 기계들. 반대편에는, 모두 한 화가가 그려낸, 거의 십년된 작품 모음. 그리고 한구석에는, 익숙한 이름이 표지에 새겨진, 두께가 제각각인 책 한무더기.

리고 모든 것의 한가운데, 작가가 홀로 있다. 창문 틈새로 비집고 들어온 부드러운 바람에 머리카락이 살랑거린다. 하지만 칠흑같이 어둡고 흐리멍텅한 눈을 한 작가 본인은 조각상마냥 움직이지 않는다. 그 옆에서 빈 침대에 햇살이 스며든다.

차갑고, 꾸물거리는 공기 중에서, 고장난 축음기처럼, 마치 이미 오래전에 시간선에 아로새겨진 것을 간절히 바꾸려는 듯이, 기억들이 반복된다.

청명한 하늘의 아침이었다. 익숙한 카페에서, 멍하니 앞에 놓여진 종이를 가로지르는 펜에서 겐타로는 안식을 찾는다. 직원들이 자신을 알아볼 정도로 자주 방문했던지라, 아기자기 꾸며진 한 구석에서 프라이버시를 만끽할 수 있는 친절을 받곤 했다. 인정하건데, 여기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걸 즐겼다-이곳의 공기는 자주 부드러운 산들바람처럼 느껴져서, 평소와는 다른 날숨을 내쉴수 있고, 마치 새로운 이야기의 씨를 뿌리는 것마냥 춤추며 주변을 맴돈다. 겐타로에게는 평소와 별다를것 없는 날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을 거란걸 확신해서, 그 생각에 입가에서 피어나는 미소를 손가락 뒤에 숨긴다.

그순간 핸드폰의 진동을 느꼈다. 화면에 뜬 번호는 처음 보는 번호여서 처음에는 무시했다. 하지만 발신자는 고집스럽게도, 연속으로 화면에 불이 들어오게 해서, 결국엔 전화를 받았다.

“유메노 겐타로 선생님이십니까?”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전문직의 저음과 흡사해서, 차분하게 말을 계속하는데도, 겐타로는 발신자의 목소리에서 새어나오는…또다른 무언가를 어렴풋이 느낀다.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불길한 예감을 애써 떨쳐 내면서, 답변 몇마디를 내뱉는다.

“…테이카 종합병원 입니다.”

벌써부터 반쯤 아득해지는 의식 너머로, 겐타로는 의사의 첫 마디를 놓쳤지만, 곧바로 이어진 다음 몇마디는 고통스러울만큼 똑똑히 들렸다. “지금 당장…병원에 오시는 편이 좋을것 같습니다. 아이 군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 문장의 의미를 겐타로가 이해할동안 숨막히게 기나긴 시간이 흘렀지만, 비로소 깨달은 순간, 세계가 멈춘다. 머릿속에서 그 단어들이 반복될 동안, 주변이 흐리멍텅하게 흐려져서, 쓰라린 고통과 잇따른 공포의 파도만이 남는다.

이제 손이 덜덜 떨려서, 핸드폰을 쥐는데 애를 먹었지만, 강제로 호흡을 안정시키고, 의사선생님께 침착함과 유사하기만을 바랄수밖에 없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통화가 끝나기도 전에, 두 발은 이미 걸음을 옮겨서 카페를 떠났다. 흩어진 원고를 두고 떠나자 여직원이 부르는 소리가 아득히 들렸지만, 이내 곧 머릿속에서 째깍이는 시계 소리에 묵살당한다.

수없이 방문했던 방의 문을 드디어 열었을땐 전혀 숨을 쉴 수 없었다. 친구의 침대를 에워싼 의사들과 간호사들은 겐타로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침대 곁에 다가가자 순식간에 흩어진다. 남아있던 의사중 한명이 방을 나서기 전에.겐타로에게 다가갔는데, 입술의 움직임을 똑똑히 읽고, 통화 도중 들은것과 똑같은 목소리라는걸 눈치챌수 있었는데도, 겐타로는 귀를 먹먹하게 하는 침묵밖에 인식할 수 없었다.

겐…

뼈에 사무치게 익숙한 목소리가 이름을 불러서 침묵을 깨뜨린다. 그 순간에야 비로소, 주체할 수 없었던 눈물에, 두 뺨이 더럽혀진걸 깨닫는다.

“난 정말 최악의 친구야…오늘은 정말…최악의 날이네, 너한테 이런 짓을-” 아이는 입을 열었지만, 그순간 터져나온 기침은, 너무나도 부자연스러웠다-

즉시 곁으로 달려가서, 떨림에 몸이 무너져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거의 울부짖다시피, 말들을 내뱉는다. “ㄱ…곧 있으면 나아질 거라고 했잖…!”

“미안해…” 그렇게 말하는 아이의 얼굴은, 그동안 봐왔던것보다 훨씬 창백했고, 작은 웃음에 섞여 나오는 목소리는, 겐타로가 익숙해진, 지나치게 익숙해진 활기가 더이상 담겨져 있지 않다. “그러니까…그건 거짓말 이었어, 하하. 나쁜 버릇도 옮았나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을 이겨 내고, 겐타로에게 희미하게 웃어보이자, 답변 대신 떨림을 억누를 수 밖에 없다.

“저기, 겐? 이기적인 부탁,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해도 될까?"

가냘픈 손을 꼬옥 쥐자, 무언가가 손바닥을 누르는 감촉이 희미하게 느껴지지만, 한데 엮인 손가락의 틈새로 한기가 기어들어 올것을 두려워해서, 절대 손을 놓을 수 없다.

그 순간 수만개의 바늘이 심장을 찌르지만, 그래도 미소로 맞이하자, 나오는 목소리는 놀랄만큼 침착했다. “…물론이죠. 무슨 일이라도 해줄수 있어요.”

안도의 한숨이, 행복과 섞여서, 아이의 입을 떠나자, 겐타로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전에 시작한 이야기 마저 말해줘. 그 패션 디자이너 하고… 이상한 갬블러가 나오는 이야기 말야.”

틀림없이, 틀림없이, 그것 말고도 더 있을 텐데-

“지금은 이야기해줄 시간이-”

입술에 손가락이 약하게 맞닿자 말은 끊긴다. “겐. 나는 아무리 짧은 이야기라도…해피엔딩으로 끝났으면 좋겠어. 그리고 최고의 친구가 침대맡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보다…완벽한 해피엔딩이 있을리 없잖아?”

타로는 답변 대신 픽 웃을수 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도, 늘 그랬듯이 시적인 건가요…?”

겐타로가 망설일 동안, 찰나의 순간 다시 생명력을 되찾은 것처럼, 아이는 겐타로가 차마 거절할 수 없는 힘을 실어서 덧붙인다. “제발.”

둘의 눈이 마주친 그순간, 할 수 있는건 단 한가지 뿐이라는걸 알았다. 미소가 피어나서, 손가락이 움직여 머리카락을 걷어내자 드러나는 눈은, 그 무엇보다도 매혹적이어서, 시간이 흐를동안 더욱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알겠어요.”

그러자 아이가 지은 미소는, 신체의 병약함에도 불구하고, 기억하는 그 어떤것보다 찬란해서, 그 순간동안 중요한 유일무이한 것이 되었다.

그래서 즉석에서, 밤하늘의 수많은 별보다도 훨씬 많은 비밀을 품은 분홍 머리의 명랑 쾌활한 패션 디자이너와, 스릴을 위해서 자기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들을 훨씬 중요히 여기는 무모한 갬블러의-이번에는 진실된-이야기를 자아낸다.

언제부터 시야가 완전히 흐려지기 시작했는지, 언제부터 눈물에 옷과 두 뺨이 젖기 시작했는지, 언제부터 숨막히는 울음을 삼키려 했지만 실패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목이 메어오고, 가슴이 옥죄여 오더라도, 절대 멈출수 없어서, 주변 기계가 연주하는 불안정하지만 율동적인 선율과, 매초가 지날수록 점점 부자연스러워지는 호흡과, 겐타로의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진다.

말해줄 이야기가 떨어질 때까지 이야기를 계속하고, 끝에 다다르면 처음부터 다시 말하다가, 몇시간이 흘렀는지, 몇번을 반복했는지, 시간의 흐름을 망각했지만, 감긴 눈꺼풀 너머로 빛이 사라지는걸 바라보면서, 무거운 마지막 숨결이 허파를 떠나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순간 겐타로는 단 하나만을, 입가에서 절대 바래지 않은 희미하면서도 찬란한 미소를 기억했다.

희미한 생명의 선율이 하나의 음색으로 흐려지더니, 침묵만이 남는다.


텅 빈 침대 곁에서 몇시간을 떠나보냈는지 겐타로는 모르지만, 결국엔 조용한 목소리로 애틋하게 위로하던, 무시하려 했지만 이내 실패한 동정이 서린 눈길의 간호사가 병실 밖까지 데려다 주었다.

한걸음 한걸음마다 무겁게 가슴을 짓눌러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이미 과거에도 수십번은 드나든 길이지만, 보도에 발이 닿을 때마다, 만약 생각을 정처없이 떠돌도록 내버려둔다면, 어떤일이 일어날지 두려워서, 걸음에 집중한다. 가로등이 흐릿하게 거리를 비추고, 시나브로 기온이 오르자 생명의 마지막 가닥을 꼬옥 붙든 벚꽃의 분홍빛 바다가 깔린 길이 눈에 들어온다.

일년에 단 한번 피어나는, 기적적인 생명의 흔적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세계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수록, 점차 잊혀지게 될 덧없는 영혼들의 유품을 품은, 죽음의 정원이라고도 충분히 부를 수 있으리라.

마치 하나의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그리고 이미 겐타로는 자신이 어느 면에 위치해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두 발이 스스로 걸음을 옮겨서, 의식은 두서없이 방황하는데도, 어느덧 현관 문 앞에 다다랐다. 문의 나뭇결을 관찰하느라 뜸을 오래 들였지만, 결국 두 손은 작은 문고리를 잡고 돌린다-열쇠를 넣지 않았는데도 이미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는 사실도, 문의 반대편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아 젠장”도, 둘다 눈치채지 못한채, 겐타로는 문을 밀어 연다-

밝은 빛에 갑자기 시각이 압도당한다. 거기에 덮쳐오는 불꽃놀이 같은 소리가, 즉시 폭죽이라는걸 알아차린다. 알록달록한 종이조각의 비에 파묻힌다.

“생일 축하해!”

몇 초가 지난 후에야 겐타로의 두 눈은 깜박여서 초점을 되찾는다-하지만 시야를 조정하기 전에도 익숙한 파란색과 분홍색 머리가 언뜻 보인다. 이제 싱글벙글 웃는 다이스와 라무다가 눈에 들어온다. 그순간 다이스가 더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주인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강아지마냥 가상의 꼬리를 신나게 흔드는걸 누구라도 똑똑히 목격했으리라.

그제서야, 오늘이 며칠인지 기억해낸다.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감사합니다.’

‘소생은 행복해요.'

그러나 유메노 겐타로는 수려한 말쏨씨를 타고 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에서 말할 수 있는, 말해야 하는 예문들이 넘쳐 흐르는데도 불구하고…

그순간, 단 한마디의 거짓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대신, 진실과 거짓의 진퇴양난에 사로잡혀서, 겐타로는 단순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침묵은 금이라 했던가, 그렇지만, 대답의 부재가 단순히 충격이나 놀람의 부작용이 아니라는걸 동료들이 눈치채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방의 공기가 즉시 바뀌어서, 마치 모든게 환상이었던 것처럼, 축하하는 분위기가 팀 동료들의 미소와 함께 녹아 사라져서, 또다른 죄책감의 압박으로 일그러진다.

“야, -겐타로?”

먼저 다이스가 입을 연다. 평소에는 활기차던 목소리가 걱정에 휩싸인건,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을 증폭시킬 뿐이다. 밝은 민트빛 눈이 곁에서 겐타로를 지켜본다. 비슷하지만,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이 서린 표정을 지은 라무다와 눈이 마주친다.

다이스가 계속해서 부르고 있다는걸, 겐타로가 마침내 눈치채기까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다. 마침내 대답을 내뱉을 목소리를 가까스로 되찾았을 때에는, 기껏 입에서 떠나자마자 떨리지 않도록, 모든 집중력을 한데 모아야 했다.

“...네?”

둘의 머릿속을 온통 한 질문이 차지한게 너무나도 명백해서, 기력없는 반응을 바라보는 두 쌍의 눈은, 딱히 입을 열지 않더라도 생생히 의문점을 전달하지만, 개의치 않고 다이스가 직접 물을 기회를, 기다렸다는듯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입 밖에 내기를 허락한다.

“무슨 일 있었어?”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에게서 충분히 예상하고도 남는 질문이지만, 가장 직설적인 돌직구를 날리곤 하는 다이스의 경향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빈틈을 논파하는데 성공한다. 안식을 울부짖고, 어깨의 무거운 짐을 이제 그만 내려놓기를 갈구하는 유치한 면과, 여전히 고집스럽게, 그것밖에 할 줄 아는게 없으니까, 자신이 지어온 견고한 벽을 사수하려는 면 사이에서 갈등이 피어난다.

두 면이 충돌한다.

…그러자 두려움의 구름이 몰려와서, 어느 한쪽도 이기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다는 공포에 압도당해서, 겐타로는 갈등이 자연스럽게 풀릴 시간을 주지 않는다: 대신, 그러도록 늘 예행연습 한것처럼 밀쳐낼 뿐이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소생은 괜찮은데요.”

여전히 목소리는 침착하고, 평소의 자신에 대한 모든 ‘평범한’ 건-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래야만 하지만-그럴싸해도, 그걸 인증하는 순간에도, 실은, 입 밖에 낸 순간에도, 여전히 걱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다이스와 라무다에게선, 눈 씻고 찾아봐도, 일말의 반응조차 찾을 수 없다.

그러자 안에서 무언가가 무너져 내리겠다고 위협한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진실성을, 마지막 한톨뿐만이라도 좋으니까, 처절하리만큼 필사적으로 사수한다.

...불행히도 그리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ㅈ…죄송해요, 둘다.” 떨림이 기어오른다. 멈춤과 망설임 사이로 단어들이 흘러나온다. 무력하고, 노출되고, 평소에 쓰던 가면이 떨어져서, 산산조각 난걸 필사적으로 다시 붙이는 것만 같지만, 기적적으로 계속 기능하는 자신의 현 상태의 위태로움을 잘 알기에, 여의치 않고 계속한다. “소생은…마음은 고맙지만, 오늘을 혼자 있었으면 하네요.”

현 상황에선 걱정될 수 밖에 없는 부탁이란걸, 누구라도 부정할 수 없어서, 라무다는 눈썹을 찌뿌린다-

“겐타로~?”

마치 라무다가 입을 여는게 신호였던 것처럼, 다이스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겐타로에게 다가간다. 찰나의 순간 동안, 겐타로는 신체적 접촉을 환영해서, 최소한 누군가의 온기 안에서 일시적인 안식을, 위로를 받기를 거의 갈구했지만-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의 짐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 수 있을 가능성을 고려한 것만으로도 자책한다.

다시 입을 연 다이스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진정되고, 위험할 만큼 위안이 된다. “우리가 해줄 수 있-“

“지금 둘이 해줄 수 있는건 없어요. 아무것도요. 그냥… 소생을 내버려 두세요.”

둘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또다른 죄책감의 파도에 휩쓸려서, 친절함에 분노와 불만감으로 대응한걸, 심장이 대신 벌을 내린다. 이제 눈가가 따끔거리는게 느껴지지만, 겐타로는 입술을-피맛이 느껴질 정도로 세게-잘근잘근 씹어서, 쏟아지겠다고 위협하는 감정의 파도를 다시 억누른다.

공기가 잔잔해진다.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이미 무너져가는 벽에 파도가 부딪혀 부서질 때마다 영겁의 시간이 흘러가는 것만 같다.

이제 입 안에서 쇠맛이 느껴진다-무딘 고통이 배어나오더니, 그 순간, 이제 그만 놓아주려는 것처럼, 드디어 다이스와 라무다가 이해한다는 듯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걸 곁눈질로 슬쩍 보았다. 어깨에 가볍게 손이 닿자, 온몸으로 억눌린 전율이 퍼지지만, 겐타로는-누가 보면 죽었다고 착각할 정도로-가만히, 뒤에서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도 그대로 있었다.

후퇴하는 발소리가 어렴풋이 들리지만, 이내 귀를 멀게 하는 침묵이, 본인의 위태롭게 떨리는 숨결에 깨지는 소리만이 귓가에 맴돈다.

의식이 다시 연결되고 몸이 작동하기까지 몇 초가 더 지난다. 머리 위에 자리잡은 잔머리카락을 집는 동안, 겐타로는 손가락 사이에 꼬옥 쥐어진 종이의 존재를 비로소 자각한다. 이제 기억이 다시 돌아온다: 마지막 대화를 나눌 동안 아이가 조용히 손에 쥐어준, 그동안 내내 잊고 있었던 편지다.

떨리는 손가락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나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갑작스런 움직임에 즉시 구겨지고 재가 되어 사라질걸 두려워하면서, 편지를 연다.

다소 느리게 진행된 작업이지만, 마침내 펼쳤을 때엔, 스케치의 첫 선이 눈에 들어온다-아이는 자주 겐타로가 말해준 수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낸 수많은 캐릭터들을 종이에다 그려내곤 했지만, 이 낙서는 생각보다 단순했다-그저 아이와 겐타로, 그리고 둘 사이에 딸기 쇼트케이크-특별한 날에 같이 먹으러 가자고 약속했었지-가 있는 그림. 화가가 한창 그리던 도중 생각을 바꾸기라도 한것처럼, 연필선이 갑자기 흐려져서, 뻗어나가는 선을 눈으로 쫓다가, 왼쪽 아래 한구석에 작게 휘갈긴 글씨를, 너무나도 익숙한 글씨체를 눈치챈다:

한 이야기가 끝나면, 또다른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말이 있잖아.

우리한테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

우리가 함께 보낸 모든 순간을 사랑했고, 나눈 모든 대화를 소중히 여겼어.

그리고 마음속에 너가 나를 위해 지어준 모든 멋진 이야기들을 간직했어.

더 긴 이야기를 나눴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둘다 해피엔딩을 맞이하게 될거야.

내 해피엔딩은 너 덕분에 찾았어.

그러니까, 여기서 멈추지 말아줘. 네 이야기의 다음 페이지를 넘겨서, 너만의 해피엔딩을 찾아줘.


너는 항상 내가 어둠을 밝혀준 등불이라고 했지.

하지만 너도 나의 등불이었어.

너가 없었더라면 칙칙하고 고통스러웠을 나날에 색깔과 기쁨을 가져다 주었어. 너의 미소는 두번 다시 느끼지 못할거라고 생각한 온기를 가져다 주었어.

너를 만나서 정말 기뻐. 이건 평생 후회하지 않을거야.

다음에 만날 때도 좋은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어.

고마워, 겐. 전부 고마워.

이미 편지의 끝에 다다르기 한참 전에 시선이 다시 흐려진다.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피어나고, 이런 것마저도 시적인걸 비웃고 싶어져서, 그러자 마지막 한가닥이 끊어진다: 안에서 자신을 가까스로 붙들고 있던 무언가가, 그순간 무너져 내린다-미쳐 눈치채기도 전에, 두 다리가 힘없이 풀린다.

단단한 마룻바닥에, 부서진 인형처럼 가만히 주저앉은, 겐타로의 피부 속으로 한기가 파고든다. 연결이 거의 끊어진 것처럼, 심장을 날카롭게 후벼 파는 고통이 머릿속을 온통 차지해서, 주변에서 다가오는 진동은 전부 거부한다.

찬란하고 아름다운 빛, 알록달록한 종잇조각, 맛있는 음식의 군침도는 냄새, 전부 한데 어우러져서, 따뜻한 친절을 보여준 동료-어쩌면 친구, 라고 생각할 정도로 소중한-두 사람을 생각나게 했지만…이제는 깊어져가는 공허함밖에 남지 않아서, 눈빛이 어둠에 물들어, 단 한점의 빛도 허락하지 않는 색으로 흐려진다.

그래서, 흑백의 세계에 홀로 남겨진 채, 울고, 계속해서 울고, 어느새 우는것마저 잊어버린다.


시계가 째깍인다. 하늘은 계속해서 수만가지의 빛깔로 번진다. 구름은 드넓은 파랑에 자리를 잡다가 때가 되면 흩어진다. 해가 뜨고, 지고, 모든 것이 반복된다.

굳게 닫힌 문 너머에서 그 순환을 몇번이나 계속했는지 겐타로는 회상하지 않는다.

월초에 마지막으로 만난 후, 한동안은 다이스나 라무다에게서 온 연락이 없어서-아니면 그저 깜빡이는 핸드폰 불빛을 무시하기로 한건지, 확실하지 않지만-무시는 한없이 자연스러웠다. 과분할 정도로 친절한 호의를, 매정하게 거절해서, 둘이 보여준 우애를 망쳐버리자-처음 있는 일도 아니잖아, 라고 조용히 생각하면서-아이러니한 미소를 짓고, 나같은 걸 상대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절대로 미친 사람밖에 없을거라면서, 사색에 잠긴다.

그래도, 자신을 키워준 노부부에게서 온 전화는, 받지 않는다면 더욱 걱정하실 테니까, 받았다: 위안되고 기운을 북돋아 주는 말들을 건네셔서, 제한없는 환영을 갈망하는 이기심에, 겐타로는 집에 돌아와서 잠시동안 있으라는 제안을 거의 받아들인다-하지만 가면을 벗지도 떨어지게 내버려두지도 않아서, 너무나도 많이 연습한 미소를 곁들인채, 안심되는 답변만 남겼다. 지금까지 갚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은혜를 입었으니까, 이미 무거운 어깨에 또다른 짐을 얹을 필요는 없겠지.

나중에서야, 화면이 검은빛으로 흐려지는걸 바라보면서, 놀랄만큼 간단한 일이었다는걸 깨닫는다-물론,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한 사람들이란걸 고려해야 하지만서도.

하지만 그 말은 가장 많은 거짓말을 한 사람들이란 뜻이란것도 곧바로 기억해낸다.

이제 시선은 벽에 걸린 작은 달력으로 옮겨져서, 빨간 동그라미가 거칠게 그어진 날짜에 집중한다. 기한은 마치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무자비한 시간의 흐름을, 모든 것은 언젠가 끝에 다다른다는 진실을 일깨워준다-

부딪혀 무너지는 공포의 파도를 밀어내고선, 다시 기어오른 잡생각들을 파묻는다. 거의 본능적으로, 손은 근처에 있는 펜을 찾아 움직여서, 손가락에 묻은 빨간색과 하얀색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마치 써내린 모든 단어가, 더이상 느껴지지 않는 모든 고통 한방울이, 무너져내려가는 벽을 붙들고 있을거라고 믿는것처럼, 펜을 꼬옥 움켜쥘 뿐이다.

조금만 더 오래 이 동화속에 빠져 있어도 괜찮을까.

시계는 째깍이고, 손을 거의 리듬에 맞춰서 까닥거리자, 펜은 종이 위에서 미끄러지며, 생각은 눈앞에 보이는 글자에만 집중한채, ‘그들’을 위한 마지막 동화를, 피곤한 것도 잊고 자아내다가, 현실의 마감 시간을 맞춘다.

기한이 다가오기 전에 최소한 해피 엔딩에 다다를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몇번이고 그렇게 빌었건만, 그 날은 기어이 오고야 말았다.

해는 지평선을 깨고 올라와서, 햇빛은 어두컴컴한 방안으로 스며들고, 목숨줄을 쥐고 있던것처럼 꽈악 져서, 욱신거리는 주먹을 드디어 피고, 떨어지는 펜과 함께 책상에 쓰러지는 작가를 비춘다.

겐타로가 기절했다는걸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어서, 즉시 잠이 싹 달아나서 벌떡 일어나, 필수품을 챙기고, 엉망진창인 꼬락서니를 충분히 격식있을 정도로 다듬으면서, 무서울 정도의 속도로 방안을 뛰어다닌다-하마터면 본능적으로 자신의 평상복을 꺼내 입을 뻔했다가, 달력 위 선명한 빨간색이 눈에 들어오자, 검은 옷을 꺼내 차려입는다.

머릿속은 온통 기진맥진 해서, 왜 서둘러야 하는지 잊어버릴 정도로 흐려지지만, 책상 위 원고를 가지런히 정리할 동안, 거의 읽을 수 없는 글씨체가 눈에 들어와서, 공포가 돌아오는걸 자각하면서도, 고통스러운 미소를 애써 억누를 뿐이다.

종이에서 단어를 짜내면 그 말이 그대로 이뤄질거라고 믿어서, 겐타로는 온힘을 다해서 종이를 쥐다가 서둘러서 발걸음을 옮긴다. 수작업을 하느라 방치해뒀던 두 다리는 격렬히 저항하지만서도.

두렵지만,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은 날.

살짝 숨이 찼지만, 그래도 제시간에 장소에 도착했을 때 겐타로는,  소생은 괜찮다면서 자기 자신을 거의 납득시켰다. 자동적으로 환영의 인사-몇개는 다른것보다 좀더 길었다-를 건네면서, 침착하고도 부드러운 미소의 가면을 쓴채, 안심과 격려를 단어 사이사이에 엮는다-

하지만 답변으로 비슷한 말들 대신, 감사의 말들을 받는다.

여러 ‘고맙다’는 계속해서 다가오고, 그러다가 마침내, 아이의 어머니와 얘기할 때, 몸이 덜덜 떨리는데도 밝은 미소로 맞아 주시는 친절한 분이셔서, 별 생각 없이 혀끝에서 걱정의 질문이 굴러 떨어진다.

“감사받을 만한 일은 하지 않은거 같은데요…”

문장이라기 보단 질문에 가까운 형태로 흘러나왔지만, 그래도 의도를 이해하신것 같아서, 고개를 저으시더니 곧바로, 미소가 살짝 바랬지만서도, 아까 전보다 훨씬 진심 어린 대답을 하신다:

“아니야, 겐타로… 아이를 웃게 해줘서, 고맙구나.”

왜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그 무엇보다도 세게 치고 지나간 한마디.

머리 한구석은 단순히 허울뿐인 말일거라고 말하지만, 그래도 그 한마디는 자신을 붙잡더니,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깊숙히 파고든다. 잠시동안 할 말을 잃어서, 숨이 막혀서 목이 메어 온다-

하지만 놀랍게도 두 뺨은 젖지 않는다.

어쩌면 이제 더 이상 흘릴 눈물도 남지 않은 걸까.

나눌 말이 더이상 없을 때에야, 주변의 공기가 침묵의 안락에 잠겨서, 홀의 한가운데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익숙한 얼굴이 들어올때까지 무겁고, 불안정한 걸음을 옮기기 까지 마지막으로 남은 용기 한방울까지 짜내야 했다. 아이의 두 눈은 감겼고, 그 어떤 기억보다 평화로운 표정을 지었다-그리고 어쩌면 피곤의 부작용일지도 모르지만, 입가에서 작은 미소가 피어나는게 언뜻 보인다.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자신을 깨워서 데려갈 운명의 기사님을 기다리는 동안 잠든 것처럼.

하지만 수많은 말들을 지어내고 비틀어서, 현실에 엮어낼 수 있기만을 간절히 바래도…진정한 사랑의 키스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수만가지의 ‘만약’과 ‘이랬더라면’과 ‘절대 일어날 수 없던 것’들 뿐. 그래도 약속은 영원한 법이고, 자신의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켜져야 하니까, 찾는걸 그만둘 수 없다.

겐타로는 종이를 가지런히 접어서, 주변을 건드리지 않을려고 조심스럽게, 주머니 안에 집어넣는다. 그러고선 그 순간이 허락한 만큼, 가능한 한 가까이 기대어, 정적에 숨을 참고선, 거의 들리지 않는 속삭임으로, 마치 친구에게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십몇년 된 둘의 이야기에 이별을 고한다.

“그 곳에선 더이상 고통받지 말고, 아프지 말고, 편히 잠들기를 빌게요, 소생의…친구.”

그 말이 혀끝에서 굴러떨어져서, 하마터면 이런 순간에 마지막 거짓말이 흐트러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다시 삼킨다-적어도 친구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을 뿐, 딱히 다른 미련이 남은건…

겐타로는 작은 기침을 내뱉어서, 기침 소리에 생각의 고리를 끊고, 마지못해서 시선을 돌린다.

나머지 문상이 진행되고, 이어서 장례식이 거행될 동안, 차마 아이의 얼굴을 다시 마주볼 수 없었다. 기억에 활기 넘치던… 순간들만 남아 있기를 바라는건, 유치하고 불가능한 바람이란걸 알고 있었지만, 꼭 이뤄지길 간절히 바랬다-이런 상황이라면, 자신을 둘러싼 검은 바다의 미세기에 휩쓸릴 동안엔, 이기적으로 굴어도 괜찮지 않을까.

이 상태로 얼마나 긴 시간을 흘러보냈는지 인식조차 하지 못했지만, 묘지의 침묵 한가운데, 해가 서서히 회색 벽 너머로 사라질 동안, 산들바람이 불어올때에야, 수만번을 연습해왔던 미소를 드디어 벗어 던진다.

어느새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것도 눈치채지 못한채, 하카마의 주름을 더럽히는 진흙은 무시하면서, 익숙한 이름 옆에 웅크린다.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고, 묘석 옆에서 춤추는 작은 촛불을 건드리지 않을려고 조심하면서, 얇은 종이를 펼치는동안 떨리던 손이 안정된다. 손에 쥔 것은 다름아닌, 두 친구 사이의 약속이 자아낸 동화의 해피 엔딩이 담긴, 이야기의 마지막 페이지.

통제할 수 없는 힘에 가로막혔지만, 몇번이고 계속해서, 단 한번의 실패도 없이, 다시 만날 수 있었던 왕자님과 공주님의 이야기.

흔해빠진 이야기지만, 그래도 약속했으니까.

촛불에 종이를 가져다 대니, 종이는 불길에 휩싸여 검은 재로 변해서, 화마가 자신에 단어를 집어삼키는걸 바라볼 동안, 열기는 예리하면서도 기묘할만큼 안심이 되는 온기를 발산한다. 행복해야 하는데, 만족과 안도의 파도가 몰려와 자신의 생각을 비춰서, 씁쓸한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안에 담긴 말들은 마음과 영혼간의 정교한 균형을 이뤄서, 그 어떤것도 대신할 수 없는 힘을 가져온다.

틀림없이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무기리라.

하지만 수백 수천 가지의 만약의 마지막 페이지를 바라보자, 전생의, 현생의, 내세의 해피엔딩의 마지막 글자가…마음과 영혼을 쏟아부은 글자가, 그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소비될 동안, 불현듯 깨닫는다:

말에는 힘이 있다고 하지만, 아무리 강한 힘이라 하더라도, 절대 현실을 바꿀 수는 없다.

왜 그말이 옳다고 믿었는지 이젠 모르겠다.


“……”


“…어째서?”




어째서 이 일이 일어나야만 하는 거지?


어째서 이 세상은 이렇게 잔인한 거지?


어째서 그렇게나 밝고 찬란하던 존재가 세상에서 뜯겨나가야만 하는 거지?


어째서 이 마음의 공허함을, 애초에 처음부터 아무 상관 없었다는듯이 사그라들거였으면, 채워야만 하는 거지?



“보고 싶어…” 떨리는 숨결 사이로 새어나가는 한 마디. 온 몸에 퍼져나가는 모든 떨림은, 그동안 필사적으로 무시하려 했던, 깊어져만 가는 외로움을 강조할 뿐이다.

바로 그 순간, 마치 겐타로의 현 상태를 비추듯이, 어쩌면 비웃듯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옷이 비에 푹 젖어,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가 더해져서, 이미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더욱 떨게 한다. 하지만 움직이려는 기색조차 내지 않고, 빗방울이 뺨의 습기와 섞이도록, 고개를 살짝 기울이기만 했다-만에 하나, 이 상태로 가능한 한 오래 있는다면, 고통도 비에 씻겨나갈 수 있는걸까.

하지만 비는 갑자기 멈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주변에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는다.

흐릿한 시야 너머, 무언가가 거무튀튀한 회색을 막아서, 초점이 점차 돌아오자, 다시 한번 익숙한 파란색과 분홍색이 눈에 들어온다-

“…여긴 어떻게…?”

질문을 내뱉으면서도 소매에 다시 얼굴을 파묻는다. 둘다 질문을 들었다고 확신할 수 있지만, 둘 중 한명도 대답하지 않는다-대신, 억센 손과 가는 손이 어깨를 잡고, 품안으로 잡아당기더니 꼬옥 껴안아서, 그리워하던것도 잊어버렸던 온기에 둘러쌓인다.

그러자 말없이 인정하는 콧노래만이, 마치 겐타로에게 우리가 있음을 상냥하게 일깨워주려는 것처럼, 공백 내에 감돌아서, 어느덧 이미 오래 전에 부서졌어야 했을 둑에 마지막 금이 간다.

파도가 부서진다.

한참 동안 그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으면서, 이 임시적인 은신처 내의 둘의 존재에, 오직 고른 숨소리와, 떨어지는 빗방울과, 거의 하나되는 심장 박동만이 한데 어우러질동안, 겐타로의 흐느낌은 시나브로 소리없는 딸꾹질이 되고, 드디어 떨림이 멈춘다.

그리고 현실이 존재한다는게 여전히 고통스러울지라도, 이제 자그마한 온기가 퍼져서 공백을 채워나가기에, 본능적으로 안식을 찾아서 품 안으로 깊이 파고들동안, 영겁같던 시간동안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가 피어나고, 겐타로는 혼자가 아니라는걸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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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https://archiveofourown.org/works/15763491

Thank you so much for beautiful masterpiece and permission to translate it, Maina!

원제는 'Reflected in Our Eyes'


이젠 세는거도 슬슬 지치지만, 40페이지, 7000단어, 공백포함 30435자, 공백미포함 23774자라는 신기록을 또 세웠네요. 하핫!

제발 당분간은 깨지지 않을 기록이면 좋겠습니다


액자식 구성+대구對句+동화풍 압운법이라는 말이 안되는데 되는 삼신기 크로스. 번역러 인생에서 신세계를 보았습니다

여전히 망한 캐해석. 영어로는 겐타로 특유의 말투를 살릴수 없으니까...는 그냥 핑계

후반부 절반을 차지하는 난해한 문체는, 동사의 사용을 최대한 배제하고 주어를 수식하는 형용사/분사 위주의 문체는, 나름의 개성이랄까, 상황을 한장 한장 사진처럼 찍어 앨범을 만드는 것처럼 서술한다는 거창한 해설...도 그냥 핑계(죄송하지 않지 않지 않습니다)


긴말은 안할게요. 다이겐은 참사랑을 하고 있다 이것만 기억해 주세요!


첫번째 영상은 겐타로가 아주 어렸을 때 찾아왔다.  


항상 최고의 웃음과 미소를 선사했던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사랑했다. 그래서 스스로 이야기를 짓고 싶었다. 바로 그 순간, 머릿속에서 한 편의 동화가 너무나도 빨리 펼쳐졌다, 마치 꿈의 한 장면처럼:


(제 1장. 공주님과 무사님)


옛날 옛적에, 공주님과 무사님이 있었습니다.


공주님은 왕국에서 가장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변 귀족들로부터 잔혹한 솔직함으로 존경받았고 백성들로부터 순수한 진실됨으로 찬양받았죠. 그리고 공주님은 진실을 말하는걸 좋아했습니다. 사실인 걸 부정할 이유를 찾지 못했거든요. 어쩌면 진실을 말하는건 공주님의 일종의 재능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마치 그들의 삶을 다룬 소설을 한장한장 넘기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쉽게 읽을 수 있었던 것처럼요.


무사님은 왕국에서 가장 주의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동료 무사들로부터 신중한 전략으로 존경받았고 서민들로부터 무사도 정신으로 찬양받았죠. 그리고 무사님은 안전책을 따르는걸 좋아했습니다. 불필요한 위험을 무릎쓰는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거든요. 어쩌면 안전책을 따르는건 무사님의 일종의 능력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마치 카드 게임을 하는 것처럼 위험과 확률을 쉽게 계산할 수 있었던 것처럼요.  


그래서 운명의 붉은 실은 둘을 한데 묶었습니다. 왕국 최고의 무사에게 사랑스러운 공주님을 지키게 하는건 지극히 당연했으니까요. 유능하고 믿음직스럽고, 완벽한 무사님에게 왕국의 가장 소중한 보물인 공주님과 미래를 맡기는건 지극히 당연했으니까요.


하지만 겐타로가 새로 찾은 작문의 뮤즈에게 이야기를 계속해달라고 몇번이고 간청해도, 동화는 끝나가는 노래처럼 단호하게 끊겼다. 자신이 직접 쓴 이야기를 하길 기대했다가, 머릿속에서 이야기를 끝맺지 못하자 실망에 볼을 부풀리고, 결국엔 포기하고 다른 이야기를 쓰겠다고 마음먹은걸 기억했다. 아예 새로운 이야기를 처음부터 지어내는건 훨씬 어려웠지만, 그래도 최소한 끝맺을 수는 있었다.


첫번째 이야기는 머릿속에서 더욱 생생했던걸 기억했다. 멈춰서 자신을 우울하게 한건 화났지만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야기를 써내리고선 어린 나이에는 최고라고 생각했던 “공주님과 무사님”이란 유치한 제목을 붙였다. 꿈이 다시 되풀이되지 않을 때를 대비해서, 제목을 잊지 않도록 연필을 꾹꾹 눌러 적었다.   


만의 하나 다시 반복되지 않았다 해도, 절대 잊어버리지 않았다는걸 깨닫는건 한참, 한참 후의 이야기.


두번째 영상은 겐타로가 평범한 날에 집에 있었을 때 찾아왔다.


자신을 입양한 노부부는 방 건너편의 소파에 앉아있었다. 그대로 깜빡 잠들 것처럼 서로 껴안은채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잠들었다고 말하기엔 너무 활짝 웃고 있었다. 그리고 겐타로는 그들의 웃음에서, 그들이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는지를,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강한지를 읽어내었다. 바로 그순간 그리고 그곳에서 영감의 폭발이 -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 해일처럼 덮쳐왔다.


(제 2장. 마음의 즐거움)


무사님은 공주님의 근심 걱정 없는 태평함이 걱정되었습니다.


마치 전쟁 중인 두 나라 중 한 나라의 공주님이 항상 무사해야 한다는걸 알지 못하는것 같았거든요.


마치 처음부터 호위무사가 따로 임명되었다는게 얼마나 막중한 상황인지 깨닫지 못하는것 같았거든요.  


마치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공주님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는걸 유념하지 못하는것 같았거든요.


그리고 마치 공주님이 중요하다는걸, 정말로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는걸 이해하지 못하는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공주님이 그렇게 행동할 때마다 체념한듯 한숨을 내쉬고선 다시 설명하려는 헛수고를 들였습니다.


공주님은 무사님의 극도의 헌신이 우스꽝스러웠습니다.  


당연하다는 듯이 정원에서 산책할 때마다 손을 잡고 호위할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당연하다는 듯이 계단을 내려올 때마다 안겨서 내려올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당연하다는 듯이 침실로 돌아갈 때마다 좋은 꿈 꾸라고 말할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호위무사라고 해서, 문자 그대로 목숨을 바쳐서 지키고 싶어하는 것처럼, 열정으로 불타는 눈을 할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무사님이 그렇게 행동할 때마다 태평한듯 웃고선 그 걱정을 가볍게 떨쳐냈습니다.


재밌어서, 맘에 들었다고 말할 수 없을 때까지 공주님은 웃고 또 웃었습니다.


머릿속에서 영상이 끝나자, 겐타로는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걸 드디어 눈치채자 팔을 벌려서 안기기를 재촉하는 부모님을 보았다. 그러자 재빨리 달려들어서 품안에서 녹아내렸다. 그대로 그곳에서 잠들어버린걸 기억했다.


그날 오후 할머니의 이부자리에서 깨어났다. 이불에서 기어나와서, 크레파스와 종이를 찾아서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을 그려보려고 했다. 공주님의 머리를 자신과 똑같은 갈색으로 칠한걸 기억했다. 무사님의 어두운 머리를 칠하려고 검은색 크레파스를 찾아서 온 집안을 이 잡듯 구석구석 뒤진걸 기억했다. 이미 공주님의 머리를 크레파스로 칠했으니까 잉크를 쓰는건 결사 반대한걸 기억했다.


마지못해서 검은색 대신 파란색 크레파스를 집었던 걸 기었했다.


세번째 영상은 겐타로가 학교 첫날을 맞이했을 떄 찾아왔다.


별로 현실에 머무르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현실의 사람들이 밀쳐낼때 환상의 나라로 빠지는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영감의 파도에 휩쓸리도록, 원하는 대로 정처없이 떠돌도록, 그저 흐름에 몸을 맡겼다.


(제 3장. 우리의 눈에 비친 것)


어느 날, 공주님은 서로의 눈에 무언가가 비친걸 눈치챘습니다.


만약 거울에 비친 자신을 조금만 더 오래 바라만 봤어도 눈치챘겠지만, 그런 유형의 사람은 아니어서, 대신 가족들의 초상화가 걸린 복도를 걸을때 비로소 눈치챘습니다. 캔버스를 가로지르는 붓놀림의 질감에 감탄하다가 그림속의 자신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공주님의 눈은, 무사님의 눈에 비친 색으로 빛났습니다.


완전히 동일한 색조는 아니었지만, 틀림없이 똑같은 색상이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빙그르르 돌아서 재빨리 왔던 길을 다시 걸어 내려오면서 치맛단을 살짝 들어올렸습니다. 무사님은 곁에 바싹 따라붙어서 박자를 놓지지 않고 걸음을 맞췄습니다. 공주님은 처음엔 전광일뿐, 아무것도 아닐 거라고 가설을 세웠지만, 기억을 되살리자 이 빛깔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눈에 선명히 서려 있었고, 자랄수록 더욱 밝아진걸 눈치챘습니다.


잔뜩 걱정되어서, 무사님은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공주님은 미소지으면서 발견한 걸 무사님에게 말해줬습니다. 하지만, 무사님은 조금 전 공주님이 그랬던 것보다 극구 부인했습니다. 확인해보려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아도, 단순히 서로의 눈 색이 반사된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도, 공주님의 초상화는 정반대의 것을 말하고 있다는 걸 보면서도 계속 그렇게 말한다는건…


불현듯 공주님은 무사님이 좀 바보같다는걸 깨달았습니다.


둘의 시선이 우연히 다시한번 마주치던 나날, 둘의 거리가 가까웠던 나날, 너무 오래 서로를 바라보던 나날이 지나고 나서야 무사님은 비로소 전광이나 반사광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어느 날, 드디어 무사님은 공주님 말이 맞다고 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일지 속으로 궁금해하면서요.


바로 그 날, 공주님은 서로가 천생연분일지도 모른다고 농담했습니다.


어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그 생각에 정말 행복하게 들릴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는데 말이에요.


그리고 무사님이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는데 말이에요.


펜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머릿속에서 영상이 끝나자 비로소 현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눈치챌수 있었다. 쨌든 본인이 시작한 이 흥미로운 이야기는 본인이 원할 때마다 끝났으니까. 펜을 집어올리면서 궁금해할 수 밖에 없었다. 혹시 나도 천생연분이 어딘가에 있는걸까?


씁쓸한 웃음과 함께 그 생각을 즉시 떨쳐냈던걸 기억했다. 만약 그렇다면 뭘 하려고? 자신의 색을 찾아서 학우들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려고?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 사람을 찾아서 시부야 길거리를 방황하려고? 애초에 허황된 이론이었으니까 그 망상을 포기한걸 기억했다. 물론 눈 색이 겹치는 경우는 이 세상에 차고 넘쳤으니까, 이런 천생연분 이야기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은… 바보나 다름없을테니까.


네번째 영상은 겐타로가 교실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때 찾아왔다.


지금처럼 평화로운, 일이 없는 방과후였다. 이런 시간을 글을 쓰는데 전념해서, 지금쯤은 취미가 되어있었다. 저녁놀을 바라본땐 곁에 있는게 영감의 파도뿐이어도 충분했다.


(제 4장. 진실의 순간)


호위무사가 필요없을 때마다, 무사님을 찾았습니다.


홀로 남겨졌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무사님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저 누군가가 옆에 있기를 바랄 때마다, 무사님을 떠올렸습니다.


주변에 호위무사가 있는게 익숙해진걸까요?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무사님이 위험천만한 임무를 완수하러 떠날 때마다, 무사님이 끝없이 걱정되었습니다.


다른 무사들이 시중들 때마다, 무사님이 격하게 그리워졌습니다.


만약 자신이 교체된다면 어떨까요, 라며 무사님이 농담할 때마다, 무사님을 위해 맞서 싸우고 싶다며 소원하였습니다.


깨달았습니다. 주변에 호위무사가 있는게 익숙해진게 아니라는걸요.


무사님이 있는게 익숙해진거였어요.


아니,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난데없이 서로의 눈이 마주칠 때마다, 천생연분 일지도 모른다면서 농담한걸 떠올리면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었습니다.


우연히 서로의 손이 스칠 때마다, 손가락을 엮고 싶다고 생각하면 뺨에 온기가 퍼졌습니다.


무사님에게 수호되어 팔에 안기고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심장이 콩닥거리다가 터져 버려도 좋으니까 이 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이라는 소원을 품었습니다.


아니, 그건 옳은 답이 아니었습니다.


깨달았습니다. 무사님이 있는게 익숙해진게 아니라는걸요.


왜냐면 지금, 익숙하지 않은 것마저 찾고 있으니까요.


겐타로가 혼자 있을때마다 이야기가 함께했다. 이렇게 방과후 뿐만이 아니라, 점심시간, 일터까지 걸어갈 때, 다른 사람이라면 친구들과 함께할 주말까지 – 다시 말하지만, 혼자 있을 때마다 이야기가 함께했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보냈다.


공주님과 무사님은 자신을 미소짓게 만드는 최고의 이야기였다. “망설임과 정직함의 설화”가 더 나은 제목일거라고 생각하면서 미소지었던걸 기억했다. 완벽한 제목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웃었던걸 기억했다. 맞다, 그 이야기 덕분에 때때로 웃을 수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외로웠다.


섯번째 영상은 겐타로가 친구따윈 필요없다면서 내민 손을 쳐낸 지 오래 지나지 않았을때 찾아왔다.  


자신의 행동의 여파에 홀로 남겨지자 수만가지 생각과 감정이 눈보라처럼 정신없이 몰아쳤다. 답변에 대한 타당한 해명. 그 소년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자신을 납득시키려 했던 시도. 두번째 거짓말을 내뱉었다는 참담한 자각. 그리고 자신이 쓴 이야기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들과 정직한 사람들과 천생연분-


(제 5장. 기구한 운명)


공주님과 무사님이 사랑에 빠지는 건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둘의 사랑은 덧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아니, 그렇게만 보였습니다.


왜냐면 사람들이 공주님을 봤을때, 사랑에 빠진 모습에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진실이 담긴걸 눈치챘거든요. 공주님이 천개의 태양을 품은 미소로 무사님을 바라볼 때 그 사랑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악역이 될 수 는 없었습니다. 절대로, 그 광채를 파괴하는 악이 될 수 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신, 말할 수 없는걸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무사님을 봤을때, 무사님이 호위하는 모습에 오직 진심에서만 우러나올수 있는 정성이 담긴걸 눈치챘거든요. 무사님이 천개의 불꽃을 품은 열정으로 공주님을 바라볼 때 그 사랑을 갈라버리는 악역이 될 수 는 없었습니다. 절대로, 그 불꽃을 눈물짓게 하는 악이 될 수 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신, 서로 사랑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하지만 이것 말고도 공주님과 무사님에 대한 이야기는 많았습니다.


어쩌면 둘은 찰나의 순간 만나고 결국에는 다시 헤어지게 될 견우별과 직녀별 이었을까요.


-자신이 창작한 수많은 인물들, 선량하고 자신이 방금 한건 절대 하지 않을 인물들을 떠올렸다.

곧바로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뒤돌아보았던걸 기억했다. 그 소년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어떻게 말할수 있었을까? 그 소년에 대해서 뭘 알고 있긴 했었나? 친구가 되겠냐고, 정말 친절하게, 물어본것 말고 또 뭘 알았지? 몇마디만으로 세계에 빛을 가져다 준것 말고 또 뭘 알았지? 그리고 호의를 거절하자 미소가 사라지더니 고개를 푹 숙인채 떠난것 말고 또 뭘 알았지?


어쩌면 자신처럼, 쓸쓸하고 외로운 걸지도 모른다는 것만 알았다.


그 소년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게 전혀 아니란걸 깨달았다.


머리카락 몇 가닥을 만지작거리다가 이야기 속의 공주님을 떠올린걸 기억했다. 그렇게 진실된 사람하고 자신은 머리색을 공유할 자격조차 없다며 씁쓸하게 자책한걸 기억했다.


“사려깊고 진실된”이라고 제목을 새로 지었다. 그 자체로 빛이었던 소년을 떠올리게 되는 제목이었다.


여섯번째 영상은 겐타로가 병원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갈때 찾아왔다.


어째서 세상이 그렇게나 밝은 사람을 가둬두려고 하는지 절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단념하며, 삶의 불공평한 사실을 규탄하고선 정의와 해피엔딩이 나오는 이야기를 짓고 또 지었다. 친구를 울게 한 진실과 친구를 웃게 한 거짓말 사이에서, 어느 세계가 옳고 어느 세계가 그른지를 정의내리는 싸움이 아니였다. 머릿속에서 지어낸 이야기와 멋대로 떠오르는 이야기 둘다 파도처럼 몰려와서, 현실의 기슭에서 떠내려가게 휩쓸었으니까, 그 사이에서 떠돌도록 흐름에 몸을 맡겼다.


(제 6장. 거짓말의 시간)


만약 공주님을 한 마디로 정의해야 한다면, 단연 정직하다는게 아닐까요.


공주님은 자신의 감정에 정직했습니다. 물론 마음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의 감정에도 정직했죠. 정말, 정말로 정직해서, 눈먼듯이 마음가는대로 발걸음을 옮기다가, 무사님에게 완전히 맡길려고 결심할 정도로 마음을 키웠습니다.


무사님을 향한 감정에 정직해서, 넘처흐르는 마음을, 어느날 전부 쏟아부었습니다.


만약 무사님을 한 마디로 정의해야 한다면, 단연 신중하다는게 아닐까요.


무사님은 공주님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할려고 신중했습니다. 물론 공주님의 감정에 반응할때도 신중했죠. 정말, 정말로 신중해서, 공주님의 심장을 조심스럽게 손에 품었다가, 자신의 심장과 함께 뛰게 할 정도로 박동을 외웠습니다.


공주님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신중해서, 잠시동안 사실은, 똑같은 감정을 품었습니다.


사랑의 날의 밤, 공주님은 여태까지 그랬던 것중 가장 정직했습니다. 자신의 사랑은, 무사님을 위해서, 꼭 구현하고 싶은 진실이라고 결정내렸습니다. 그래서 손을 잡고, 눈을 바라보고-밤동안 곁에 있어달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사랑의 날의 밤, 무사님은 여태까지 그랬던 것중 가장 신중했습니다. 자신의 사랑은, 공주님을 위해서, 감당할 수 없는 도박이라고 결정내렸습니다. 그래서 손을 빼내고, 눈을 피하고-공주님을 방에 홀로 두고 떠났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주님은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었습니다. 둘 사이에서 감정이 피어났다고 확신한게 진실이었을까요? 아니면 무사님이 방금 말한, 공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게 진실이었을까요?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사님은 최선의 선택을 한건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공주님을 지키기 위해 상처입히는 위험을 무릎써야 했을까요? 아니면 그 무엇보다도 공주님을 사랑하니까, 공주님을 지켜야 한다는 임무와 타협하는 위험을 무릎써야 했을까요?


만약 공주님과 무사님을 한 마디로 정의해야 한다면, 단연 오늘밤 두사람의 별이 드디어 만났다는게 아닐까요.


첫번째 이야기가 전개하기로 결정한 비극에 겐타로는 눈만 깜박거렸다. 친구도 공주님과 무사님이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어할까 생각하다가, 해피 엔딩으로 끝나면 말해주기로 다짐했다.


친구를 위해서–그리고 나중엔, 업으로 삼아서-이야기를 지으면서, 머릿속에서 훨씬 많은, 수천수만 가지의 영상을 겐타로는 보았다. 마치 전생의 기억같던 공주님과 무사님의 영상과 순수하게 만들어냈다고 확신한 다른 이야기들에서 나온 영상이 한데 어우러져 섞이던걸 기억했다. 작문 실력이 어떤 착상이라도 능숙하게 머릿속에서 그림으로 그려낼 정도로 발전한건지 궁금해한걸 기억했다.


틀림없이 이야기가 너무나도 엉터리였기 때문이였겠지만, 친구에게 누려야 마땅할 행복을 가져다주는 이야기를 작성할 수 있는 재능의 축복을 내려준 신님께 감사해한걸 기억했다. 마치 전생의 기억처럼 느껴질 정도로 생생한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는 재능에 감사해한걸 기억했다.


다음으로 찾아온 영상은, 첫번째 이야기를 들려준 뮤즈가 마치 마법과도 같아서, 다른 것과 착각하면 안된다는걸, 착각할수 없다는걸 겐타로에게 일깨워 주었다.


일곱번째 영상은 겐타로가 플링 포세에 가입했을때 찾아왔다.


다른 멤버들을 만난 바로 다음 순간, 혼자 남겨진 바로 그 순간에 찾아왔다. 지난 영상에서는 느끼지 못한 강렬함과 함께 닥쳐왔다: 마치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마치 잊어버린 시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마치 그 기억이 사그라들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제 7장. 치명적인 결점)

적국은 이 순간만을, 왕국 최고의 무사가 공주님을 구하기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불가능한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마침내, 비열하고 음흉한 계략이 성공했습니다. 한밤중에 공주님은 납치당했습니다.


무사들이 눈치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있었죠.


공주님을 잃는건 희망했던 것보다 훨씬 더 쉬웠습니다. 너무 신중하다는건 알았지만, 어느날 그게 위험을 초래할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공주님께 다가가고 싶었는데, 노력했는데, 몇번이고 노력했는데, 정말 노력했는데, 둘 사이의 거리 때문에 전혀 그럴수 없었습니다.


무사님은 위험을 무릎쓰는 법을 절대 배우지 않았습니다.


이제 온 나라가 값을 치르게 되었으니, 틀림없이 무사님의 잘못이었죠.


공주님을 심문하는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덜 어려웠습니다. 너무 정직하다는건 알았지만, 어느날 그게 재난을 초래할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왕국의 비밀을 지키고 싶었는데, 노력했는데, 몇번이고 노력했는데, 정말 노력했는데, 솔직한 반응 때문에 전혀 그럴수 없었습니다.


공주님은 거짓말하는 법을 절대 배우지 않았습니다.


이제 온 나라가 고통받게 되었으니, 틀림없이 공주님의 잘못이었죠.


처음에는 둘을 한데 묶었던 두사람의 최고의 특징이, 분명한 특징이, 타고난 특징이 이젠 둘을 갈랐습니다.


하지만 후회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있었죠.


새로운 동료들과 함께 있으면서, 익숙함이… 들었다. 영문을 몰라했던걸 기억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랬다. 단순히 시부야의 거리에서 자신의 이야기속 등장인물들을 이미 보았기 때문일까? 새로 찾은것 같아 보이는 이 불변성에서 더욱 나아간 기억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야기가 그랬듯 마법처럼 찾아와서 정말로 익숙하기 때문일까?


그만큼 별난 성격은 옷깃만 스쳐도 틀림없이 기억할거란걸 확신했으니까, 두 사람에 관한 기억을 더듬었던걸 기억했다. The Dirty Dawg의 전 멤버라고 들은걸 제외하면 아메무라 라무다에 관한 정보를 아무것도, 단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아리스가와 다이스에 관한 정보를 아무것도, 단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계속해서 공주님과 무사님의 영상이 회상을 방해했다.


여덟번째 영상은 겐타로가 새로운 동료들과 오후를 보낼때 찾아왔다.


다이스가 같이 도박하자고 라무다와 자신을 꼬드겼다가 환상적으로 패배한 다음 날이었다. 새 방에 누운채 머릿속에서 두 얼굴을 계속 재생하면서, 과거의 기억에 빠졌다. 변덕스러운 이야기를 떠올리면 늘 그랬듯이.


(제 8장. 첫번째 도박)


기밀 정보를 가져간 적군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였지만, 연인을 구하기 위한 각오로 불타는 무사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였습니다.


자신들이 불리한 점을 깨닫자마자, 무사님들은 작전을 바꿨습니다. 적군이 새로 찾은 이점을 약점으로, 이득이 되는 정보를 위험천만한 추측으로 바꿨습니다.


공주님을 어떻게 구했는지 무사님은 평생 잊지 못했습니다.


마치 세상이 단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원하는 것처럼, 둘의 사랑을 가로막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고 결정하기 전까지, 전쟁터의 폐허에서 둘의 눈이 마주친 걸, 서로를 향해 간절히 달려간걸, 입술이 느낀 재회의 맛은 완벽했던걸 무사님은 평생 잊지 못했습니다.


지금의 경우엔,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복수심에 불타는 칼을 든 적군이었습니다.


그순간 무사님에겐 시간이 한없이 느리게 느껴졌습니다. 선택지는 흑 아니면 백, 동전의 양면, 미느냐 아니면 당기느냐 뿐이었죠.


공주님을 가까이 끌어안은 다음 돌아서서 적군을 상대할 수 있었지만, 만의 하나 적군이 더 재빨리 움직여서 공주님을 다치게 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아, 그렇다면, 더이상 조심할 필요 없겠네요.


만약 공주님을 밀쳐낸다면, 공주님은 다치지 않겠지요. 그래서 무사님은 그것 외의 다른 사실은 신경쓰지 않으면서 그대로 했습니다. 설령 그러다가 칼끝에 가까워지게 된다 하더라더요.


옆구리를 찌른 칼은 무모함을 꾸짓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것이 순식간에 스쳐지나가서 고통스럽게 흐리멍텅해지는것 같았지만, 여섯가지 기억은 평생 또렷하게 기억에 남았습니다.


하나, 원수를 갚으려고 칼을 꺼내든 공주님을 기억했습니다.


둘, 재빨리 곁으로 달려와서 울부짖고, 사과하고, 간청하고, 제발 곁에 있어달라고 빌던 공주님을 기억했습니다–


셋, 이 감정을 기억했습니다. 공주님을 사랑한다는걸, 정말 많이 사랑한다는걸요.


넷, 이렇게 생각한 것을 기억했습니다. 아, 그날밤은 공주님의 곁에 있었어야 하는건데, 그랬더라면 공주님을 지킬 수 있었을 텐데.


다섯, 이렇게 생각한 것을 기억했습니다. 아, 조심하는 대신 도박을 했어야 하는 건데, 그랬더라면 지금 공주님이 슬퍼하지 않을 텐데.


여섯, 후회한 것을 기억했습니다. 만약 좀더 무모했더라면, 공주님의 곁에 있을 수 있었을텐데, 만약 세상에서 가장 무모한 사람이었다면–


공주님의 품에서 마지막 숨을 거둔 순간, 그것이 바로 무사님의 마지막 소원이었습니다.


겐타로는 차오르기 일보 직전인 눈물을 닦아 내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읽다가 운 적은, 자신의 이야기속 인물들에게 공감돼서 운 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어째서 공주님의 눈물을 대신 흘리고 있는거지?


최근 들어 영상들이 빨리 찾아오는게 조금은 즐거웠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되었던걸 기억했다. 이번건 특히 이야기의 끝을 향해 서두르는 것 같았다. 끝없는 여정에서 거짓말만 채집할 줄 알았는데, 이 마법같은 이야기가 있었고, 친구와 친구를 미소짓게 만들 임무가 있었고, 팀과 목적이 있었고, 그중 어느 하나라도 멈추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


마지막 영상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찾아왔다.


아홉번째 영상은 오늘로부터 조금 전에 찾아왔다.

오늘 아침 곤경에 처한 자신을 도와달라는 다이스의 전화를 받았다. 그래도, 자신의 상황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겐타로가 뭘 해줘야할지에 집중하긴 했다.


다이스가 필요한 것만 전부 알려줬으니까 별도의 해명은 필요 없었다. 그래서 현관을 나서기 전 돈다발이 두둑히 든 가방으로 무장했다. 그러자 길을 걷는 도중 영상이 들이닥쳤다-


(제 9장. 첫번째 거짓말)


왕실 무사들의 죽음은 온 나라를 절망에 빠지게 했지만, 사랑하는 국민들과 진정한 사랑을 잃은 공주님의 비탄에 비교할 수 는 없었습니다.


공주님이 성공적으로 구출되어서 국민들은 크게 안도했지만, 공주님 본인은 그 누구도 자신의 귀환을 축하하는걸 원치 않았습니다. 살아있음에 감사했지만, 국민들의 죽음은 그 감사를 죄책감으로 바꿨습니다.


무사님이 자신을 어떻게 구했는지 공주님은 평생 잊지 못했습니다.


절대 잊지 않을거란걸 확신했습니다. 고독의 나날이 지나도, 애도의 다달이 지나도, 비탄의 해들이 지나도-다음 생에서도, 절대 잊지 않을거란걸 틀림없이 확신했습니다.


이제 세상이 뭘 바라는 걸까요? 이제 더이상 의미없는 이야기에서 무슨 역할을 연기하길 원하는 걸까요?


무사님이 죽었을때 공주님의 세계도 멈췄습니다. 오직 왕국이 기대하는 의무만을 이행하기 위해 기능하면서, 공허하지만 무거운 마음으로 남은 나날들을 살아갔습니다.


공주님은 모두가 눈치챘고, 모두가 걱정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왜냐면 당연히 그럴 테니까요. 하지만 어느날 괜찮냐는 질문을 받았을때, 공주님은 모든걸 한꺼번에 깨달았습니다: 괜찮지 않더라도, 계속 슬퍼하고 싶더라도, 진실된 감정을 계속 느끼고 싶더라도, 괜찮아야 한다는 걸요-


아, 그렇다면, 더이상 정직할 필요 없겠네요.


만약 약점을 보여준다면, 온 나라가 공주님과 함께 무너지겠지요. 그래서 공주님은 그것 외의 다른 사실은 신경쓰지 않으연서 거짓말했습니다. 설령 그러다가 마음의 문을 영원히 잠궈버리게 된다 하더라도요.


곧 닫아버릴 마음을 치유하는 대신, 그리고 슬슬 발걸음을 옮기는 대신 공주님은 즉시 왕국에게 필요한 지도자로 변했습니다. 왜냐면 보다시피 여전히 이 이야기의 공주님이었으니까요. 왜냐면 보다시피 여전히 이 왕국의 미래였으니까요.


거짓말에서 재빨리 피어난 왕국의 높은 사기는 공주님의 부정직함을 비웃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공주님은 거짓말했고, 계속 거짓말했고, 거짓말에다 거짓말을 반복했습니다:


네, 괜찮아요. 아뇨, 걱정할 필요 없어요.


네, 밤마다 우는거 아니에요. 아뇨, 슬퍼하는거 아니에요.


네, 이웃 나라의 왕자님을 사랑하니까요.


뇨, 왕자님의 나라와 동맹을 맺는다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에요.


네, 공허한 마음에 죄책감이 넘처흐르더라도 살고 싶어요.


아뇨, 지금 이대로도… 행복해요.


인생이 전부 날조되어서 흐리멍텅해지는것 같았지만, 여섯가지 후회는 평생 또렷하게 기억에 남았습니다.


하나, 바로 그날밤 용기를 낸걸, 무사님에게 고백할 용기를 낸걸 후회했습니다.


둘, 천생연분일지도 모른다며 농담한걸 후회했습니다. 어쩌면 운명에 간섭했던걸까요.


셋, 그냥 무사님을 사랑한걸 후회했습니다. 최후의 순간에 구하지도 못했으면서 무책임하게 사랑한걸 후회했습니다.


넷, 이렇게 생각한 것을 기억했습니다. 아, 무사님이 곁에 있어서 좋았다고 한건 거짓말이었다고 했어야 하는건데, 그랬더라면 즉시 다른 사람으로 교체됐을텐데.


다섯, 이렇게 생각한 것을 기억했습니다. 아, 처음부터 거짓말했어야 하는건데, 그랬더라면 자신의 곁보다 훨씬 안전한 곳으로 보내졌을텐데.


여섯, 후회한 것을 기억했습니다. 만약 좀더 거짓말했더라면, 무사님이 살 수 있었을텐데, 만약 세상에서 가장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다면–


이 세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둔 순간, 그것이 바로 공주님의 마지막 소원이었습니다.


영상이 끝나자 자신의 마음을 단단히 굳혀야 했던걸 기억했다. 단순히 공주님과 무사님이 둘 다 죽었기 때문은 아니었지만, 왜 때문인진 몰라도 그 장면은 마지막처럼 느껴졌다. 그 전에 찾아오던 영상들에선 예상하지 못한 결망이었다. 마치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누군가의 최후의 기억처럼 느껴졌다.


그럼 정말 그런건가? 이게 정말 어릴때부터 써오던 이야기의 끝인가? 이게 정말 어린아이일 시절부터 머릿속에서 이야기를 속삭이면 영감의 끝인가? 이게 정말 모든 것의 끝인가? 생각만 했을 뿐인데도 마음 속에서 공허함이 자라났다. 그리고 이야기에 거짓말을 엮어 자아낸 실로 공백을 채울수 있기를 바랬지만, 절대로 완벽히 같지는, 절대로 그만큼 환상적이지는, 절대로 전생의 기억의 파편을 떠올리는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겠지.


그래도 어쩌면 이 비극적인 이야기가 막을 내린건 좋은 일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공주님과 무사님이 내세에서 재회한다는걸 암시한건 좋은 일일지도 몰랐다. 둘의 마지막 소원이 나름대로 희망차게 느껴졌으니까.


임시 제목을 “우리의 별들이 만나던 날”로 새로 고쳐 쓰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애써 참았다.


아무리 받아들이기 싫었어도, 이건 사실이었다. 오늘은 공주님과 무사님의 이야기의 끝이었고, 친구들과 천생연분과 연인들의 이야기의 끝이었다. 오늘은 둘이 서로를 위해 함께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겐타로와 다이스가 서로를 위해 함께할 수 있는 첫번째 날이라는걸, 겐타로는 한참 후에 깨닫는다.


[제 10장: 천생연분]


“야, 겐타로?”


겐타로를 무아지경 상태에서 깨울려고 눈앞에서 손가락을 흔들어 대는 다이스. 겐타로가 눈치채기까지 거의 일분 가까이 걸린것 같다. 드디어 눈치채자, 어리둥절해서 눈을 가늘게 뜨고 손가락 사이로 다이스를 보려고 하는 겐타로.


“음식 왔는데,” 손짓하는 다이스.


몇번 눈을 깜박이며, 식탁 위에 펼쳐진 진수성찬을 하나하나 눈에 새기는 겐타로.


“아, 그런가요.”


둘이 있는 곳은 다름아닌 고풍스러운 은은한 조명과 꽃향기나는 양초까지 완벽한, 미니멀 양식의 고급 전통 일식당. 다이스는 꿈속에서나 갈 수 있을법한 비싼 식당이다. 하지만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오늘은 겐타로가 난데없이 밥을 사주겠단다. 정말 운이 좋은 날이다! 그래서 음식에 대한 감사의 기도 말고도, 이게 일생에 단 한번 있는 일이 아니기를 바라는 기도를 추가로 올린다.


조용히 접시 위 허공을 젓가락으로 젓는 겐타로. 더욱 혈기왕성하게 저을 수 있지만 그러기엔 너무 배고픈 다이스. 하지만… 걱정할 수 밖에 없다. 며칠 전에 마천랑 녀석중 한명이 패션을 비웃자 겐타로는 정말 기겁했지. 다행히 여자들에게서 도망친 다음에는 훨씬 괜찮아 보였지만. 그치만 여기 올때부터 계속 멍때리고 있다. 아악, 친구가 이 상태일땐, 특히 바로 눈 앞에서 이럴땐, 절대 먼저 식사를 시작할 수 없는 다이스.


“괜찮아?” 입을 열고선 재빨리 덧붙이는 다이스. “뭔가 신경쓰이는 거라도 있어?”


“공주님과 무사님이요.” 거의 자동적으로 대답하는 겐타로.


짜증나서 찡그릴 수 밖에 없는 다이스. 만약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면, 그냥 그렇다고 말하면 될텐데. 기껏 사려 깊게 대하려고 했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도 아니고, 또 그놈의 전생 운운하면서 사람을 가지고 놀린다.


“야, 나 진지하거든-”


“저도 그런데요. 거짓말 아니었어요.” 마찬가지로 찡그린 얼굴로 말을 끊는 겐타로. 다이스와 식탁 사이의 지점을 향해 눈을 내리깔아서, 말해줄지 아니면 조용히 함구할지를 고민한다.


다이스는 다시 맞받아치기 일보직전이었지만, 겐타로의 진지한 표정과, 겐타로가 전부 계산한다는걸 불현듯 깨닫자마자 볼을 부풀리면서도 입을 다문다.


“정말로 공주님과 무사님을 생각하고 있었다니까요.” 말을 잠시 멈추고 손을 들어서, 아직 할말은 많이 남아있다는걸 알리는 겐타로. 하지만 이미 거의 입을 열기 일보 직전인 다이스. 겐타로는 말을 계속하기 전에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러니까… 이건 소생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계속 떠올리던 이야깃감이에요. 영상이 항상 기억처럼, 생생하고 선명하게, 떠오르곤 했죠… 주요 사건에만 한정되었지만요. 실제로 소설을 쓰려면 자세한 묘사를 여기저기 엮어야 하더라고요.”


고개를 들기 전 슬픈 미소를 짓는 겐타로. “마지막 영감의 파도를 오늘 아침에 받은것 같아요. 드디어 이야기의 끝에 다다른 걸까요. 그래서일까… 좀 감상적인 기분이 드네요.”


“오오…” 감명받아서 감탄하는 다이스. 어쩌면 정말 유메노 겐타로 다운게 아닐까. 마법처럼 영감을 주는 뮤즈가 정말 있었다니! 솔직히 겐타로의 랩 리릭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의심하긴 했지만서도.


씩 웃는 다이스. “그럼 넌 정말 글쓰기 신동 같은거야?”


“딱히 그런건 아니지만…” 부정하면서도 칭찬이 쑥스러운듯 내심 미소지어 보이는 겐타로.


친구를 기운내게 해주려는 임무를 나름대로 완수하자 더욱 활짝 웃는 다이스.


하지만 ‘공주님과 무사님이라면’…


다이스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머리를 긁적이는데서 무언가가 뒤숭숭하다는게 한마디 없이도 명백하다.


“아 근데,” 일단 입을 열고본다. “그러니까, 그거 무슨 드라마에서… 영감받았다거나 그런거 아니야?”


즉시 자부심과 자기방어심의 표정을 꺼내어 쓰는 겐타로.


“이건 순수창작 이야기 라고요,” 한마디로 끝난 선언. 다른말을 한마디로 꺼냈더라면 틀림없이 화나게 했으리라. 그치만 좀더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계속한다. “물론 아직은 종이에다 전부 옮겨적지 않았어요. 오늘 아침에 막 끝났는 걸요.”


그런거겠지, 만약 그렇게 말한다면. 고개를 끄덕이고선 눈앞에 펼쳐진 진수성찬으로 시선을 돌리는 다이스. 구운 고기 몇조각과, 생선 튀김 몇조각, 신선한 초밥 요리, 그리고 수많은 반찬. 모두 참을 수 없는 냄새와 함께 자기를 먼저 집어달라고 다이스에게 외친다. 그래서 당연하다는듯이, 젓가락으로 한번에 집을 수 있는 가장 많은 양을 담기로 해서, 또다른 질문을 던질때 겐타로를 쳐다보지도 않는 다이스.


“어떻게 끝나?"


하마터면 음식이 목에 걸릴 뻔한 겐타로. “뭐라고요?”


사실상 작가에게 미래의 작품의 내용을 미리 스포일러 해달라고 물어본 거나 다름 없다는 생각 대신, 오, 겐타로가 조금 털어놓으니까 기분이 좋아졌잖아. 그럼 계속 얘기해야지, 라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서 어깨를 으쓱하는 다이스. 아마도. 에이, 그냥 도박이잖아, 이거.


“그냥 그 얘기 더 하고싶어하는거 같아보여서, 별거 아냐.”


겐타로의 눈이 사탕을 받은 어린아이의 눈처럼 반짝이기 시작해서(예를 들면 아메무라라거나, 라무다라거나, 모 패션 디자이너라거나), 이번 내기는 틀림없이 이겼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한 다이스. 그러자 들어본 것중 가장 행복한 목소리가 낭독한다: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


그 말에 활짝 웃을수 밖에 없는 다이스. “와아, 그거 좋네-”


“거짓말이에요. 둘다 죽었어요. 서로의 치명적인 결점이 불러일으킨 비극에 가로막힌채 각자의 생을 마감했죠.”


젓가락에서 떨어져 무너지는 음식의 탑보다 훨씬 빨리 무너지는 다이스의 미소.


“그래도 나름대로 희망차게 끝난다고요,” 문자 그대로 다이스는 물어보지 않았더라도 말을 계속 잇는 겐타로. “왜냐면 무사님은 세상에서 가장 무모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죽고, 나중에, 공주님은 세상에서 가장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죽거든요. 그래서 다시 만날때-”


크게, 그리고 오래, 절규하는 다이스. “아아아아악 젠장 겐타로! 넌 왜 항상 이런 식인건데?!”


조용히 웃는 겐타로. “먼저 물어본건 다이스가 아니였나요? 소원을 빌때는 항상 조심해라, 그런 말이 있-”


“거짓말 안했다면서! 아무리 들어도 우리 얘기 같잖아! 또 전생의 인연 어쩌구 하는 헛소리로 낚는게 말이 되냐고오!”


“소생은… 뭐라고요?”


그 자리에 얼어붙은 겐타로의 휘둥그레해지는 두 눈. 잠깐만, 방금 그 암시를 스스로 눈치챈건가? 아니면 이번에는 내가 거짓말에 넘어가지 않아서 놀란 건가? 틀림없이 후자일 거라고 단정짓는 다이스, 그래도 어쩌면-알게 뭐야, 상대는 절대 읽어낼 수 없는 그 유메노 겐타로인데.


이번에는 짜증을 잔뜩 실어서 볼을 더 부풀리고 팔짱을 낀채 얼굴을 찌뿌리는 다이스. 잠시 동안 서로를 빤히 쳐다보며, 눈에 보이는 짜증 뒤에는 당혹스러움이 숨겨져 있을거라며 가정하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겐타로. 이젠 다이스가 차의 불빛과 맞닥뜨린 사슴처럼 꼼짝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을 차례다.


“뭐가 어쨌-”


“그럼 소생과 다이스가 ‘세상에서 가장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과 가장 무모한 사람?’ 이라는 건가요? 좀 감동인데요 다이스, 그렇게나 높게 평가할줄은 꿈에도 몰랐…”


훨씬 약오르는 표정을 장착하느라 잠시 말을 멈추는 겐타로.


“어쩌면 저희가 전생에서 연인이였다는 공상을 정말 좋아하나봐요?”


만화에서나 볼법한 기세로 머리를 세차게 긁적이고, 희미하게 화난듯 달그락거리는 주사위 소리와 함께 발을 쿵쿵 구르는 것 외에는 달리 반응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다이스.


그러나 겐타로는 아직 장난을 그만둘 생각이 없다는게 곧 밝혀진다. 다이스는 속으로 ‘공주님 목소리’라고 이름붙인 가성으로 말을 계속한다:


“세상에, 이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고 공주님을 때리실 건가요? 어라, 제 무사님은 절 지켜줘야 하는게 아니였나요?”


아.


그 한마디에,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서, 침묵하는 다이스.


이 ‘공주님과 무사님’ 이야기가 언급될 때마다, 꼭 떠올릴 수 밖에 없는게 있는데... 아악, 이게 왜 그렇게나 골치아프게 하는건지 겐타로에게 말해줘야하나 고민된다. 왜냐고? 솔직히 말하자면, 겐타로는 항상 솔직하게 털어놓아 줬으니까? 만약 이 가슴속 응어리를 풀어낼 수 있다면, 어쩌면, 만에 하나, ‘공주님과 무사님’ 이야기가 나올때마다 겐타로라면-


“어, 다이스?” 속삭임보다 아주 약간 더 큰 겐타로의 목소리. 다이스는 고개를 푹 떨구었지만 그래도 눈을 맞추려는듯 고개를 기울이는 겐타로.


“…때려서 미안,” 입을 연 다이스. “나… 다시는 안 그럴게.”


"걱정하지 마시어요. 아-” 실수로 공주님 목소리로 말했지만, 재빨리 평상시의 목소리로 바꿔 말을 잇는 겐타로. “전부… 잊어버렸는걸요.”


“먼저 말꺼낸건 너였는데?” 다이스의 미약한 반박.


“네. 하지만 그 감상은, 거짓말이 아니였어요.”


그 말에도 여전히 침묵하는 다이스. 머릿속 톱니바퀴를 열심히 굴려가며 선택지를 저울질한다. 그동안 끈기 있게 대답을 기다리는 겐타로. 몇 초가 지난 후, 다이스는 드디어 입을 연다.


친구에게라면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결정내린다.


“들어봐, 내가 왜 식겁해서 너를 쳤냐면…” 마음의 준비를 하려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지만, 이 일을 가지고 한창 놀릴 겐타로와 라무다의 모습이 떠올라서, 대신 다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잠깐만, 다른말 하기 전에, 이거 가지고 나 놀리지 않겠다고 약속해줘! 라무다한테도 말하면 안돼!”


“약속할게요,” 간단한 겐타로의 대답.


제길. 이건 거짓말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나? 전혀. 어쨌든 겐타로를 믿을건가? 당연한 소리. 겐타로가 항상 그러는 것처럼 거짓말로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대신, 그러기로 한 자신을 새삼스럽게 원망한다.


어쩌면 정말로 ‘세상에서 가장 무모한 사람’인걸까.


또다시 깊은 숨을 들이마시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는 다이스. 드디어 겐타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선-


“운명의 붉은 실 얘기 들어봤어?”


심각하다 못해 쓸데없을 정도로 진지한 얼굴.


고개를 끄덕이는 겐타로. “많이 들어봐서 익숙한 설화네요.”


“글쎄, 난 아니거든.” 어깨를 으쓱하고선 겐타로를 바라보는 다이스.


설명해달라는 말이란걸 눈치채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걸린 겐타로.


“아! 그거라면, 언젠가 맺어질 한 쌍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붉은 실로 연결되어 있다는 내용의 이야기인데-”


“어라, 잠깐만.” 의자를 바싹 끌어당겨서 테이블에 기대는 다이스. “어느쪽이야?”


“어느쪽이냐니 무슨 말인가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는 겐타로.


“그 실 말인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다이스. “눈에 보이지 않는거야? 아니면 빨개?”


“둘 다요.” 다시 끄덕이는 겐타로. “빨간색이지만,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죠.”


“뭐- 눈에 보이지 않으면 빨간지 어떻게 아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짓는 겐타로. 이내 천천히 눈을 감는다.


“어쨌든 그런 내용의 이야기예요, 다이스. 저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나요?”


재빨리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다이스. 그리고 이야기를 계속하는 겐타로.


“운명과 사랑의 실이라서 빨갛고, 만약 바로 눈앞에 있다면 그게 존재한다는걸 믿을 수 없으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이번에는 진심이라고 속아넘어갈수 있을법한 미소와 함께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겐타로. “새끼손가락에 묶여 있다고들 하죠.”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서, 대체 어떻게 하면 실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빨갈 수 있는건지 여전히 조금은 혼란스러운 다이스. 오만가지 잡생각들을 재빨리 떨쳐내는 겐타로의 목소리.


“다이스, 설마 그게 다였나요? 운명의 붉은 실 설화를 모르는건 그렇게 분위기 잡을 만큼 부끄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더욱 진해지는 겐타로의 눈웃음. 하지만 눈치채지 못한 다이스. “그리고 저희 둘다 이미 라무다는 덜 개인적일지 몰라도 훨씬 짜증나는 방식으로 들이대는거 알고 있잖아요.”


“아니, 그런게 아니라…”


드디어 이야기를 시작하는 다이스.


“그러니까, 내가 한번 도박하러 갔을때, 돈을 뿌리다시피 흥청망청 쓰던 얼간이가 있었어. 아마도 술에 찌든 부자였겠지. 게다가 자기 입으로 자기가 천재라는거야. 그러더니 도박장 한가운데에 ‘질문에 답해드립니다’ 뭐 그런 코너? 같은걸 세우더라. 줄서서 기다린 다음에 문제를 맞추면 낸 돈의 두배를 받는거였는데… 아악, 나도 알아, 내가 들어도 노잼이긴 한데, 쨌든, 그때 돈이 필요했거든?”


마지막 문장에 대한 겐타로의 반응을 꼼꼼히 지켜보는 다이스. 고맙게도 들은것만으로 자신을 판단하고 있는것 같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전혀 놀란것 같지 않다. 후유, 별건 아니였지만, 큰그림이 아무리 쓰레기 같더라도 평판은 온전히 보존하고 싶다. 그래서 겐타로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단어를 강조하고 가능한 한 많은 손짓을 곁들이며, 이야기를 계속 이어간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건지 1도 감이 안잡혔는데, 바로 그순간! 그 인간이 갑자기 가장 유명한 ‘천생연분 전설’이 뭐냐고 묻는 거야. 이건 진짜 자신 있어서 가진 돈을 모조리 쏟아부었거든!"


그때 느낀 스릴을 지금 다시 느끼는 것처럼 정말 흥분한 다이스. 살짝 미소짓는 겐타로. 겐타로도 이야기를 빨리 듣고 싶어하는거 같아서 조금 기운나는 다이스.


“그래서 그대로 했거든. 면상에 돈다발을 던지고 말했는데…”


온몸에 힘이 확 빠져버린것 같은 다이스. 같은 시각 연민으로 바뀌는 겐타로의 미소.


“운명의 붉은 실이 아니였나요?” 겐타로의 추측.


“으으으으응…” 그때 느낀 실망을 완벽히 재현해서 다시 볼을 부풀리는 다이스.


무모하네요.


무언가를 이해한듯 콧노래를 부르다가, 즉시 팔짱을 끼고 살짝 얼굴을 찌푸리는 겐타로.


“다이스,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인데요, 원래 주제에서 멀어진 것 같지 않나요?”


“아악… 아니 그게 아니라, 이제 막 이야기 하려던 참이었어!” 갑자기 하이텐션이 돌아오기라도 한것처럼 재빨리 똑바로 일어나 앉는 다이스. “그러니까, 그 뭐였더라… 그게 말이지-”


망설이는 다이스. 이 비싼 식당의 식탁간의 간격은 이상하리만큼 멀지만, 행여나 엿듣는 사람이 있을까 좌우를 살피고나서야 말을 계속한다.


“기억도 안날 정도로 오랫동안 꾸던 꿈이 있거든. 처음에는 전에 보던 재밌는 드라마에서 나온 장면인가 싶었는데, 계속 꾸면 꿀수록, 내 과거나, 아니면 어린애 시절때쯤의 중요한 기억같은거야. 그 있잖아… 생각만 해도, 심지어 팬티와 히프노시스 마이크 빼고 모든 걸 잃었을 때도, 웃음이 나오게 하는 그런거. 응, 바보같고 웃프지만 나한텐 그렇게 느껴져. 뭐랄까-”


“다이스, 그거 귀엽네요.” 겐타로의 한줄평. 틀림없이 웃었다고 확신하는 다이스.


“너… 너 안 웃겠다고 약속했잖아!” 보기 좋게 배신당해서, 겐타로의 코에서 불과 몇 센치 떨어지지 않은 곳에 비난의 삿대질을 해대는 다이스.


“비웃는 웃음에만 한정한거, 확실하나요?” 천진난만하다 못해 가짜인 티가 팍팍 나는 겐타로의 미소. “이건 지금까지 본 소생을 믿는 법중 가장 귀여운 방법이네요.”


“널 믿어? 흐음, 그거 도전과제 같은데.” 스릴 넘치고 짜릿해서 계속 시도하게 되는 도전과제, 라는걸 덧붙이고 싶은 마음은 딱히 들지 않는다. 손가락을 치우고 대신 팔짱을 낀다.


“그래도 계속하세요, 무슨 내용의 드라마였나요?”


꽃받침 자세라고 하던가, 귀여운 짓을 하려는 것처럼, 팔꿈치로 식탁에 기대어, 손목을 모은 다음에, 양손 위에 턱을 걸치는 겐타로. 그래도 납득할 정도로 충분히 흥미 있어 보여서, 말을 계속하는 다이스. 익숙한 목소리보다 훨씬 자그마한게 흠이라면 흠이다.


“…무사님과 공주님.”


조심스럽게 겐타로의 반응을 관찰하는 다이스. 의자에 기대더니 식탁 밑으로 손을 넣는다. 어쩌면 머릿속에서 한번에 너무 많은 퍼즐조각을 맞추려고 하는 걸까. 잠시 동안 둘 사이에 흐르는 침묵.


“그래서 소생의 이야기가 드라마에서 영감받은건지 물어본 거였군요.” 반쯤은 혼잣말인 겐타로의 대답. “왜냐면… 그 꿈이…”


“그러니까! 그래서…” 말을 계속 잇는 다이스, “너가 그게 우리 이야기인척 했을때… 둘을 가지고 노는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둘을 죽여서 비련의 연인으로 만든건 도움이 되지 않았지. 내 말은, 10화도 안되는 짧은 드라마였거든. 그냥 그렇다고…”


납치당한 공주님과 공주님을 구하려다 공주님의 품에서 숨을 거둔 무사님이 나오는 악몽은 이제 지긋지긋해서, 그 얘기를 꺼내서 더 떠올리고 싶지 않다.


“그래서, 어어… 미안.” 살짝 고개를 숙였다가 어리둥절 해져서 다시 드는 다이스. “잠깐만, 무슨 얘기 하고 있었더라?"


반응할 기색조차 없이 깜짝 놀란 겐타로. 아니면 다이스가 상상한 퍼즐을 머릿속에서 맞추는데 열중한걸까. 하지만 꺼내려고 했던 중요한 이야기가 갑자기 떠올라서 너무 신경쓰지 않기로 한다. 그걸 깨닫자마자 손가락을 튕기는 다이스.


“아 맞다! 드라마에서도 천생연분이었어. 좀 뻔한것 같지만.” 불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들떠서, 식탁 밑에서 요란하게 다리를 떨면서도 활짝 웃는 다이스. “근데 그걸 어떻게 눈치챘을거 같아?”


“글쎄요?” 말한다기보단 숨을 내쉰 겐타로, 그래도 다이스는 알아듣는다.


“눈 때문에!” 활짝 핀 다이스의 미소. “진짜 대박인게, 공주님의 눈은 무사님의 눈에 비친 색으로 빛났고, 무사님의 눈은 공주님의 눈에 비친 색으로 빛났거든! 그래서 천생연분은 눈 색깔 이야기라는 거에 올인했는데, 그 쉬운걸 틀려서 그렇게 기분 상한 적이-겐타로?”


건너편에서 숨쉬고 있는것 같지 않아보이는 겐타로. 다이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내내 단 한번도 눈을 깜박이지 않았다고 맹세할 수 있다. 그러다가 몸을 푹 숙이더니 떨기 시작한다. 맙소사.


“ㄱ-겐타로? 왜그래?!”


깜짝 놀라서, 겐타로 곁으로 시끄럽게 의자를 끄는 다이스. 안돼안돼안돼, 뭘 해야 하지? 의사 불러야 하나? 아니면 병원까지 데려가야 하나? 가장 가까운 병원까지 업고 달려가자! 지금 당장!


그대로 업으려는 것처럼 겐타로의 손을 자신의 어깨 위에 얹는 다이스. 그러자 머리 근처로 손을 반쯤 올리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겐타로. ‘기억,’ ‘당연히,’ 그리고 ‘바보.’ 이 세 단어만 가까스로 알아들을 수 있다.


“잠깐만, 무슨 말을 하려는-?”


그 말에 떨어지는 겐타로의 눈물.


“어어- 잠깐, 겐타로?”


겐타로에게 시선을 고정시킨채, 즉시 식탁에서 냅킨을 집어서 조심스럽게 겐타로의 뺨에 갖다 대는 다이스. 아, 몸이 자동 조종 모드로 바뀐 것처럼, 팔이 이 동작에 익숙한 것처럼 느껴진다. 주위를 딴 데로 돌리려고 ‘우정 아드레날린.’ 뭐 그런거라고 상상해본다. 촉촉히 젖어서 반짝이는 눈으로 다시 다이스를 바라보는 겐타로.


“아, 죄송해요, 괜찮… 아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가까스로 내뱉은 몇 마디.


거짓말쟁이.


찡그린 얼굴의 다이스. 단 1초동안이라도 납득하지 않고, 겐타로의 뺨에서 손을 치우지도 않는다. 퍽이나 괜찮겠다. 이 모든걸 보고도 어떻게 그게 거짓말이란걸 믿을 수 있겠어? 지금 문자 그대로 울고 있는데!


하지만 말을 계속하는 겐타로,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요? 그래서일까… 꽤 멋지네요, 천생연분이란걸 한눈에 아는게, 천생연분이 여기에 있다는걸 아는게- 그리고, 그러니까, 천생연분이란건, 눈 색으로... 아, 소생 걱정은 하지 않아도-, 다이스, 소생은 단지… 행복- 아, 감동받은거예요.”


마지못해 입을 열기전 겐타로를 관찰하는 다이스. “정말 괜찮은거 확실해?”


“이제 괜찮아요.” 그말을 하는 겐타로는 정말 기운을 차린것 같다. 훌쩍이면서도 평상시의 목소리로 계속한다. “어쩌면 운명의 붉은 실보다 더 나을지도 모르네요.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는 표시니까요.”


그 말에 다시 표정이 밝아져서 들뜬 다이스. “그치 그치? 네말이 다 맞아, 겐타로.”


그러고선 겐타로의 나머지 눈물을 전부 닦아낸다. 다이스가 뭘 하고 있는건지 마침내 눈치채자 뻣뻣해지는 겐타로.


“다이스, 소생이-”


“만약 정말 행복하고 감동받은거였으면 그렇게 울지 말았어야지.” 자신의 말을 내뱉자마자 무시하고선 대신 눈물을 전부 닦아내는데 집중하는 다이스. 겐타로의 얼굴이 아직도 빨간건, 조금 전에 운거 때문이겠지.


“아하하하, 글쎄요…” 미소를 지으면서 시선을 피하는 겐타로. “그냥 단순히… 당황한것 뿐인걸요.”


다이스가 만족한 뒤 직접 냅킨을 쥐는 겐타로. 도중 전에 그랬던 것처럼 서로의 손이 우연히 스쳤다–어, 정확히 언제였지? 기억을 더듬어보는 다이스. 아마 라무다와 셋이서 친치로를 할때였을거야. 응, 그때다.


이제 다이스에게 미소지어 보이는 겐타로. 뺨이 따뜻해질 정도로 전염성이 강한 온기의 미소여서 시선을 피할 수 밖에 없는 다이스. 하지만 겐타로의 조용한 목소리에 다시 바라보게 된다.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요, 다이스.”


즉시 다이스의 정신세계를 공격하는 생각. 우와, 오늘따라 정말 감상적인데! 근데 그거 아냐, 자신에게 묻는 다이스, 그거 아냐? 우린 친구잖아!


“헷, 당연한 소리! 나도 그래!”


눈끝을 찡그릴 정도로 활짝 웃는 다이스. 하지만 그 미소는 겐타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천천히 사라진다.


“어- 잠깐, 어디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설명을 대신 하려는 듯 다시 훌쩍이는 겐타로. 다이스의 찌뿌린 얼굴에 배웅하듯 살랑살랑 흔든 손. “소생이 없을동안 디저트 주문하세요.”


“같이 가줄까?”


“…”


왜 그걸 물어본건지 모르겠다. 아, 아직도 걱정된 건가? 아 잠깐만, 화장실에 같이 가줄까라는 말은 이상한데, 지금당장 설명, 아니 해명해야 되는데- 그리고 지금 겐타로는… 재미있어 하는거 같다? 마치 웃음을 참으려는 것처럼. 아 왜그러는 건데.


하지만 겐타로는 다이스가 예상한 것처럼 놀리지 않는다. 대신, 가볍게 웃고선 이렇게 말한다-


당연하다는 듯이 화장실에 갈때마다 호위할 필요는 없지 않나요?”


“…그러네.”


해명하려는 시도는 의미없겠지, 라고 다이스는 단정짓는다. 체념의 한숨과 함께 포기하고선, 다시 제자리에 털썩 앉는 다이스. 겐타로가 조심스럽게 건넨 메뉴판을 다이스는 작은 미소와 함께 받는다.


“곧바로 돌아올게요,” 곧바로 한마디를 덧붙인 겐타로. “주문한 음식 나올때까지 기다리세요.”


모퉁이를 돌아 화장실로 향하는 긴 복도 너머로 사라지는 겐타로를 바라보는 다이스.


대신 디저트를 고르는데 집중하려고 걱정을 가라앉힌다. 아까 전에는 겐타로가 생각해둔 며뉴가 이미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어서 메뉴를 자세히 볼 기회가 없었다. 맘에 드는 디저트를 나열하던 도중, 아무거나 환영한다는듯이 벌써 꼬르륵거리는 다이스의 배. 그래서 이젠 메뉴를 혼자서 훑어보고 있는… 와 잠깐만 가격이 좀 심각하게 많이 미쳤는데? 이 쓸데없이 정갈한 반찬과 똑같은 가격이라면 문자 그대로 어느 패스트푸드 식당을 가도 풀코스로 먹을 수 있잖아! 설마 겐타로는 맨날 이렇게 사는건가? 사실 오늘은 특별한 날이 아니였던 건가? 어쩌면 정말로 왕족이나… 그런 높은 신분인 건가?


혼자서 디저트를 결정하는건, 왜 때문인진 몰라도 어렵다. 일단 가격을 고려해야 하는지 아닌지부터 모르겠다. 어차피 전부 말도 안되게 비싸니까, 그래서 말인데, 그냥 원하는 거로 고를까? 가격을 고려하더라도 사진이 특히 맛있어 보이는 것도 아니잖아. 사진만 바라봐도 진한 시럽이 뚝뚝 떨어지는게 눈에 선하고, 종잇결에서 케이크의 촉촉함과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이미 뱃속으로 보낼 디저트 후보 3개를 고른 다이스지만, 그래도 가서 주문하기 전에 겐타로는 뭘 원하는지 물어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 겐타로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조금 전에 겐타로가 내뱉은 그 한 문장이 여전히 머리 한구석을 갉아먹는다. 그런데 어째서 동시에 익숙하게… 느껴지는 걸까? 평소에도 친구가 화장실에 갈때 같이 가주는건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플링 포세 만큼 가까운 친구를 둔 적이 있는것도 아닌데.


그건 너무 신경쓰지 않기로 결정내리는 다이스.


근데 겐타로, 너무 오래 걸리는거 아닌가? ‘만약에’와 ‘어쩌면’이 다이스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만약 무슨 일 있었으면 어떡해? 혹시 또 울고 있는건가. 실은 전혀 괜찮지 않은 거 아냐? 어쩌면 곁에 친구가–


일어선 다이스.


엄청난 박력으로 달려나가다 모퉁이를 돌던 다른 사람과 정통으로 부딪힌다. 완전히 동요한채, 겐타로는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진다–하지만 그렇게 되도록 절대 내버려두지 않은 다이스는 손을 붙잡은 뒤 더욱 힘차게 겐타로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다이스의 어깨를 붙잡고 균형을 되찾는 겐타로. 그리고 겐타로에게 팔을 둘러서 마찬가지로 균형을 되찾으려는 다이스.


그 자세로 얼어붙은채 지나간, 훨씬, 훨씬 길게 느껴졌던 몇 초. 겐타로의 숨결이, 목과 파카에 달린 털 사이에 이마를 대는게 느껴진다. 심장이 콩닥거리는 것도 거의 느껴진, 아니 잠깐만, 자신의 심장인가? 갑자기 욱신거려 오는 유일무이한 리듬이란걸 감안해도 단정짓기 어렵다.


겐타로가 입을 열자, 단어가 귀에 들어오기 직전의 찰나의 순간, 소리를 낮춘 목소리를 먼저 느끼는 다이스.


“…놓아줄 생각은 없는 건가요?”


잠시동안 어안이 벙벙한 다이스. 아니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넘어지기 전에 붙잡아 준건 난데- 그제서야 문득 깨달았다, 아, 밀쳐내고 싶더라도 내가 가까이 붙들고 있어서 그러지 못하는 거구나.


“아, 맞다, 미안.” 재빨리 붙들고 있던 팔을 빼내고, 혹시 그것만으로는 부족할까봐 한발짝 뒤로 물러난다. 뒤로 물러서자 새빨개진 겐타로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 더이상 눈물 자국은 없지만, 다이스는 또 운게 틀림없다고 추측한다. 그게 아니라면 얼굴이 새빨개질 이유가 없잖아?


“어, 괜찮아?” 물어볼 수 밖에 없는 다이스.


“ㄱ-글쎄요,” 다시 자신의 몸을 일으켜 세우고선 하카마의 매무새를 정돈하는 겐타로, “다이스가 소생이 뒤로 넘어질 뻔 한걸 구해준걸 고려하자면, 예, 소생은 괜찮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뻔뻔하게 활짝 웃는 다이스. 하지만 겐타로는 마저 말을 끝맺는다-


“그렇지만, 이걸 빼먹을 수는 없죠. 애초에 소생이 넘어질뻔한 원흉은 다이스잖아요. 디저트 주문하고 음식 나올때까지 기다리라고 콕 집어서 말했는데도 말이죠.”


“미아아아아아아아안…” 강조하려고 말을 끄는 다이스. 겐타로가 계산한다는걸 기억하기 아주 좋은 시간이다.


“그럼 디저트는 다이스가 계산할 건가요?” 그 눈에 닿지 않는 미소를 다시 짓는 겐타로.


“겐타로님 제에에에에에발 자비를!” 자기 자신도 소리에 깜짝 놀랄 정도로 두 손을 재빨리 움켜쥔 다이스. “그렇게 하고 싶어도 못하는데요?!”


하지만 다이스의 처절한 간청은 환상적이고도 아름답게 무시당한다. 겐타로는 그대로 다이스를 지나쳐 걸어갔다–아니면 그럴줄 알았는데, 겐타로는 서로의 어깨가 맞닿자 바로 옆에 그대로 멈춰선다. 거기에서, 다이스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좋아하는 말버릇을 내뱉는다:


“물론 거짓말이었어요.”


마찬가지로 겐타로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다이스. 특히나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선, 물어보기 두려워 보이기까지 하지만, 그래도 알고 싶다는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다. “…어느게?”


눈을 천천히 깜박이는 겐타로. 눈을 깜박이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걸 선명히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다이스. 바로 그순간, 다이스가 지금까지 목격한 것중 가장 장난끼 넘치는 표정을 짓고선 입을 여는 겐타로.


“소생이 말한 첫번째 문장에 담긴 감정이요.”


다이스의 머릿속 톱니바퀴는 열심히 돌아가다가 순식간에 멈춘다. 부딪힌 후 일어난 일들의 시작까지의 기억을 되살려 본다. 부딪힌 다음 겐타로가 처음으로 말한건 놓아줄 생각은 없냐는 거였지–아니 잠깐만, 어쩌면 그것보다 한참 전, 낮에 있었던 일도 포함해야 하나? 밥 사주겠다고 한 때인가? 아니면 아무리 들어도 우리 얘기같은 그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한 때인가? 혹시 옷 빌려준건 갚을 필요 없다고 말한건가? 아아아아악 대체 뭐가 정답인지 1도 모르겠어!


“겐타로 제발…” 완벽한 도게자 자세로 엎드려 절하는 다이스. “나 빈털터리 라니까.”


“다이스, 지금 뭐하는-? 제발 일어나세요?” 겐타로도 무릎 꿇고 크게 속삭이고 있다는건 짐작할 수 있지만, 절대 안돼. 안전과 빚으로부터의 자유가 보장되기 전까진 못 일어나, 아니 안 일어나! 하지만 머리 한구석은 겐타로도 그걸 알고 있다는걸 상기시킨다.


겐타로가 포기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알겠어요,” 패배의 한숨, “…그것도 거짓말이었어요.”


다이스도 자기 나름의 감정이 섞인 한숨을 내쉰다. 다름아닌 짧은 시간내에 드라마틱하게 끌어낸 안도가 담긴 한숨이다. 무릎꿇은 자세에서 일어나면서 겐타로를 바라보다가, 둘의 눈이 마주친 순간 동작을 멈춘다. 그러자 깜짝 놀란것 같은 겐타로.


“겐타로, 제발.” 몹시 화가 나서 낮게 깔린 다이스의 목소리. “그 짓좀 하지 말아줘.”


“ㅁ-무슨 짓 말이죠?”


“나 가지고 노는거!”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씩 웃는 겐타로. “…고려해보도록 하죠.”


속으로 기도하는 다이스. 제발 이건 거짓말이라고 하지 말아줘. 그러다 문득 든 생각.


어쩌면 정말로 ‘세상에서 가장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인걸까.


그리고 두 명은 동시에, 천만다행이도 웨이터중 한명이 눈치채고 이상한 질문을 하기 전에 일어선다. 다시 식탁으로 돌아와서, 넘어져 있던 의자를 자기 자리까지 끌고 가는 다이스와, 우아하게 제자리에 앉는 겐타로.


“나는, 그러니까, 이걸로 하려고 했어!” 메뉴에 나온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를 가리키는 다이스.


“디저트를 주문해도 된다는건 이미 허락한것 같은데요?” 메뉴를 훑어 보면서 찡그리는 겐타로.


“응, 그래도 너가 괜찮은지 먼저 확인하고 싶었어.” 메뉴판 너머에서 겐타로를 힐끔 보는 다이스.


그 답변에 만족한듯 조용히 콧노래를 부르는 겐타로. 가장 맘에 드는걸 가리키기 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커다란 꽃잎 모양으로 잘려진 조각들이 한송이의 꽃을 이루도록 배열된 조각모둠케이크.


“이걸로 할까요?”


알고보니 다이스도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였다. 우연의 일치!


웨이터가 주문한 디저트와 함께 도착했을때, 다이스의 눈에는 디저트가 빛나는 것처럼, 마치 뒤에 후광이 떠오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처음 나온 요리에도 후광이 떠올랐으니까 그렇게 크게 놀라지는 않는다.


각자의 티스푼을 들고 케이크를 파낸다. 처음에는 각자의 편에서만 먹으면서, 서로의 숟가락이 맞부딪힐 때마다 조용히 사과했지만, 어느새 일부러 숟가락을 부딪히면서 가장 맛있는 케이크 조각을 차지하기 위한 장난스런 결전으로 번진다.


다이스의 승리로 끝난 결전 중 한번, 수많은 이상한 목소리 중 하나로 이 맛만큼은 딱 한숟갈이라도 좋으니까 먹어보고 싶다고 칭얼거리는 겐타로. 다이스는 즉시 양심의 가책를 느꼈기에, 그래서…


“알았어, 여기.” 복숭아 케이크의 마지막 한숟갈을 모아서 겐타로의 얼굴에서 2.5cm 떨어진 거리까지 숟가락을 가져다주는 다이스.


예상과는 달리 불쾌한듯 거절하는 겐타로.


“ㄷ-다이스, 그 숟가락으론 먹지 않을건데요.”


“차이 없잖아?” 진짜, 숟가락 나눠 쓰는 게 뭐 어때서. “이미 같은 접시 쓰고 있으면서.”


“실은, 거짓말이었어요. 처음부터 먹고 싶어한 거 말이에요.” 겐타로는 밀쳐내지만, 다이스의 눈에는 맛없는 부스러기 몇조각으로만 만족하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먹을거야, 말거야?” 숟가락을 들이대면서 다시한번 권유하는 다이스.


“…알겠어요.”


체념한 한숨과 함께 포기하고선, 눈을 감고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더니 다이스가 천천히 입에 숟가락을 넣을 때까지 기다리는 겐타로. 겐타로가 천천히 씹을 동안 반응을 끈기 있게 기다리는 다이스.


“좋네요,” 삼키자마자 겐타로의 입에서 나온 말. “아- 맛이 좋다고요, 이거 맛있네요.”


“말했잖아!” 만족해서 활짝 웃는 다이스.


즉시 나머지 조각모둠케이크를 해치우는데 집중해서, 똑같은 티스푼으로 한조각 다음 한조각을 입에 욱여넣는다.


왜 때문인진 모르지만, 잠시동안 다이스를 지켜보고 있어서, 무슨 일 있는지 물어보려는 찰나, 머리를 젓더니 티스푼을 들고 작은 미소와 함께 마저 먹는 겐타로.


실은 이랬던 적이 전에도 몇번 있다. 겐타로가 무슨 말을 할려는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아무것도 아니였던 적? 글쎄, 다이스의 편을 들자면, 겐타로가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게 마치… 눈에 서린 모든 빛깔을 가져가려는 것처럼 보여서일까.


일어서서 나갈 준비를 할때, 그 순간보다 더 행복할 수 없는 다이스. 딱히 겐타로가 ‘빚’을 놀리면서 저녁을 전부 계산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배부른데 디저트까지 얹은채 돌아다니는 날은 흔치 않으니까. 신나고 흥분되서 우연히 겐타로를 한참 앞서간다. 그걸 깨닫자마자 문을 열어둔채 겐타로를 기다린다.


그러자 혼자 웃는 겐타로. 그 어떤 것보다도 기뻐하는 듯한 웃음, 다이스가 물어보더라도 말해주지 않을것에 대한 웃음이다.


함께 조용히 라무다가 셋을 위해 마련한 아파트로 돌아간다. 둘 사이의 평화로운 침묵은, 좋은 식사로 나눈 만족감과 노을의 빛깔과 섞여 한데 어우러진다. 미소를 띈채 기지개 피면서 걸어가는 다이스.


몸을 틀자 눈앞에 있는 무언가를 똑바로 바라보는 겐타로가 눈에 들어온다. 또 무언가가 신경쓰이는 걸까.


“아직도 그 이야기 생각중이야?” 다이스의 추측.


“딱히… 그런건 아닌데요.” 겐타로의 부정. “왜 물어봤나요?”


“아무것도 아냐, 그냥 생각난 건데…” 걸음을 멈추더니 허공에 손을 내미는 다이스. “머릿속에서 끝났다는게 좀 슬프긴 하지만,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면, 이제 글로 옮겨적을 수 있다는 소리잖아! 그건 기쁘지 않아?”


마찬가지로 걸음을 멈춰서 다이스를 바라보는 겐타로. 찡그린 얼굴 뒤에 숨겨진 작은 미소를 다이스는 놓치지 않는다.


“언제 한번 네 예쁜 문체로 그 이야기 쓰면, 나 정말로 읽어보고 싶어.” 잊기 전에 재빨리 덧붙인다: “아! 하지만 꼭 해피엔딩 이어야 해. 공짜로 읽게 해줄거지?”


고개를 저으면서 더욱 활짝 웃는 겐타로. “해피엔딩이라… 그건 두고 바야죠.”


다이스는 잠시 동안 기다리지만, 책을 공짜로 만들어달라는 얘기를 꺼내도 겐타로는 대답할 생각이 1도 없는거 같다. 이런, 마찬가지로 찌푸리고 싶은데, 동시에 미소가 얼굴에 번진다.


그때 다시 입을 여는 겐타로.


“근데 그거 아시나요?” 턱에 손가락을 갖다 대는 겐타로.


겐타로를 마주볼려고 몸을 돌리다가, 너무 빨리 돌려서 가까스로 숨을 참은 다이스.


타오르는 저녁노을의 광채가 내려앉은 겐타로는… 한 폭의 그림 같다.


“어… ㅁ-뭐라고?”


“오늘 공주님과 무사님의 이야기가 끝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슬슬 드네요.” 눈을 감고선 가벼운 몇걸음을 옮기는 겐타로.


“정말… 그렇게 생각해?” 잠시 동안 겐타로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따라잡을려고 뛰어가는 다이스. “잠깐만, 어째서?”  


그 따뜻한 미소로 다이스의 눈을 바라보는 겐타로. (노을의 빛깔을 감안하더라도, 이건 확실하다: 둘의 눈은 서로의 눈에 비친 색으로 빛난다.)


“당연히 그래야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하니까요.”


(작가와 갬블러의 이야기, 라는건 입밖에 내지 않은 비밀)



[흥이 다 깨져버려도 책임 안 지는 에필로그(우소데스요)]


다이스, 헐떡거리면서: 겐타로! 난 정말 바보였나봐! 지금 막 내 천생연분이 누군지 깨달았어!


겐타로, 내심 기대하면서: 지금 막 깨달았다고요?


다이스, 겐타로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면서: 응! 여태껏 내 눈앞에 서있었는데 그걸 못 알아봤네.


겐타로, 다이스의 뺨에 손을 대면서: 확실한가요?


다이스: 당연하지! 초록색에 보랏빛이 언뜻 빛나는 눈이야-


겐타로: 아, 다이스-


다이스: 요코하마 디비젼의 이루마 쥬토.


겐타로:


(P.S. 사랑해 쥬토쨔응)


(P.P.S. 아니 장난이 아니라 진짜 눈색 확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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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이렇게 된걸까요


한때 삼톡이가 이치로에게 자신을 투영했다는 설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아아!!!


추천 BGM: 아야노의 행복이론


글을 쓰기 위해 설정을 짜는게 아니라 설정을 짜기 위해 글을 쓰는 인간이라서, 그리고 불행히도 의미부여+확대해석에 특화되어 있는 답없는 인간이라서...... 사용한 상징을 끝에 정리해놨어요. 2회차로 읽으실때 한번 다르게 해석해 보세요 아니 제발 해주세요


늘 붉은 소나기가 내리던 환상에서 살아왔다.


한밤중, 천둥에 묻혀져 거의 들리지 않던 비명을 지르던 엄마의 입에서 흐르던 액체.


하나뿐인 여동생 미유를 꼬옥 껴안고 폭력을 필사적으로 받아내는 등을 타고 흘러내리던 액체.


서투른 솜씨로 빨간약을 발라주다가 울음을 터뜨린 미유의 눈물과 섞여 팔을 더럽히던 액체.


그 인간의 복부를 관통한 식칼에서 흐르던 액체. 손수 눈을 감겨줄 정도의 자비심은 들지 않았다.


엄마의 목에 걸린 밧줄 목걸이에서 뚝뚝 떨어지던 액체. 즉시 미유의 눈을 가렸다.


핏빛 눈에서 흐르던 액체. 모두 눈물이라기엔 너무나도 씁쓸했고 피라기엔 너무나도 깨끗했다.


추웠다. 뼛속까지 얼어붙을것 같았다. 차라리 얼어버리면 고통을 아예 못느끼지 않았을까. 그러나 우산은 사치였다. 살아남으려면 맨몸으로 버티는 법을 배워야 했다. 머리가 거부해도 몸으로 부딪히며 배웠다. 열두살 소년에겐 가혹한 운명이었다. 하얀색에 스며들어 두드러지는 붉은색은 잔혹했다.


그래서 전부 환상을 덧씌어서, 과거의 저편에 내팽개치고 끝없이 도망치듯 살아왔다.


오늘도 파란색을 덧칠하면서 애써 괘찮다는 주문을 되뇌인다.


나는 오빠니까, 괜찮아, 이건 아무것도 아냐,


라면서.


그날은 검은 소나기가 내려서 환상에서 깨어났다.


비가 흘러내려서 더욱 검어지던 상복. 그러나 한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묘비 위에서 사그라들던 촛불의 불꽃. 결국 굵어지는 빗방울에 꺼졌다.


빗방울에 닿자마자 생기를 잃어버려 칙칙해지던 하얀 국화.


부모님이 돌아가신건 자기 잘못이라며 자책을 멈추지 않던 지로.  꼬옥 쥔 왼손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울다 지쳐 내 품안에서 잠들었지만, 잠결에서도 계속 엄마 아빠를 부르던 사부로.


눈물흘릴 여유도 없이 새까매지던 머릿속.


먹먹했다.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질것 같았다. 내가 혼자서 둘을 먹여살릴수 있을까, 이제부터 뭘 해야 할까.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러나 망설임은 사치였다. 살아남으려면 맨몸으로 버티는 법을 배워야 했다. 머리가 거부해도 몸으로 부딪히며 배웠다. 열두살 소년에겐 가혹한 운명이었다. 붉은색을 무자비하게 침묵시키는 검은색은 잔혹했다.


그래서 환상을 전부 내던져서, 과거의 저편에 내팽개치고 쉴새없이 달려나가며 살아왔다.


오늘도 빨간색을 덧칠하면서 애써 괘찮다는 주문을 되뇌인다.


나는 형이니까, 괜찮아, 이건 아무것도 아냐,


라면서.


히프노시스 마이크를 쥐고 요코하마의 광견으로 군림하던 아오히츠기 사마토키가 야마다 이치로를 처음 만난건 이케부쿠로의 뒷골목에서였다.


흑발과 적안과 녹안 오드아이의 소년에게서 언뜻 은발과 적안의 소년을 보았다.


울다 지쳐 잠든 동생을 꼬옥 껴안고 내일은 좀더 나은 하루가 될것을 약속하고,


두손으로 동생의 귀를 막으면서 스스로 귀를 닫아버리는 법을 터득하고,


한겨울에 집에서 쫓겨났을땐 동생에게 온기를 나눠주며 이 또한 빨리 지나가기를 기도하던,


거의 웃지 않았지만 한번 웃으면 그 누구보다도 천진난만하게 웃던 그 소년.


그때 누구에게 말하는 심정으로 입을 연건지 오늘날까지도 확실치 않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자신의 과거가 반복되는걸 원치 않았다는것.


붉은색은 히어로의 색이라고, 그 어떤것도 두려워할 필요 없다고 말해줘서,


평범한 소년이 아무것도 아닌 테리토리 배틀에서 디비전의 제왕 행세를 하고, 동생들이 조금이라도 다시 웃어주고, 오늘도 화목한 가족과 함께하고, 과거와 미래가 아무리 슬프더라도 행복을 바랄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지 않을까.


한때는 안식과 구원을 찾아서 성당에 다녔던 적이 있었다. 두꺼운 성경의 페이지를 한장 한장 넘기다보면 어느새 하루가 무사히 저물어 있었다. 솔직히 사람들이 종교를 왜 믿는지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심심풀이로 페이지를 넘기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묵시록의 4기사는 뇌리를 강렬하게 스쳤다.


아오히츠기碧棺. 푸른. 아오히츠기 사마토키碧棺左馬刻. 푸른의 왼편에 말을 새기다. 결국 엄마에게 이름에 담긴 본래 의미를 끝까지 물어보지 못했다. 아무리 많은 퍼즐 조각을 모아도 퍼즐을 완성할수는 없는 것이다. 추측해보자면, 말은 대부분 ‘힘’을 상징하니까, 이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갈망했던게 아닐까.


반대로 미유의 이름은 누구라도 한자를 보자마자 단번에 의미를 알 수 있었다. 自由. 자유. 아오히츠기 미유碧棺自由. 푸른 자유自由. 미유만큼은 멍든 삶에서, 죽음에서 자유로워지기를 바랬던걸까. 힘과 자유, 자유와 힘. 서로 떨어뜨려 놓을 수 없는, 불가결한 조합. 힘 없인 자유도 없다. 자유 없인 힘도 없다.


자유는 곧 나의 뮤즈가 되었다.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를 노래했다. 이제는 과거의 유산이 되어버린 그 미소를 떠올릴 때마다 리릭이 샘솟았다. 누구라도 어렴풋이 상상할수는 있겠지만, 절대 공감해서는 안될 과거의 한을 쏫아붇은 리릭의 위력은 강력했다.


……다시 묵시록의 4기사로 돌아가서, 하얗고, 빨갛고, 검고, 파란 네마리의 말이 나오는 구절을 읽었을때, 어쩌면 자신의 이름에 들어있는 말은 그 말들을 의미하는게 아닐까 싶었다. 정복의 백기사, 전쟁의 적기사, 기근의 흑기사, 그리고 죽음의 청기사.


처음엔 하얬던 자신의 인생은 붉은색으로 더럽혀졌다. 그랬더니 붉은색에 이끌려서 검은색이 찾아왔다. 그렇다면 곧 파란색도 찾아올까? 미유의 손을 꼬옥 잡고 산책하던 요코하마 부둣가의 파란색은 좋아했는데, 그것과 똑같은 파란색일까? 아니면 엄마를 데려간 파란색일까?


곧 파란 파멸의 미래가 들이닥칠 거란걸 예측했으면서도, 미래를 바꾸려는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파멸을 기다리고 있던게 아닐까? 아니면 자신은 파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란걸 오래전에 깨닫고 체념한걸까.


어느새 어른이 되었다는걸 비로소 눈치챘을때는 봄내음이 한창일 때였다. 마치 누군가의 음모처럼, 이 추악한 어른의 세계의 진실을 감추려는듯이, 머리를 아프게 하는 강렬한 향기였다.


나는 사마토키형과 시부야의 라무다형, 신주쿠의 쟈쿠라이 선생님과 함께 The Dirty Dawg이라는 그룹을 결성했다.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우리는 함께 세계의 제왕으로 군림했다. 이 멋진 팀에게 축복을!이라고 육성으로 외치고 싶었을 정도였으니까. (나는 그걸 또 TDD 첫 승리 기념 회식에서 술김에 멋지게 저질러 버렸고, 현재 그 흑역사는 라무다형의 핸드폰 앨범 어딘가에 고이 박제되어 있다. 청소년 여러분들은 술을 하지 말도록)


……그게 이 썩어빠진 세상의 치안을 현역 고등학생과 야쿠자, 패션 디자이너와 천재 의사가 지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중왕구 탓이야!로 바뀌기 까진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손이 팀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그것도 두번다시 붙일 수 없을 정도로.


행복이 끝나는 세계가 찾아왔다. 저항도 눈물도 무의미하다는걸 이미 알고 있었다. 무언가가 어긋나고 있는걸, 미쳐가고 있는걸 알아차렸을땐 이미 늦어있어서, 아니, 처음부터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어서, 부서지는건 싫다고 울부짖고 싶은걸 애써 삼켰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눈물은 검게 변해서 땅바닥에 떨어졌다. 애써 미소의 가면뒤에 모든걸 숨겼다.


무릎꿇고 개보다 못한 더러운 처지가 되어도 상관없으니까, 검은색에게 더이상 누군가의 미래를 부수지 말아달라고, 아니, 맘대로 해도 상관 없으니까 최소한 지로와 사부로만큼은 건들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검은색에 다른 색깔을 덧칠해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 순간 고개를 들었을때, 내 눈에 비친 세상이 붉게 빛났다.


빨간색. 내가 지니고 태어났고, 함께 살아왔으며, ‘그 사람’과 만나게 해준, 나만의 색.


빨간색이라면, 누군가를 구할 수 있을까, 라는 철없는 영웅심리가 다시 피어났다. 한때 폭력의 세계를 동경했던 나는 더이상 없었다. 정의감의, 정의감에 의한, 정의감을 위한 히어로로 다시 태어났다.


서투르고 한심한 혼자만의 작전. 아니, 지금까지 잘해왔잖아, 괜찮을거야, 틀림없이 괜찮을거야, 나는 전 The Dirty Dawg의 멤버, 이케부쿠로 디비젼의 야마다 이치로니까!


나중에 엄마 아빠를 다시 만난다면, 혼나도 좋으니까,


제대로 된 형이 되었는지 물어보고 싶으니까,


그때까지 좋아했던 그 말을 몇번이고 다시 떠올리며,


나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동생들과 함께 내일이 오기를 기대한다.


어차피 언젠가 헤어지게 될 인연이란걸 처음부터 알았다.


처음 만났을땐 꼬맹이였던 놈이 내게 마지막으로 던진 싸늘한 시선은 어른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눈빛이었다. 그렇게 전설은 과거가 되었다. 후회도 여운도 미련도 없었다.


요코하마로 돌아간 나는 새로운 놈들을 찾아 새로운 팀을 결성했다. 토끼짭새 경찰놈과 21세기에서 서바이벌을 외치는 또다른 미친놈. 더럽게 미친 주제에 힘은 또 무식하게 세지. MAD TRIGGER CREW. 그게 우리다.


가뭄에 콩 나듯 전 동료들의 소식을 들었다. 라무다놈은 시부야로, 쟈쿠라이 선생님은 신주쿠로 돌아가서 각자 팀을 결성한 모양이다. 그녀석도… 예외는 아니였다. 한때 동료였던 자들과 승부를 겨루게 될 미래가 다가올거란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서야 깨달았다. 사마토키의 ‘사’를 고로아와세를 사용해서 3으로 바꾸고, ‘토키’를 때 시時자로 바꾸면, 사마토키, 세마리 말의 시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하얀 말과 붉은 토끼, 그리고 검은 꾀꼬리의 시간이겠지. 그리고 셋을 한데 어우르는 파란색의 시간. 나를 위한 시간. 오직 미유를 지키기 위해서 살아오다가 비로소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  


지금의 나에게 진정으로 어울리는 색은 파란색이야. 내 인생은 하얀색에서 시작해서 빨간색과 검은색을 거쳐서 이제 파란색이 되었어. 돌아갈 생각은 없어. 애초에 돌아갈 방법도 없는걸. 한때 우리는 우연히 같은 색에서 만났지만 각자의 색의 길을 가게 될 운명이었던거야. 설령 그것이 극과 극으로 치닫는 길이었다 해도-


그러니 빛나줘, 나의 붉은 별. 나의 유일무이한 뮤즈. 끊임없이 리릭을 생각해내면서 결전에서 너를 마주하게될 그날까지.


여동생 이름은 어느 팬픽에서 본 이름이 맘에 들어서 거기에 이것저것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아오히츠기 미유碧棺自由. 일단 한자 표기를 그대로 읽으면 자유. 성우 이리노 미유入野自由님의 표기와 동일합니다. 푸른 관의 자유. ‘푸른’에 집중해서 ‘푸른색=멍(=폭력)’이라고 해석해도, ‘관’에 집중해서 ‘관=죽음’이라고 해석해도 ‘자유’가 엮이는 순간 급 앵슷  

아니면 푸른색=MTC, 관=해골=삼톡이로 해석해서, 삼톡이가 갈망하는 자유… 죄송합니다 살려주세요


미유, 애칭은 뮤 아니었을까. 프랑스어로 ‘~보다 좋다, 더 잘(better)’라는 뜻인 단어 Mieux가 있어요. 최소한 엄마의 인생, 오빠의 인생보다는 훨씬 좋은 인생을 살길 바라지 않았을까… 그리고 (발음만 따지면) 뮤직music, 음악이 연상되는데, 아시다시피 히프마이는 랩으로 싸우는 세계. 이 두가지는 프듀48에서 수고하신 타케우치 미유竹内美宥님에게서 영감받았어요. 리릭을 쓸때 사마토키의 뮤즈는 여동생 아닐까요?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혈육. 애초에 야쿠자가 된 이유…


그리고 색깔은:

하양: 정복, 순수함, 뽀쟉시절의 삼톡이

빨강: 전쟁, (삼톡이에겐) 폭력, 이치로, 쥬토

검정: 기근, (이치로에겐) 절망, 리오

파랑: 죽음, 사마토키, MTC

대충 이렇게 해석하면 될까요. 그와중에 노란색=빛은 코빼기도 안보이는게 절망 포인트라면 포인트

원문: https://archiveofourown.org/works/15812625

Ao3의 reishicolleen님, 감사합니다

원제는 'I'm proud of you' 


1년 넘게 뉴단에서 뻘짓이라고 하기엔 쓸고퀄이지만 어쨌든 뻘짓을 하던 절망잔당이 수메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태풍마냥 히프마이에 이륙했다는 소식입니다

탐라에 붉은머리에 민트빛 브릿지라는 범상치 않은 컬러링의 캐가 자꾸 출현하더라고. 근데 다크서클이며... 반쯤 풀린 눈이며... 퇴폐미가 쩔었어. 

그땐 몰랐지. 무덤 분산투자를 또 확장하게 될거라곤. 이것이 바로 최애가 1명이면 차애가 999명인 올캐러의 폐해

힢마에선 올캐러 입니다. 디비젼 올 스타즈 애껴요


평소에 몇십 페이지 단위로 놀던 사람이 2페이지라는 초단편을 만지니까 뭔가 감칠맛이 안나더라고요

작업하기 싫다는 의욕은 일의 분량과는 전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첫 투표결과 공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올라온 글입니다. 어저깨쯤 파이널 배틀 일러스트가 올라왔으니 간접적으로 느끼는 시간의 흐름(?)


끝났다.


우레와 같은 소리에 파묻히는 스타디움을 이치로는 바라보았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울려서,  잠시동안 마지막 충격파가 고막을 터뜨린 건지 궁금해했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마치 누군가가 스피커의 음향을 최대치로 키운 것처럼, 전부 들을 수 있었다. 비명, 환호, 박수갈채… 온통 소리지르는 사람들. 누군가가 확성기에 대고 소리지르고 있었고---비록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주변을 슬쩍 보자, 무릎을 꿇은채 복잡한 표정을 지은 동생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 맞다.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두통과 귀울림은 무시하면서, 동생들이 있는 쪽을 향해 억지로 몸을 일으킨다. 무릎이 휘어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균형을 잡는다. 약해빠져있을 시간은 없다-동생들을 한시라도 빨리 봐야 하니까.


갑자기 팔이 어깨를 감싸서, 똑바로 설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치로는 즉시 주변을 훑고 곁에 다가온 사마토키를 발견한다. 여전히 찡그린 인상이지만 대신 평소와 한참 다른,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다. “진정해라, 망할 꼬맹아.”


전 팀 동료에게 더이상 분노를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사마토키가 동생들과 자신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해서 자랑스러웠다. MAD TRIGGER CREW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고 말할 수 있어서 자랑스러웠다.


그래도 패배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쓰라린다. “네, 그럴게요.” 그렇게 대답하면서, 사마토키가 쥬토와 리오가 일으키고 있는 동생들이 있는 곳까지 부축하도록 몸을 맡겼다. “감사합니다.”


사마토키는 걸으면서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이치로는 지로와 사부로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애정을 가득 담아서 머리를 쓰다듬는다. “둘다 수고했어.” 자랑스럽게 말했다. MAD TRIGGER CREW의 강력함을 맛본 다른 팀이라면 들것에 실려나가야 했을 텐데, 이치로 본인은 최소한 견뎌낼 수 있을거란걸 알았으니까, 이게 공식적으로 첫 무대 배틀인 동생들이 무척 걱정되었다. 동생들이 버틸수 있었다는 것보다 더 만족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이거보다 더 좋은 팀을 찾을 수 없었을거야.”


하지만 둘의 표정으로 판단하건데 정작 둘은 다르게 생각한다는걸 알 수 있었다. 이치로는 사마토키에게서 벗어나면서 한숨쉬고선 동생들을 꼬옥 껴안았다. 둘다 후회와 고통을 이겨내느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지로는 눈물을 삼킬려고 입술을 깨물고선, 형의 온기에게 위로받으려고 품에 안겼다.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고, 다리가 흐물흐물 녹아내릴것 같았지만,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거의 다 됐는데, 거의 이길 뻔 했는데. 소리지르고 화내고 싶었다. 세상한테 틀렸다고 삿대질 하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편은 정정당당하게 이겼다는걸 알았다… 그리고 자신의 팀이 진 이유는… 서로의 약함 때문이라는 것도.


그 무엇보다도 아팠던건 현실이었다.


“니쨩…” 어떻게 형은 졌는데 자랑스럽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본인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아니 못했을텐데.


“이치니…” 형과는 달리, 눈물을 억누를 수 없어서, 사부로는 형의 품에 안겼다. 상당한 피해를 입은 막내는,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지만, 어떻게든 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안힌김을 썼다. 인정하기는 죽도록 싫었지만, 팀내에서 가장 약한건 자신이었다. 그래서 자신 때문에 진거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나약해. 자신을 원망하고 자책했다. 나는 한심할 정도로 나약해. “죄송해요…”


맏형은 단순히 고개를 저었다. “사과할 필요 없어.” 이치로의 말은 상냥했고 분노라곤 기색조차 찾을 수 없었다. “너희 둘다 자랑스러워.” 부드럽게 이어지는 말. “그리고 고개를 들어...” 시선은 상대편을 향했다. 말없이 서서 형제들만의 순간을 간직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사마토키와 그의 동료들 말이다.


“땅바닥만 보는 녀석에게는 평생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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